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1.
얼마 전 맞은 편 집 Mr.D가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가 2년 전 이곳에 처음 이사왔을 때애도 Mr.D는 꽤 연세가 있으신 할아버지였지만 그때만 해도 거동이 크게 불편한 모습은 아니었고 우리에게 건네는 언어도 또렷했다. 그러나 그 이후 몇 번 뇌에 출혈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D가 기력이 급격하게 쇠하는 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지켜봤다. Mr.D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마치 2년 전 모습처럼 날씨가 좋을 때면 집 밖에 의자를 갖고 나와 앉아 있으면서 운동을 가는 나를 보고 인사하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딸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다시 건강을 되찾으셨네? 라고 생각을 했지만 Mr.D가 돌아가시고 난 뒤 생각해보니 그것은 어쩌면 화광반조 아니었을까 싶었다. 더 이상 그 집 앞을 오고가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D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우리는 꽤 슬펐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와 딸은 혼자 남겨진 Mr.D의 부인 B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비가 오던 어느 날 B와 D의 집 앞에 편지를 가만히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B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꼭 껴안아주었고 그 편지를 오래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2.
우리 집 2층 창가에 앉아있으면 창문 너머로는 맞은 편 B와 D의 집이 보인다. 시선을 방 안으로 돌려보면, 며칠 뒤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삿짐을 선박으로 보낼 예정이라 방은 꽤 단촐하게 느껴진다. 아내와 함께 몇 주 전부터 차근차근 버리고 갈 것, 팔고 갈 것, 주고 갈 것, 한국으로 가지고 갈 것을 정리해둔 덕분이다. 이것저것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처분하고 난 뒤 2층 방 책장에는 딸이 어릴 때부터 읽어온 그림책이 아직 몇 권 남아있다. 미국에 올 때 여덟 살이었고 이제 열 살이 되었기 때문에 비록 아이는 그림책을 읽지 않는 나이로 성장했지만, 성장 이전의 흔적은 집 안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몇 권의 그림책 중에는 고 윤지회 작가의 <뿅가맨>이 있다. 다소 코믹한 책 제목과 달리 이 책을 집어들 때마다 나는 몹시 착잡해진다. <뿅가맨>은 내가 딸에게 거의 처음으로 직접 사준 그림책 중 하나라서 지금까지 애착을 갖고 잘 보관을 해온 책인데, 이 책을 쓰고 그린 고 윤지회 작가는 위암에 걸린 뒤 항암치료를 받다가 2020년 12월 마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 윤지회 작가가 항암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뭐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가가 출시한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구입해서 잘 쓰고 있었는데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날 밤 꽤 여러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윤지회 작가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내 딸과 나이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좀 더 감정이입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윤지회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 날 밤 나는 짧게 일기를 썼는데,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 윤지회 작가에게는 아이 한 명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현아와 나이가 같은 다섯 살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이 아이들은 2023년에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그때 나와 아내는 서른 아홉에 닿아있을 거다.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주 건강하고 아무 일 없이 서른 아홉이라는 시간에 안착해 있을까? 지금 느끼는 아이와 나의 유대관계는 그때도 여전할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20년 서른 여섯 살의 나는, 2023년 서른 아홉 살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를 궁금해했던 셈인데, 내가 떠올린 단어는 <지속성>이었다. 돌아보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크게 아팠던 것도 없이, 아이 문제로 크게 속을 썩였던 적도 없이 서른 여섯 해를 살았는데 이러한 무탈함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던 때였다. 지금처럼 계속 밤에 함께 잠들고 학교나 학원가는 것을 보고 주말에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부모와 자식으로 서로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나는 스스로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외력에 의해 내 삶의 원치않는 방향으로 규정되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 2025년 마흔 한 살이 된 지금까지 그러한 무탈함은 지속되었고 미국에서 여전히 우리는 큰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염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은 지속되었다. 어쩌면 이 지속성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테고, 아니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가설이겠다.
4.
일상 속에서의 무탈함과 평온함, 그런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된다. 무탈함과 평온함을 쫓는 태도는, 인생에 있어 아무런 도전과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굴곡과 가슴졸임은 늘 있겠지만, 지나간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것들이 많았다고 인정하는 태도, 행복한 시간과 기억을 발견해내려는 태도, 어쨌거나 이만하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태도가 일상의 평온함을 만든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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