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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할 수 있는 일, 버거움과 자부심 사이

모유수유, 그 찬란한 고통에 관하여

by 옫아


출산휴가를 들어가면서 나의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내 포지션을 다른 누군가가 '잘' 대체한다는 것".

웃긴 이야기다. 내 업무를 대체하기 위해 대체자를 뽑는 건데, 그걸 걱정하다니.


하지만 지난 8년 간의 직장생활을 돌아보았을 때, 나의 자부심은 '이 회사에서 이 업무를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라는 것이었다.

내 전공과 전혀 상관 없는 회사에서 내 전공을 잘 살려서,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업무를 한다는 게 나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자부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찾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찾는 업무를 마주할 때면 늘 기쁜 활기가 돌았다.


그런데 이제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업무를 기꺼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니.

대체자를 뽑는 기간 동안에도 나는 남몰래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대체자가 뽑혔는데 입사 전 채용 취소를 통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황당하면서도 '역시 내 자리는 내 자리인가봐'라는 오만한 스스로를 목격하기도 했다.


마침내 대체자가 뽑혔고, 그 친구를 약 3주 가량 인수인계 시키고 실무를 함께하기도 했다.

쌩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내 업무를 잘 따라오는 것을 보고 허탈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그 친구가 내 업무를 익히는 동안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없음을 조금씩 실감했다.

조금의 안도를 안고 출산휴가에 들어간 지 1주일이 되었을 때, 나의 대체자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 많은 일을 어떻게 혼자 하냐며, 도망쳤다고 한다.

이어 나의 업무를 급하게 팀장님이 대체하게 되었고 어찌저찌 팀이 굴러가는 듯 하다.


그렇게 나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일은 없구나,를 슬프지만 받아들이던 그때.

정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건 바로 모유수유였다.

임신중독증으로 아기를 조금 빨리 낳고 나서, 나는 미안함에 모유수유에 대한 강한 의지가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제왕절개한 환자치고 초유가 빨리 나왔고, 모유양도 부족하지 않게 나왔다.

아빠는 줄 수 없는 모유를 나만이 줄 수 있다니, 아기에게도 나만이 해줄 수 있는 게 생기다니, 조금은 기쁜 그러나 버거운 기쁨이었다.

그렇게 큰 준비 없이 모유수유를 시작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일임을 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유수유는 가치 있지만 정말 중노동이었다.

직수라고 해서 아이에게 직접 젖 물리는 행위가 있는데, 그 자세를 잡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모유는 금방 소화가 되기 때문에 수유텀을 지키지 않고 아이가 먹고 싶어할 때 상시 제공해야 했다.

젖을 물리면 아가는 엄마 냄새에 취해 먹다가 잠이 드는데, 그때마다 아이를 깨워 계속 젖을 물려야 한다.

아이가 젖을 다 빨지 않거나 오래 자서 젖을 물지 않아도 가슴에 모유가 차는데 이때 일정시간이 경과되면 가슴이 돌덩이처럼 딱딱해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유축을 해줘야 한다. 그래서 새벽에도 아기가 잠을 오래 자도 엄마는 오래 잘 수 없다.

아이가 울거나 아이 생각을 하면 젖이 돌기에 항상 브래지어에 수유패드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그 외에도 모유수유의 번거로움은 꽤 존재한다.


그런 힘듦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감수해야 한다니, 나만이 할 수 있는 거라니.

쉽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엄마만이 줄 수 있다는 자부심. 그리고 엄마만이 해야 한다는 버거움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마치 임신을 했을 때 감정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임신은 찬란한 고통이라고 지인이 이야기했던 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임신으로 인한 다양한 고통이 있지만-소양증, 변비, 치질, 어지러움, 입덧 등- 그럼에도 태동처럼 확실히 임신부만이 누릴 수 있는 찬란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임신이야말로 정말 엄마만 할 수 있지만 모유수유는 언제든지 분유라는 다른 선택지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모유수유를 놓지 않는 이유는 아이에 대한 사랑도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역시 엄마의 의지가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만이 줄 수 있는 것. 나만의 사랑방식이라는 강한 의지.

그 의지로 다른 고통들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집의 경우 남편과 나의 육아 업무가 암묵적으로 잘 구분이 되어 있는 듯 하다.

남편의 경우 아기 빨래와 마무리, 집안 청소, 목욕, 손톱깎기, 그 외에도 빨래나 청소 분리 배출 등의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맞다, 사실상 모유수유와 관련된 영역을 제외한 다른 영역을 잘 전담해 주고 있다.

그러니 모유수유라도 내가 잘 붙잡고 있어야 엄마로서 체면이 살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고백.


직수를 할 때 사출 때문에 아기가 인상을 꾸깃할 때

남편이 새벽 수유(유축한 거 먹이기)해줘서 더 잘 수 있는데, 띵띵 부은 가슴 때문에 유축하러 꾸역꾸역 거실로 나올 때

직수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제 좀 쉬려고 누웠는데 배고프다며 또 젖을 찾는 아기를 볼 때

그 외의 여러 순간들에서도 아, 단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곤 한다.


하지만 내 모유로도 충분히 잘 자라주는 아가를 볼 때, 모유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흔한 표현에도 웅장한 자부심을 느낄 때, 아이가 젖을 찾아 공격적으로 내게 달려들 때, 그 외의 수많은 순간들에서 나는 모유수유,라는 내 선택을 충분히 긍정하게 된다.


힘들다. 그리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모유수유에 대한 버거운 자부심을 끝내 잘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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