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라는 나라는 비록 현재(2017년)는 여행자제국가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누구나 한 번쯤은 방문해봐야 할 나라라 생각한다. 지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나라는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인류문명의 고향인 그리스와 맞닿아있다. 민족 구성으로 보자면 터키인과 쿠르드인으로 구분되는데, 사실 이 터키인이란 사람들의 외모만 보더라도 이를 쉽게 어느 한 민족으로 구분하긴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사람 같은 외모도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 혹은 남유럽 사람과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고대 히타이트, 헬레니즘 국가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그리고 셀주크 및 오스만 제국까지 정말 다양한 민족들이 삶의 터전을 자리 잡아갔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외관상 특징으로 민족을 구분하긴 어렵다. 그런 이 나라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이다. 이스탄불의 가장 큰 공항의 이름이기도 한 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차 대전 이후 길길이 찢길 뻔 한 나라를 구하고 재건한 터키의 국부인데, 한국으로 치자면 광개토대왕+세종대왕+이순신+박정희+김대중 등의 사기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아타튀르크는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국가기반의 모토로 삼았으며,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을 정착시켰다. 무엇보다 뛰어났던 부분은 아랍문자가 아닌 라틴문자를 사용하는 언어 개혁법을 적용한 것인데,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통해 터키인들은 다양한 민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민족이라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터키인은 외관상 비슷한 어느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의 집단인 측면이 강하다.
서론이 상당히 길었다. 이렇게 서론이 길게 된 까닭은, 결국 터키라는 다채로운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기념비적인 역사적 사건 몇 개를 정확히 더듬어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사실 없이 해당 국가가 유명한 관광지라는 이유로 방문하게 되면 참으로 볼 것이 황량하다. 예컨대 하기야 소피아나 블루모스크, 톱카프 궁전과 같은 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지역의 역사를 모른다면, 그저 오래된 벽돌 하나를 만져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은 14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나라는 주지하다시피 동로마제국으로부터 파생된 나라인데, 로마제국의 건국자인 로물루스 형제가 기원전 700년대 즈음이라 생각하면 이는 무려 2천 년이 넘는 국가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로마보다 크고 강대했던 나라는 있을지언정, 이처럼 오랜 역사를 하나의 국가가 명맥을 이어간 적은 없다. 그만큼 로마라는 나라는 시스템적으로 탁월했고, 현대문명의 상당 부분을 이어온 훌륭한 제국이라 생각한다.
로마가 훌륭한 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비잔틴 제국의 말미는 상당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비잔틴제국도 전성기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에는 서유럽을 제외한 북아프리카,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소아시아, 이스라엘 지방까지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15세기 멸망 직전의 비잔틴 제국은 고작 콘스탄티노플과 데살로니카, 펠로포네소스 일부만을 가진 소국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현재 이스탄불 시의 영토만큼도 차지하지 못한 수준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이 비잔틴 제국을 감싸 안으며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이 그 작은 콘스탄티노플 도시국가를 쉽게 정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에 있어서 성지와 같은 곳으로써 다양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정말 신기했던 부분은, 콘스탄티노플에는 베네치아 인들이, 강 건너 갈라타 지역에는 제노바인들이 거주했다는 것이다. 물론 제국의 멸망 이후에 이 유럽 사람들은 거의 다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이들의 후손도 당연히 현재 터키에는 상당 부분 거주하고 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도 조금은 재미있는 게, 이들은 예니체리와 같이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정예 보병부대도 있었지만, 아나톨리아의 군단, 세르비아 등 유럽에서 넘어온 용병 군단 등도 있었다는 것이다. 터키 사람들과 일하다 보면 간혹 이 사람은 정말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다는 분들이 있었는데, 근 육백 년 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보자면, 이러한 추측은 생각보다 타당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을 들여 책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며 서평을 쓰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요즘 점점 육아와 업무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서평을 쓸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도 20분밖에 남지 않아 마지막 에피소드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그 금각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리적 요새의 함락이라는 점에 있다.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쇠사슬 장벽으로 막아둔 금각만(Golden horn)의 내부에서 오스만 제국은 어떻게 해상 공격을 했는지 이야기를 타고 가다 보면 그 흥미로운 전개에 책에서 손을 떼기 상당히 어려워진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메트 2세와 비잔틴의 콘스탄티누스 11세 리더십의 차이였다.
물론 후행적인 해석일 수는 있지만, 승리자인 마흐메트 2세의 묘사를 보면, 그는 상당히 잔혹하고 강한 리더였다. 전투에 실패한 장군이라면 측근이라도 그 책임을 물어 사형을 지시하기도 하였고(실제 사형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율과 책임을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왕이었다. 그렇다고 그 채찍만 있어서 승리하는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오스만 측 대군은 세르비아나 아나톨리아, 등의 용병들이 상당수 많이 분포했는데, 이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콘스탄티노플의 보물이나 사람들을 가질 수 있는 상당한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그러니까 어떠한 정신승리가 아닌 확실한 정량적 성과가 눈에 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투에 실패한 장군도 보듬어 주고, 방어에 성공한 전사들에게 딱히 어떠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이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여러분의 노력이라고. 어떠한 정량적 채찍이나 당근이 없이, 믿음에 의존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장벽이 함락되고도 수많은 주민들은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기도만 하고 있었고, 그들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더십에 대한 생각은 늘 한다. 나도 지금 현장에 나가면 백 명 이백 명의 근로자의 공사팀장이 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 천명 오천명의 근로자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현장소장이나 책임자가 될 수 있기에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이런 리더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떠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만들어 효과적인 조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그저 마음만 좋고 형이상학적인 목표만 만들어 놓는다고 괜찮은 조직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 더 클리어하고, 손에 닿을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는 그런 리더. 그런 리더가 되려면 어떤 점을 더 보완하고 배워가야 할까.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마주치며, 스스로 고민해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다시 읽어봐야 할, 훌륭한 전쟁의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중세의 변곡점이 된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인간과 종교와 과학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라는 출판사의 설명이 딱 알맞은 책이다. 혹시나 이러한 것들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로저 크롤리 지음, 이재황 옮김,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