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를 나 역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지
아현이는 학부 시절 같은 학과 후배이자 교지 후배였다(*하지만 아현이는 국문학과를 탈주해 문화콘텐츠학과로 갔지). 모두 1년 터울 차이. 14학번으로 들어온 아현이는 나와 같은 학과에, 나와 같은 중앙동아리인 교지편집위원회에서 나와 함께했다. 사실 이제 막 21살이 된 나는 20살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우습지만. 언니들을 비롯한 선배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내 새내기 시절이 지나, 누군가의 새내기 시절을 지켜보고 열심히 끌어줘야 하는 선배가 되어야 한다니. 너무도 어려운 퀘스트를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받은 사랑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퀘스트에 기꺼이 동참해야 했다. 우선 흔히들 이야기하는 밥선배(밥을 사주는 선배)가 되어 끼니를 함께하는 것부터 시작! 밥후배의 타겟들 중 하나는 아현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원해서 그 친구의 밥을 사준 건 아니었다. 같은 과에 같은 동아리이면 특히 더 애정이 갈 법도 한데, 내 입장에서 처음부터 아현이가 그리 예쁜 동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현이가 입학과 동시에 나와 당시 친했던 동기의 전 남친과의 교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전 남친이라고 하는 내 동기놈부터 족쳤어야 했는데 말이다. 아무튼 곱게 보일리 없는 동생을 챙겨주어야 한다니. 당시로서는 조금 난감했었다. 동기와의 의리를 고려할 때 아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내 상황과 별개로, 아현이는 '절대적으로' 귀여운 아이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아이돌 '츄'와 흡사한 아우라와 외모, 꾸며내지 않은 순수함과 귀여움을 골고루 갖춘, 예뻐하지 않을 수 없는 후배의 정석 그 자체였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동생을, 나는 역시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현이를 데리고 나는 흔한 대학가 백반집이 아닌 피자헛과 같은 프랜차이즈 피자집에 데려가서 점심을 사줬다. 가난한 대학생이 밥을 사기에는 다소 가격대가 있는 곳이었지만, 뭐랄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정확히 거기서 나는 아현이에게 반했다. 역시 나에게 사랑은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그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목격한 순간, 나는 의리고 뭐고 아현이에게 폴인럽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아현이의 현 남친의 전 여친이었던 내 동기는 꽤 깨어있는 친구로서, 아현이가 무슨 잘못이냐,고도 말했었다.)
아현이와 지내면 지낼수록 이 아이는 뭐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마주하곤 했다. 그러니까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1살 터울 동생에게서 친근하고 편한 친구의 모습을 만났고, 또 때론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깊은 평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현이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본인이 가진 나에 대한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동시에 내 상황을 절대적으로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한없이 좋은 동생이자, 내 캠퍼스 절친이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붙어 있었고, 그 시간들을 돌아보면 애틋하다기보다 웃음이 먼저 나는 추억들이 참 많다. 조금만 더 청춘 같은 기억들을 꺼내보고 싶더라도, 내가 막 떠올리는 아현이와의 기억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다이어트하다가 뷔페 가서 배 터지게 먹고 학관에서 각기 다른 층 여자화장실에서 변기를 붙잡고 토한 것, 편집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정신줄을 놓고 코믹한 영상을 핸드폰 어플로 촬영한 것, 계절학기에 무려 6학점을 꼬박 같이 들으면서 개고생을 한 것, 일명 교지 편집장 타도를 한 다음 술집에서 울면서 술 먹은 일 등등 눈부시게 예쁜 추억들보다는 눈물나게 웃기고 어이없는 쪽에 더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먼저 생각난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특별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정말 성격 유형 검사의 정석이 되어버린 MBTI에서 적용되는 이분법은 이성과 감성, 내향과 외향 등이다. 나에게 있어 사람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기준은 바로 '창과 방패'이다. 이 사람이 창에 가까운지, 아니면 방패에 가까운지를 나는 유심히 지켜보고 한 번에 판단한다. 이때 창은 표현을 잘하고 다소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다가와주는 애정 표현 방식이라면, 방패는 창과 달리 기다려주며 배려가 몸에 깊이 밴 사람들의 사려 깊음을 의미한다. 흑백논리와 같이 매우 위험한 이분법이나, 나에게 있어 사람들은 창 아니면 방패 둘 중 하나로 나누어진다. 쉽게 말하면 창이냐 방패냐는 결국 표현이냐 배려냐,하는 걸로 나눠진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이나 꽤 나에겐 쉽게 사람을 간별하는 척도로 쓰여왔다. 이 사람이 방패면 나도 그에 조금 더 맞추고자 노력하게 되고 이 사람이 창이면 나 역시 그에 걸맞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나는 창에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아현이는 모순적인 아이였다. 바로 창과 방패 모두 소지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에 대한 본인의 소중하고 귀한 진심을 거리낌없이, 아낌없이 표현해 주면서도 내 처지나 상황 등을 고려해 주려고 많이 애쓰고 노력해주었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창과 방패를 다 가진 아현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싶기도 하다. 아현이의 핸드폰에 나는 여전히 'best no.1'이라 저장되어 있다. 아현이의 마음이 이렇게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내게 전해져 올 때마다 나는 이 아이와의 인연을 내가 더 잘 지킬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내게 과분하게 예쁜 내 동생 아현이. 최근에 대전에 놀러와 내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대학생 때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1997년에 나온 미녀와 야수 벨 바비인형 미개봉을 무려 직구로 어렵게 구해서 깜짝선물로 주었다. 미녀와 야수를 좋아하는 내 취향을 알아주는 아현이가 고마웠고, 아현이 말에 따르면 '혹시 몰라서 머리맡에 인형을 두고 자 보았는데 악몽을 꾸지 않았으니 괜찮은 빈티지 물건'이라고 얘기하는 그 귀여운 쫑알거림이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너무 귀여웠다. 언니들에게 예쁨 받고만 사느라 아랫사람을 챙기기 어렵다는 핑계가 부끄러워도 아현이에게는 자꾸만 그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부족해도 나를 지금처럼 좋아해줘야 해. 왜냐면 나도 우리 아현이를 너무너무 아끼고 애정하거든.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가장 어리고 빛났을 20대 초반 시절에, 내 곁에 아현이가 머물러 주어서 나는 넘치도록 기쁘고 감사했다. 계산 없이, 상처 받을 걱정 없이 온전히 한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주고 기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인지 뒤늦게서야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아현이로 인해 빈틈없이 신났고 세상 가득 든든했었다. 아현이의 핸드폰에 나는 여전히 no.1으로 저장되어있어도 아현이에게는 언젠가 나보다 더 좋은 언니가 선배가 나타날지도 모르고, 또 아현이의 평생 동반자가 생겨 나의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덜 섭섭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한 시절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던 영향력을 가졌던 순간이 있었고, 그때 그 시절을 나눈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니까. 또 한 시절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역사는 기억 어느 한 편의 가장 따스한 감정으로 저장되어있을 테니까! 나는 괜찮다. 그래도 잔잔한 애정의 마음으로 서로의 일상을 지켜보고 싶다. 예전같이 서로로 인해 채워지는 하루는 더이상 찾아오기 어려울 지라도, 서로로 인해 조금 더 따뜻해지는 하루는 우리의 힘으로 충분히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그 기회는 내게 줄 수 있지, 아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