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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함께 존재하기

<문화비축기지> 그대로 보기 2019년 11월 8일(금)

by aboutjina

공간은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매력 있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갖기도 하고 때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런 공간이 가장 매력 있게 표현되는 곳은 바로 '영화'이다. 해리포터의 '벽장',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의 성', 미드나잇 인 파리의 '파리', 인셉션의 '꿈의 공간'처럼 공간은 그저 머물고 있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영화 속 공간의 특성은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공간에 의도적으로 투영시켜 관객이 이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관객은 영화 속 공간을 3차원을 넘어 4차원까지 체험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미 영화를 통해 자극적인 공간에 중독되어 있는 대중들에게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를 매력적이게 소개해야 한다면 과연 어떤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까? 여기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간을 표현하는 공연이 있다.



<문화비축기지> 그대로 보기 공연 포스터.


지난 2019년 11월 7일(목)부터 11월 10일(일)까지 문화비축기지 T4에서 '그대로 보기' 공연이 있었다. 공연을 소개하기에 전에 먼저 T4 공연장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마포구 서울 월드컵경기장 인근에 있는 ‘문화비축기지’는 41년간 일반인의 접근과 이용이 철저히 통제된 공간이었다. 원래는 석유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이용되던 석유비축기지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된 후 10년 동안 활용방안을 찾지 못했다. 그 후 지난 2013년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문화비축기지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유류보관 탱크 5개 중 4개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됐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이 T4 공연장이다. 단순한 문화시설을 넘어서 상징적인 공간이 되도록 시민과 채워나가고 싶다는 이 공간에서 과연 어떤 공연이 보이게 될까? 그리고 그곳에 음악을 들려줄 이들은 누구일까?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유튜브 <그대로 보기> 홍보 영상 캡처

이미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탄탄히 구축한 두 명의 아티스트 '박우재', '박지하'가 그 주인공이다. 전통 음악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 음악만이 아닌 예술이라는 공간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 존재 자체가 이미 예술이 된 두 명의 아티스트이다. 꾸며지지 않고 심지어는 거칠기까지 한 이 공간과,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두 사람은 자칫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본다면 누구든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일반적인 관습이나 관념을 따르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서 고착되어 온 '기준'이라는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소리를 낼 수 있는 그 고유의 음에 온전히 집중한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이 탱크처럼 살아 숨 쉰다. 가꿔지고 다듬어진 모습이 아닌 이 공간의 모습 그대로를 전해야 하는 공연에 이 둘은 제격인 셈이다.


6월 27일 T4에 첫 방문 한 이들은 꾸준히 이 곳을 방문하며 공간을 탐색한다. 공간의 구조를 익히고, 그 구조가 품을 수 있는 악기를 찾고, 그 악기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공간에서 연주해보면서 공연을 만든다. 짧지 않은 4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시각으로 T4를 바라본다. 결국은 음악을 만들어서 공연을 올려야 하기에 소리와 파동에 집중하지만 소리가 머무는 이 공간을 냉철하지만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봤을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공연에 다른 주인공이 있다. 씨실과 날실을 가지고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천을 짜는 '베짜기'이다. 점을 찍어내는 거문고와 선을 이어내는 피리와 생황, 면을 엮어내는 베틀. 3차원이라는 공간을 그들은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음과 음을 쌓고 그것을 베틀이 엮어서 공간을 만든다.' 그들이 의도한 바로 내가 잘 흡수될 수 있을까?


공연 현장 스케치

이날 연주됐던 음악들은 여태 두 명이 보여주었던 음악과는 다른 색을 들려준다. 그들 또한 '오롯이 문화 비축기지만의 T4만을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의 음악도 이 공간을 닮아있다. 총 3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공연은 1장-점 선 면 / 2장-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 3장-날실과 씨실 그리고 소리실로 구성되어있다. 1장의 시작과 함께 박우재, 박지하, 민향기(섬유예술가)는 3가지 색의 실을 공간 내 기둥에 연결한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공간에 조명이 들어오면서 기둥에 연결되어있는 실들이 그림자를 만드는데 그 순간 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악장이 넘어가고 또 그 공간에 다른 실들이 엮이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균열은 또 다른 균열을 만든다. 점과 선, 그리고 면과 시간까지 함께 한 공간은 3차원과 또 다른 4차원의 경험까지 제공한다.(영화에서만 4차원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 편협한 시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공간의 균열을 경험한다. 하지만 갈라진 그 틈 사이를 메우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들의 음악이다. 점으로 표현되던 음악은 선으로, 그리고 그 선을 베틀이 엮어나가면서 따뜻하게 공간을 품어나간다.


이 공연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관객의 소음이 걸러짐 없이 온전히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다. 때로는 투박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오는 소리는 공연장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소음이다. 이 공간은 소리를 전혀 흡수하지 못한다. 다만 그 소리를 반사하고 왜곡시킬 뿐이다. 그랬기에 그 소음은 청각을 더 날카롭게 자극한다.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가 아닌 거친 관객의 소음까지 함께한 음악은 결국 공연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그 공간에서 함께 음악을 만들었다. 프로그램 노트에서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천을 짜는 '베짜기'의 핵심은 씨실이 날실들의 사이를 무수히 가로지르는 반복행위보다
수많은 날실들의 나열과 그것들의 교차를 계산하고 설계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설계자의 생각에 따라 결과물은 다르게 나옵니다.
설계자는 당신입니다.

- 프로그램 노트 中



나의 설계는 이 공간에 내가 존재함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 공간에 함께 머물렀을 때, 악기를 통해 소리가 나오는 순간을 함께 했을 때 이 음악은 의미를 갖는다. 공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함께 머물 때 의미가 생기는 것, 그리고 머무는 순간을 함께 나눴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깨닫는다. 공간의 균열을 잘 메꾼 두 연주자의 소리가 오래 남는 밤이다. 아마 그들의 음악은 한 동안 그곳에 그렇게 머물렀을 것이다.


(왼) 박지하, (우) 박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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