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인물론 : 이재하

01. 인간 : 이재하의 냉소적 실존

by aboutjina

냉소주의는 더 이상 서방 세계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때 동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이 태도는 이제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시대적 징후로 자리 잡았다. 세계를 낙관하지 않으려는 의지, 어떤 약속에도 쉽게 기대를 걸지 않는 습관, 의미를 발견하기에 앞서 의심부터 던지는 시선은 이제 청년들의 보편적인 감각이 되었다. 이는 세계로부터 반복적으로 실망해온 세대가 선택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냉소를 단순한 염세나 감정적인 반항으로 치부하는 것은 본질을 비껴가는 일이다. 냉소는 실패한 이상을 비웃는 조롱이라기보다, 더 이상 실현되지 않을 약속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확보한 거리의 형식에 가깝다.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원천 봉쇄하고, 믿음을 유보함으로써 세계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조절하는 기술. 이처럼 냉소주의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실존적 방식으로 뿌리내리며, 자연스럽게 생존 전략이 된다.

이러한 정서는 전통예술이라는 특수한 장(場)에서 더욱 선명하게 감지된다. 전통예술계에서 발견되는 냉소주의적 미학은 화려한 파격이나 파괴적인 저항의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 보수성과 폐쇄성, 반복되는 구조적 좌절이 장기간 축적된 환경 속에서 형성된 하나의 태도다.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난 시도는 쉽게 의심의 대상이 되고, 성실한 노력은 결과에 닿기도 전에 무력화되며, 개인의 성취는 좀처럼 공적으로 승인되지 않는다. 변화가 환영받지 못하고 긍정이 늘 뒤로 밀려나는 공간에서 개인은 점차 기대를 철회하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전통예술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응축된 사회와 같다. 불안정한 제도와 모호한 평가 기준 속에서 구성원들은 세계에 대한 신뢰를 무작정 지키기보다 스스로 조정하는 쪽을 택한다. 이는 정면으로 부딪히는 투쟁 대신, 외부에서 가해지는 타격을 흘려보내기 위해 스스로의 각도를 비트는 생존 방식이 된다. 이때의 냉소는 체념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고유성을 보존하기 위한 실존적 방어선으로 부상한다. 소리 높여 저항하는 대신 확신을 늦추고, 직접 부딪히는 대신 기대를 거둠으로써 제도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방식. 겉으로는 고요해 보일지라도, 그 침묵과 유보의 태도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쌓여 있다.


내가 이재하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이미 연주력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고, ‘잘 나간다’는 표현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예술가였다. 외형적으로 그는 유쾌했으며, 관계에서도 밝은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활달한 표면 아래로 어떤 종류의 냉소가 감지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냉소는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부정이라기보다, 세계를 너무 빠르게 긍정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에 가까웠다. 그는 쉽게 확신하지 않았고, 주류의 흐름에 성급히 동조하지도 않았다. 선언보다 여백을 남기고, 말하기에 앞서 침묵의 무게를 먼저 가늠하는 태도. 그의 냉소는 그런 조용한 방식으로, 그러나 아주 단단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대개 냉소주의는 지적 회의보다 사회적 조건 속에서 피어난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사상을 즉각 집행할 수 있기에 냉소할 이유가 없고, 압제의 희생자들은 증오라는 더 뜨겁고 직접적인 믿음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재하가 이 두 세계의 속성을 동시에 체감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주도적으로 일구어가는 성취자인 동시에, 견고한 제도라는 압력 아래 놓인 개인이기도 하다. 권력의 오만함과 희생자의 분노를 모두 목격할 수 있는 그 특권적인 위치는, 역설적으로 그를 어느 쪽의 확신에도 가담할 수 없게 만든다. 그가 판의 중심에서 냉소를 견지하는 이유는 힘의 부재 탓이기에 앞서, 양극단의 진실을 동시에 목격하는 자가 겪는 필연적인 고립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예민한 감각과 깊이 맞닿아 있다. 이재하는 말이 나오기 전의 망설임이나 말이 끝난 뒤의 공백을 함께 읽어내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내용보다 그 사이를 흐르던 공기의 질감으로 기억되곤 한다. 그는 감정에 둔감한 탓에 냉소적인 쪽을 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감정과 주변의 기류를 과도하게 감지하기에, 자신을 보호하려 스스로를 조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유쾌하게 관계를 맺는 사교적인 자아와, 그 모든 감각을 홀로 견뎌내는 내밀한 자아. 인간 이재하의 내면은 이 지점에서 정교하게 분리된다.


