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작업실 : 무질서의 숲에 세운 사유의 요새
2022년 6월, 이재하의 삶에 불시의 시련이 들이닥쳤다. 스무 살 무렵부터 제 손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쪼개어, 장비 하나 가구 하나를 공들여 채워 나갔던 작업실이 침수된 것이다. 이웃집의 무리한 공사와 기록적인 폭우가 맞물린 총체적 난국이었다. 처음엔 그저 취미 삼아 하나둘 사 모으던 장비들이 어느덧 작업의 중심이 되었고,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터전으로 자리 잡아가던 참이었다. 진흙탕이 된 그곳에서 물을 퍼내며 망연자실해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물을 잔뜩 머금은 악기들을 보며,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아이들”이라 말하며 낮게 실소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그의 연습실은 다시 예전의 그 정갈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치열하게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다.
재건된 그의 작업실은 언뜻 장비와 전선이 뒤엉킨 혼돈의 숲처럼 보인다. 사방에 널려있는 케이블과 벽면을 가득 채운 포스터들, 책장에 펼쳐진 각종 팜플렛과 음반들은 타인의 눈에 그저 ‘무질서’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은 결벽에 가까운 섬세함을 지닌 이재하가 자신의 뇌 구조를 시각화하여 옮겨놓은, 일종의 ‘사유의 방’이다. 이곳에서 무질서는 방치되지 않는다. 케이블 하나, 기기 하나가 놓인 자리에는 모두 치밀한 이유가 있다. 벽에 걸린 전선들은 날것의 소리를 정교한 음원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며, 책장 위 기록들은 그가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증명한다. 타인에게 소음처럼 보일 이 복잡함은, 그에게 가장 정확하게 작동하는 ‘최적의 상태’에 가깝다. 이 공간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향해 수렴한다. 흩어지는 소리를 붙잡아, 다시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남기는 일이다.
이 정교한 구조 속에서 그가 가장 오래 반복해온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소리를 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는 이 방 안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옛 명인들의 음원을 반복해 통과시킨다. 이 과정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의 소리가 어떻게 남겨지는지,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끝내 살아남는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완벽하게 정제된 결과를 향하기보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남겨질 수 있는 상태를 선택하는 태도. 그는 그 선택이야말로 소리를 다음 시간으로 건네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감각은, 이 방 안에서 그가 오래도록 귀 기울여온 옛 소리들로부터 비롯되었다.
1. 박대성의 아쟁 다스름 ‘세월’
이재하에게 이 음원은 해방의 열쇠였다. 윤윤석, 김일구, 박종선이라는 거대한 세 산맥에 갇혀 있던 그에게 박대성의 ‘세월’은 아쟁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명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비곡(悲曲)이었다. 1960년대 말 동래에 정착해 예인들과 교류하며 소리를 벼렸으나, 국악이 설 자리를 잃어가던 시대의 흐름 앞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식당을 운영하며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 단절의 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리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짙은 고독과 깊은 계면의 농도로 스며들었다. 2003년 귀국 이후 세상에 나온 ‘세월’은 그가 긴 침묵을 견디며 남긴 하나의 고요한 응답이었다.
이재하가 이 곡에서 집요하게 파고든 것은 장단이라는 외적 형식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선율의 힘만으로 서사를 엮어내는 법이었다. 특히 곡의 초입, 장단이 배제된 채 홀로 읊조리듯 시작되는 아쟁의 첫 음이 만들어내는 공기감에 그는 압도되었다. 거칠게 몰아치거나 폭발하는 대신, 명주실의 떨림을 극도로 섬세하게 제어하며 내뱉는 그 절제된 소리는 공기의 온도를 단숨에 바꾸어 놓는다. 수많은 아쟁 연주자들이 화려한 기량으로 공간을 채울 때, 박대성은 오히려 그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소리로 청자의 신경을 오직 선율 하나에만 집중시킨다.
수많은 음향 장비가 소리를 기록할 때, 이재하는 그 기계적인 차가움 너머에서 명인이 활대로 그어 내린 ‘세월’의 질감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존재가 남긴 고독한 흔적을 자신의 음악적 지도로 옮겨 그리는 작업이었다. 비로소 이재하는 이 곡을 통해 형식이 아닌 흐름으로, 완성이 아닌 과정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체득한다.
