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소중한 화원을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꽃으로 꾸미고 해충이 들어오지 못하게 약을 치고 화원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나비와 꿀벌만 들였다. 화원 안은 단조롭고 심심해서 밖으로 나가 더 신나고 재미있는 것들 찾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밖은 위험했고 나는 위험에 처하고 싶지도,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 낸 흠집 없는 인생이었다. 티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결점을 낼 만한 것들은 차단했다. 그만큼 완벽하게 보존해 온 인생이었단 말이다. 부질없구나. 나를 완벽한 화원 안에 가두고 싶었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호기심은 날 화원에서 끌어냈으며, 그렇게 안전한 곳과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걸어 나왔다. 완벽한 온도에서만 머물던 나는 밖의 무더위에 땀을 흘리고 매서운 바람에 흔들리며 세상이 주는 상처를 온전히 받아냈다. 호기심 그까짓 게 뭐라고 겁도 없이 나왔을까. 밖은 생각 이상으로 무섭고 험한 곳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내가 어디까지 나왔는지, 돌아가는 길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작은 화원에 갇혀 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지금 넓은 세상에 갇혀있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시 화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게 난 세상이 주는 상처를 온몸으로 받은 채 홀로 남겨졌다.
모든 것이 허상처럼 느껴진다. 나에겐 상흔이 남았는데 이것은 무엇의 흉터란 말인가. 당신에게 상처를 받은 것이 맞나? 아니. 이건 내가 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난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 그러니 이 상처는 타인이 냈다고 확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고장 난 남녀의 만남은 더 큰 장애를 가져온다. 그렇게 부식된 연애의 결말은 참혹하다. 그리고 지금 난 내가 내지도 않은 고장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남을 탓할 수도 나를 탓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게 자학이 아니고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난 밥도 먹지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기쁘지도 않고 심지어 슬프지도 않다. 이런 감정 없는 껍데기만 남은 고장 난 나는 너희가 만들 결과물이다. 자! 보아라. 어떤가? 조금이라도 기쁜 마음이 드는가? 정말 잔혹한 사람이라면 내가 우습겠지.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너희 둘 중에 누굴 원망해야 할까? 원인? 아니면 결과? 이 글을 읽으며 느꼈으면 좋겠다. 본인의 잔혹함을. 난 희롱당했으며 농락당했다. 자신도 같은 피해자라는 감정이 드는가? 아니. 그건 아니지.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고 지나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면 그건 내 선택과 나의 결정이었어야 했다. 나는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억울하고 속상하다.
난 지금 바닥이다. 흠집은 날 만큼 났고, 결점도 생길 만큼 생겼기에 난 이제 더 이상 안전한 화원 안에서만 머물던 순수한 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기억하는가? 당신 앞에서 실성하듯 웃던 나를. 나는 나를 가장 사랑했다.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고 정직함과 상냥함은 날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사랑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는 게 날 너무 비참하게 만든다. 고작, 고작 이거였나. 이런 사랑을 받고자 그렇게 노력한 것인가. 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진심의 대가는 너무 참담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고결함을 논하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람의 사랑은 그리 고결하지 않다던 목소리가. 그럼 난 여태 무엇을 붙잡고 있었던 거지? 내가 보던 그건 대체 뭐였단 말인가. 맞다. 이래서 허상인 것이다. 다 거짓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읽을 것이다. 당신이든 누구든 읽을 것이라 확신한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든다. 벌써 괜찮아졌나?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 절망과 괴로움 속에서 조금 더 몸부림치길 바란다. 어디서부터 진실이었고 어디까지 거짓이었을까. 당신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고 난 마지막 순간에도 거짓만을 말하던 당신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신이란 사람,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이렇게 망가졌니. 최소한 내가 아는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그 모습이 완전히 거짓말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당신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제부터 다시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행복해져라. 이건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위해 행복해져야 한다. 당신이 행복해져야만 내가 치유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그곳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아직 늦지 않았다. 고칠 수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다잡았으면 한다. 모두가. 모두가 다 그래야만 한다. 증오의 감정을 던졌지만 진정한 미움은 아니다. 알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못 된 다는 것을. 지금은 현실을 부정하고 가급적 마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조만간 마주 볼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럼 나도 천천히 치유되겠지. 참 후회가 길었다. 미련도 원망도 길었다. 이제 모두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우린 다 괜찮아질 것이다.
난 요즘 바람이 휩쓸고 간 화원을 청소하는데 여념이 없다. 매일 쓸고 닦고 가꾸는데도 예전과 같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이전의 완벽했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청소 중이다. 앞으로 나비와 꿀벌을 늘리고 예쁜 씨앗들을 더 심으면 예전과는 다르지만 또 다른 완벽한 화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화원 안에서만 머물 때 상상했던 바깥은 무섭지만 그 안에 막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따뜻한 곳에 머물며 바라본 세상은 그러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만큼 눈부신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그 세상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사람 너무 믿는 거 아니야."와 같은 조언을 많이 한다. 그 조언을 듣지 않았던 결말이 심히 아파 속상하지만, 난 앞으로도 예전처럼 보이는 걸 믿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무서운 세상에서 뒹굴다 돌아와도 난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당분간은 화원 안에서 좋은 그림을 보고, 위로의 책을 읽고,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이 안온함을 즐겨야겠다. 그렇게 치유된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