그의 관찰은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다. 누군가 소유하는 물건의 변화, 옷차림의 작은 어긋남, 원고 속의 사소한 오탈자까지. 그는 타인의 일상을 배경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그 모든 차이를 감각의 표면에 남겨둔다. 이러한 민감함은 곁에 있는 이들마저 긴장하게 만든다. 그 앞에서는 몸짓과 언어가 스스로 검열되고, 사소한 태도조차 무심히 넘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감지가 곧바로 단정적인 해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알아차리되, 그것을 섣불리 믿음이나 확신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나는 종종 그의 ‘기억력’에 대해 생각한다. 예민함에 기억력이 더해진 상태는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형벌일까. 휘발되지 않는 기억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내면에 쌓이고, 과거의 상처와 감정의 결들은 현재의 자아를 끊임없이 침범한다. 니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과거를 지워내는 '능동적 망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이재하의 내면에는 그러한 망각의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찰나의 감정과 어긋난 기억들이 휘발되지 않고 층층이 쌓일 때,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은 그 기억들에 동요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차갑게 식히는 일이다. 그에게 냉소는 망각할 수 없는 자가 통증을 견디기 위해 선택한 고통의 중화제인 셈이다. 민감함과 기억력이 만들어낸 자기파괴의 틈새에서, 그의 냉소는 여전히 그의 행동과 사유를 지탱하는 가장 은밀하고도 강력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이렇듯 안으로 침잠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기 쉬운 기질임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상은 흐트러짐 없는 규칙 아래 놓여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간 약속에 대한 지독할 만큼의 철저함이다. 단순히 세상이 싫어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책임한 냉소와 달리, 그의 태도는 타인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엄격한 자기 규율에 뿌리를 둔다. 그는 어떤 약속이든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 남짓 먼저 도착해 자리를 지키며, 결코 늦는 법이 없다. 이러한 결벽에 가까운 성실함은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그가 어린 시절부터 구축해온 자기 통제의 성벽과도 같다.


이러한 완벽한 규율의 이행은 그를 보수적인 집단 깊숙이 위치시키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제도에 함몰되지 않는 독립성을 부여한다. 그는 집단이 요구하는 질서를 내면화하되 그것을 자신의 전부로 동일시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엄격한 선을 그음으로써 타인의 간섭을 차단하고 그 대가로 내면의 자유분방함을 확보한다. 제도 안에 머물되 그 세계가 자신을 잠식하는 것을 유예하는 상태. 이 경계 위의 태도는 그가 냉소를 통해 실현하는 또 다른 형식의 자유다.


내가 그를 처음 본 서른에서 어느덧 10년이 흘러, 올해 그는 마흔이 되었다. 그사이 그의 냉소는 완화되기보다 오히려 더 견고한 체계를 갖춘 듯 보인다. 10년 전의 냉소가 외부 세계와의 낯선 접촉에서 비롯된 즉각적인 방어 기제였다면, 현재의 냉소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정립해온 일종의 생활 양식에 가깝다. 세월이 흐르면 대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둥글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는 오히려 더 예리하게 날을 세우며 자신만의 고립을 심화시키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지독한 일관성은, 결국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지점이 여전히 저 멀리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 최승자는 진정으로 훌륭한 예술이란 어쩌면 어떤 배고픔, 혹은 그것의 다른 얼굴인 꿈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해내는 일이라 적은 바 있다. 나는 인간 이재하에게서 바로 그 지독한 배고픔을 읽는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결핍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마모시키며 도달하고자 하는 내면의 허기에 가깝다.


어쩌면 그의 냉소는 이 근원적인 배고픔을 들키지 않으려 두른 가장 단단한 갑옷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향한 기대를 접어버린 자리에 자신을 향한 서슬 퍼런 요구를 채워 넣는 태도. 이재하를 짓누르는 고뇌와 팽팽한 긴장이야말로 그를 냉소주의자로 만드는 가장 깊은 뿌리이자, 동시에 그를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냉소라는 방패를 앞세운 채, 그가 그토록 절실하게 가고자 하는 궁극성(窮極性)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허기진 꿈이 닿으려는 마지막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이제 나는 그가 남긴 생의 궤적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그가 숨겨둔 궁극의 대답을 찾아 나서려 한다.




* 전통예술 인물 집중 비평 프로젝트 [월간 인물론]

한 명의 인물을 선정하여 일 년 동안 깊이 있게 기록하고 분석하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열두 달에 걸쳐 매달 다른 주제로 대상을 들여다보며, 한 존재를 구성하는 다각도의 궤적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