2. 안향련의 ‘울지마라 가야금아’
박대성의 선율에서 고독의 원형을 발견했다면, 그다음 이재하의 귀가 머문 곳은 1970년대 방송가를 풍미했던 안향련의 목소리다. 37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안향련은 해방 이후 전통의 경계를 넘어 대중과 뜨겁게 호흡했던 판소리 명창이다. 그녀는 서슬 퍼런 성음으로 상하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창극과 민요, 그리고 당대의 가요마저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다.
이재하가 이 곡을 반복해서 듣는 이유는 단순히 안향련의 천부적인 기량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음악 속에 스며든 그녀의 소리는 오늘날 국악적 기교를 빌려 대중가요의 문법에 맞추는 식의 협업과는 결이 다르다. 반주와 곡의 구조는 전형적인 가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위를 유영하는 안향련의 목소리는 판소리의 단단한 성음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판소리 특유의 깊은 농음과 정교한 기교를 굽이굽이 유지하며, 가요라는 낯선 지형 위에서도 기어이 자신의 소리 세계를 관철한다. 장르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는 식이다.
이재하는 이 상반된 두 세계가 아무런 이물감 없이 하나의 공기로 존재했던 1970년대의 풍경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전통이라는 본질을 굳건히 쥐고서도 시대의 대중적 감각과 유연하게 맞닿았던 그 시절의 공존. 이재하에게 안향련의 노래는 단순한 가요가 아니라, 장르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유영했던 옛 예인들의 드넓은 스펙트럼에 대한 동경이자, 자신이 나아가야 할 현대적 전통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다. 그것은 어떤 장르와 만나도 끝내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강인한 '예술적 존재감'을 직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3. 김수악의 ‘기방살풀이 구음’
박대성의 선율에서 고독을, 안향련의 목소리에서 공존을 읽어낸 이재하가 마지막으로 가닿은 곳은 진주의 명인 김수악의 ‘기방살풀이 구음’이다. 김수악은 고금의 국악사를 통틀어 가(歌)·무(舞)·악(樂)에 모두 능통했던 드문 예인이다. 열 살에 권번에 들어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 판소리와 기악, 무용을 모두 섭렵한 그녀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전통 예술의 결정체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녀의 춤들도 귀하지만, 이재하가 자신의 방에서 반복적으로 되감아 듣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구음’이다. 김수악의 소리는 단지 악기 소리를 입으로 모사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성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음악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경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소리꾼의 목이 아닌, 몸으로 리듬을 타는 무용수의 호흡에서 그 소리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음을 찾아가는 선율의 구성은 기존 소리꾼들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무용수이기에 가능한 유연한 흐름 속에서, 목을 사용해 가늘고 날카롭게 뽑아 올리는 ‘시성(細聲)’으로 내뱉는 구음은 악기조차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다른 선율 악기 없이 자신의 장구 장단에 맞추어 이 서늘한 곡조를 얹기 시작하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을 추게 한다."던 그 소리는, 춤꾼을 무대로 불러내는 가장 강력한 마력이 된다.
이재하는 이 구음 속에서 인위적인 가공이 없는 ‘자유로움’,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서늘한 ‘품격’을 발견한다. “억지가 없이 그것이 제일이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멋”이라는 그의 말처럼, 김수악의 소리는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기품의 원형이다. 수많은 이펙터와 정교한 편집 장비들이 소리를 매만지는 이재하의 작업실에서, 김수악의 구음은 가장 강력한 경종이다. 기계가 만들어낼 수 없는 찰나의 즉흥성과, 수십 년의 수련이 응축되어 터져 나오는 자연스러운 멋. 이재하는 그 자유로운 구음의 파동을 들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현대적 공정이 결국 도달해야 할 종착지가 ‘억지 없는 아름다움’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는 박대성, 안향련, 그리고 김수악이라는 세 줄기 거대한 강물이 자신의 작업실로 흘러드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다. 이 옛 소리들은 이재하라는 필터를 거쳐, 이제껏 우리가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시대의 음향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친 셈이다. 이 재건된 기지에서 그가 음원을 빚어낼 때 가장 엄격하게 세우는 기준은 단연 ‘연주’ 그 자체다.
