나의 궤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했던 너에게
오늘은 예지의 생일이다. 지금쯤이면 일본여행을 막 시작했을 귀여운 내 동생을 위한 글을 쓴다.
예지는 내 학부시절 나랑 약 1년 반 정도 함께 같은 방을 지냈던 소중한 룸메이트이자 예쁜 내 동생이다. 예지를 처음 만난 건 쪽지로부터였다. 그러니까, 당시 나는 2학년이었고 기숙사 입주가 시작되었던 2014년 2학기 어느 가을. 2인 1실을 쓰던 기숙사 방에 NEW 룸메이트의 짐들은 들어왔으나 정작 짐의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내 책상에는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짐만 기숙사에 넣고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우선 쪽지로 인사를 전한다는 내용이 담긴 쪽지. 나는 이 쪽지 한 장으로도 그 글의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지 예상이 되었다. 예의 바르고 착할 것 같은 친구. 그리고 따뜻한 아이.
그 기대는 정확히 맞았다. 나처럼 활발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곁을 내어주는 순간 귀여운 수다쟁이가 되었던 얌전하고 차분하고 배려 깊은 아이, 내 룸메이트 예지. 예지와의 기숙사 생활의 시작을 나는 그 쪽지 한 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너무너무 착한 예지 덕분에 그와 함께한 내 대학생활의 절반은 외로움과는 차츰 멀어져갓다. 그렇게 우리는 건국대학교 기숙사 드림홀 10층 맨 끝 방에서 예지와 나는 서로 의지하며 좋은 룸메이트가 되었다. 주말이면 맛있는 치킨을 같이 먹고, 서로의 고민 상담을 진중히 해주고, 구하기 어렵다는 과자(그 당시에는 허니버터칩이었다^^)를 깜짝 선물로 올려놓고는(나는 그때 예지가 써준 포스트잇 문구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365일 다이어터였던 내게 '언니 다이어트 중이지만 그래도 과자 먹고 힘내'라고. 언제나 다정한 쪽지의 예지.)했다. 또 재밌는 에피소들도 참 많다. 술 취한 예지가 기숙사 카페에서 파는 명물 빙수를 사서 '언니 선물이야!'라고 밝은 목소리로 외치며 방에 들어오기도 했고, 반대로 술 취한 내가 어느 단과대 벤치에서 자고 있을 때 예지가 나를 데리러 와 무사히 내 침대로 안착시켜주기도 했다. 음, 예지는 귀여웠지만 나는 진상이었지.
룸메이트보다는 친한 동생에 더 가까운 축에 속했던 예지랑 함께 뮤지컬과 연극도 보러 다니고, 서로 시험기간 때 재밌는 농담 따먹기도 많이 해서 그런지 내 블로그에는 예지와의 추억을 틈틈히 기록한 포스팅들이 많다. 별거 아닌 소소한 일상이기에 더 특별하고 애틋해지는 기록들을 보면 그때의 감정들과 예지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내게 찾아와준 예지라는 소중한 인연이 새삼 놀랍다. 둘 다 K-장녀였던 점과 먹을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 외에는 크게 겹치는 것도 없었지만 그냥 나는 예지라는 존재 하나가 참 좋았다. 대학교 졸업 후에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예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그러다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내 MBTI와 예지의 MBTI가 정반대라는 것. 이를 생각하면 다시 또 웃음이 나온다. 나는 정말 예지 하나만을 좋아하고 애정했구나. 물론 우리 예지도 마찬가지였겠지.
예지가 사정상 기숙사 방을 빼던 때가 생각난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함께하던 반려동물이 없어지면 다시 새로운 반려동물을 맞이하는 게 어렵듯 나는 예지 외에는 그 어떤 룸메이트와 함께 지낼 생각이 없었다. 내가 기억할 마지막 룸메이트는 예지 하나였으면 했다. 그만큼 예지는 나에게 소중하고 커다란 존재였다. 그래서 예지가 방을 뺀 이후 나는 2인 1실에서 1인 1실로 옮겨 대학교 4학년, 마지막 1년을 보냈다. 예지가 없어서 많이 외로웠지만, 그래도 기숙사 밖에서 종종 식사도 함께 하고, 예지 집에서 자기도 했다. 사실 나는 잠을 잘 못 자는 편은 아니지만 예지랑 있으면 잠을 더 잘자곤 했다. 편안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잘 때 코골이가 있는 편이고 예지 역시 잠꼬대인지 이갈이인지 수면 습관이 있다고 했는데 함께 지냈던 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그런 점을 한 번도 캐치한 적이 없다..! 서로에게 진하게 물들었던 탓인지, 각자 잠귀가 밝음에도 서로의 수면 패턴을 눈치채지 못하고 각자 잠에 취해 잘 수 있었음이 신기하다. 우리는 정말 공기 같이 서로에게 당연한 존재였나봐.
나는 진지하게 예지가 나의 귀인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전생에 부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신나게 놀았던 나의 20살을 뒤로하고 슬슬 외롭고 힘들어질 무렵, 예지가 짠-하고 나타나 빈 자리를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때론 예지랑 더 많은 추억을 쌓으러 여기저기 다니지 못함이 조금 아쉬워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좁은 방 한 칸에서 예지와 나눴던 따뜻한 호흡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그로 인해 포근했던 한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이 아늑해지고 가슴 깊이 또 한 번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예지야,
나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와는 상관 없이 너를 정말 많이 아껴.
나는 말야,
어느 날 이니스프리가 세일할 것 같다는 네 말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이니스프리 제품이 지금 필요하거든!'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했던 귀여운 너를,
내가 잠들기 전 장난 삼아 네게 자장가 불러달라고 하자, 안 된다고 옆 방에서 민원 들어온다고 거절하던 사랑스러운 너를,
졸려서 침대에 누운 너를 향해 이 닦고 자라고 얘기하던 내게 이 닦으면 안 졸려진다고 얘기하던 너를,
여전히 많이 아끼고 애정해. 너는 내 영원한 룸메이트야. 너를 저장한 '내 룸메이트 예디'는 평생 바뀔 일이 없을 거야.
그리고 그거 아니? 2015년 6월 나는 내 일기장에 너에 대해 '나의 궤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하는 이'라고 기록했어. 또 우리가 함께 시간을 나눈 기숙사 방에 대해 '우리가 함께 꾸려가는 작은 우주'라고 쓰곤 했어. 지금은 서로 물리상 가장 가까운 궤도에서 서로 함께할 수 없지만, 가장 가까이서 나누곤 했던 마음으로 우리가 또 다른 우주를 만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믿어. 생일 축하해 예지야, 네가 있어서 행복했어. 그리고 너 역시 그러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10월 20일에 네 룸메이트 언니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