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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Feb 17. 2016

거절의 미학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주니어 시절엔 여기저기서 지시 혹은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라 거절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무심코 받아들이곤 합니다. 문제는 바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스텝이 꼬이면 일이 커지곤 합니다. 거절의 미학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예컨대 이러한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발전소를 짓는 데는 토목, 건축, 기계, 전기 공정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발전소를 지을 단계는 아니고, 그냥 발전소 공정을 소개하는 PT정도 준비하는 차원입니다. 당신은 '건축'을 전공했고, 해당 팀의 '막내'입니다. 팀장은 팀원들에게 PT 준비할 것을 요구했고, 당신은 막내이니 건축 PT에 전체 취합까지 담당했습니다. 양식을 배포했고, 토목이나 기계 선배들은 알아서 PT를 작성해 보내왔습니다. 헌데 이 전기 선배는 계속해서 예전에 했던 PT자료만 보내고만 있습니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애매한걸 정해주는 남자 혹은 여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출처 : KBS2)


일단 애매모호하게 업무 스콥을 지정해 준 팀장이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각종 회의에 보고에 머리 복잡한 팀장에게 요러한 소소한 것으로 부담을 주긴 싫습니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전기 선배에게 다가갔습니다.

"저... 선배님, 이번에 만드는 PT, 전기분야는 선배님이 작성해서 주시는 것 맞지요?"
"RE: 어? 어, 일단 내가 보내준 걸 다 취합해서 초안을 만들어 봐. 그럼 내가 수정을 할게."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한정 없이 길 경우, 내가 모르는 전기분야에 대한 PT를 내가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여 년간 일을 하다 보니 이러한 경우는 십중팔구 애매한 상황에 빠질 공산이 큽니다. 즉 DOR;Division of Responsibility가 애매모호하여 나중에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는 거죠. 나중에 팀장이나 임원이 이 전기의 '전'짜도 모르는 개떡 같은 PT는 누가 만들었냐고 하면, 전기 선배는 조용히 숨만 쉴 것이고, 전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나만 십자가에 걸릴 것입니다. 그 후, 전기 선배는 담담히  이야기하겠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챙긴다고 챙겼는데, 저 녀석이 초안을 너무 이상하게 잡는 바람에... 어떻게든 제가 잘 마무리해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시계를 아무리 거꾸로 돌려 보려고 노력한다 한들, 나에 대해 땅에 떨어진 신뢰는 다시 거스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시 시계를 되돌려 봅시다.

"RE: 어? 어, 일단 내가 보내준 걸 다 취합해서 초안을 만들어 봐. 그럼 내가 수정을 할게."

요러한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거절의 미학이 필요합니다. 저는 전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PT란 본디 프리젠터의 내러티브가 중요한데, 저는 발전소에 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선배님이 초안을 작성해 주시면  그다음부터 수정은 제가 하겠노라고.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물론 그러한 말을 건네었을 때, 전기 선배의 찌릿한  눈초리쯤은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앞뒤 꽉 막힌 사람이라면 그냥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고, 이놈  회사생활할 줄 모른다고 은근한 비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이 앞서 설정한 팀장, 임원 앞에서 십자가에 걸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둘이  실랑이하다 보면 팀장이 개입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설령 팀장이 "그냥 막내니까 김대리, 네가 해라~" 하면 그땐 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는 팀장이 나중에 나를 십자가에 걸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까진 그냥 어느 정도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수평적 관계, 즉 직속상관이 아닌 관계에서 직급이 높은 사람이 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을 덥석 덥석 물어온다면 나중에 내 직속상관에게 혼납니다. 그럼 여기서 직속상관과의 관계에서 거절의 미학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하 직속상관은 시니어로 부르겠음)

시니어가 일을 시킵니다. 나는 일이 지금 산더미같이 많아 가슴이 답답한 상태입니다. 이럴 때 거절의 미학을 생각하고 "아, 저 일이 너무 많아서 못하겠어요." 이러면 십중팔구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지요.

"RE: 무슨 일이 얼마나 바쁜데?"...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니어든 주니어든 매 한 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니어도 주니어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세세하게 다 기억하지 못하며, 주니어도 자기가 무슨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정리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일단 일을 시키는 시니어에겐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네,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리곤 자리에 앉아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업무들을 나열해봐야 합니다. 자신의 생산성은 자기가 알고 있으니, 해당 업무 옆에 마칠 때까지 필요한 시간도 적어두면 금상첨화 겠지요. 이  리스팅;Listing을 마치고, 신규업무를 할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체크해봐야 합니다. 정말 짬이 없으면 다시 이 리스팅과 함께 시니어에게 가야 할  것입니다.

"시니어님, 그런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이러이러합니다. 다 마감일자가 임박한 것이라 방금 주신 업무는 당장 하기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시니어는 신규업무의 마감일자를 늘려준다든지, 다른 업무는 다 제쳐두고 일단 이 신규업무를 하라고 한다든지, 주니어의 업무가 너무 많다 싶으면 자기가 하든지, 하다못해 정 방법이 없으니 야근이나 주말근무를 해서 끝내라든지, 아무튼 대책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직속상관에게 거절을 표시할 때는 최대한 완곡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일을 같이 하는 동반자로서 보여줄 것 다 보여주고 같이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절도 없이 Yes! man으로 일을 받은 후, 마감일자 다 되어 다른 일이 바빠서 하나도 손을 못 댔다느니 얼버무리면 시니어는 빵 터질 것입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든, 그냥  마음속으로 다음부턴 이런 놈이랑 일을 하지 말아야지 하든 간에 말이지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강박관념이 형성되었습니다.

"엄마 말 잘 들어야 착한아이지~"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착한 학생이지~"...
착한 어린이 생활은 어린이에게... (출처 : www.ararian.com)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며, 거절 후에는 일말의 죄책감 또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이후 수동적이게 되고, 의견을 표출하기 보다는 말을 듣기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일상에서나 업무 할 때나 이렇게 Yes! man으로 살다 보면 결국엔 빵! 하고 터뜨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서 애초에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백번을 되뇌어 봐도 돌아오는 건 신뢰감 없는 나의  모습뿐이지요.

부디 거절의 미학을 절묘히 구사하여 서로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상기 상황은 모두 가상의 것입니다. 전기 직종에 대한 원한 따윈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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