“첫째도 둘째도 연주다.” 그는 연주가 좋다면 녹음 상태나 환경의 한계는 충분히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마이크를 세우고, 가공하고, 텍스트와 커버 디자인까지 도맡으며 발매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주자라는 고립된 역할을 넘어 프로덕션의 전 단계를 매만지는 경험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얽힌 여러 파트의 중요성을 뼈아프게 깨닫게 한다. 이러한 공정은 결국 더 나은 완성을 위해 타인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그 소통의 방법론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 지난한 공력이 그에게는 예술 활동의 본질적인 일부분이며, 이 고집스러운 노동이 인간 이재하와 그의 음악을 동시에 단련하는 길이다.
본래 이 시스템을 갖춘 것은 음원 발매보다 순수한 음악 창작 작업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첫 앨범을 외부 스튜디오에서 발매한 후, 그는 긴 음악 인생을 멀리 내다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해보는 경험이 훗날 자신의 음악 세계에 가장 큰 의미가 되리라는 직관적인 판단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장비를 구비하고 소리의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리의 기지가 결코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재하는 자신의 천성 안에 내재한 인정욕,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를 위안해야만 하는 내면의 결핍을 숨기지 않는다. 그 마음의 파동은 작업실의 풍경을 수시로 뒤바꾼다. 그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작업실의 모든 구성을 완전히 갈아엎곤 한다. 어느 시기의 작업실은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미니멀한 상태를 유지하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당장 쓰지도 않을 장비와 전선들을 사방에 늘어놓은 채 복잡한 혼돈을 즐기기도 한다. 이 잦은 변동은 단순히 가구를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 상태를 공간에 투영하여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채찍질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이 반복적인 행동은, 사실 음악을 대하는 그의 머릿속이 얼마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그는 이 소란스러운 정리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의 고민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다음 작업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낸다.
이재하가 이토록 치밀하고도 소란스럽게 소리의 성(城)을 쌓아 올릴 때, 문득 나는 내가 아끼는 또 다른 소리를 떠올린다. 거문고 음원에 있어서만큼은 각별히 사랑받는 신쾌동 명인의 기록들이다. 그가 남긴 <산조>, <농부가>, <새타령>과 같은 연주곡은 지금 시대가 추구하는 매끄러운 감성과는 사뭇 다른 시공간을 품고 있다. 20세기 중반, 녹음 기술이 지금처럼 정교하지 않았던 시절에 남겨진 그 음원들에는 시대가 고스란히 박제한 날것의 생동감이 숨 쉬고 있다. 특히 줄이 괘 위를 서걱서걱 밀고 지나가는 적나라한 마찰음은 물론, 술대가 대모를 스치며 내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까지 여과 없이 담긴다. 듣는 이는 그 소리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기보다, 연주가 발생하던 공간에 ‘가까워진다’는 감각을 얻게 된다. 귀를 기울이다 보면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흔들리며 내는 공기의 파동까지 전해져, 청각을 넘어 시각과 촉각이 교차하는 묘한 공감각적 희열마저 느껴진다.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거문고 음원만이 가질 수 있는 투박하지만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질감이다.
반면, 이재하가 자신의 기지에서 빚어내는 음원들은 그보다 훨씬 매끄럽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가가 소리를 대하는 태도와 취향의 차이다. 누군가는 과정의 소란함과 근접한 질감을 사랑하고, 누군가는 정제된 결과와 완벽한 균형의 미학을 추구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가 남기는 음색의 결 또한 자연스레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고 남기를 바라는 핵심이 있다. 바로 그가 김수악 명인의 소리에서 발견했던 ‘억지 없이 그것이 제일이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멋’이다. 기교를 더하고 깎아내는 정교한 공정 끝에, 결국에는 아무런 억지가 묻어나지 않는 그 순수한 경지가 그의 음악에도 깊게 배어들기를 바란다. 치열하게 질서를 찾아가는 이재하의 여정이 결국 도달하게 될 종착지는, 바로 그 ‘자유로운 기품’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전통예술 인물 집중 비평 프로젝트 [월간 인물론]
한 명의 인물을 선정하여 일 년 동안 깊이 있게 기록하고 분석하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열두 달에 걸쳐 매달 다른 주제로 대상을 들여다보며, 한 존재를 구성하는 다각도의 궤적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