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충동적이다. 심지어 새벽 두 시에 브런치에 가입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마저 책을 읽다가 쏟아진 충동이었다. 정신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은 지 5년이 넘어서, 심리 상담을 받은 지 1년이 다 되어서, 새로 옮긴 정신과에서 서류 뭉치를 받았다. 억제지속주의력과 간섭선택주의력에서 정상 이하를 그리는 종합주의력검사(CAT) 결과지는 수년 간 몇 번이나 스치고 사라지던 단어로 정리되었다. "성인 ADHD라고 들어보셨어요?" 와, 난 공인받은 환자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꺼지는 충격 같은 것은 없었다. 억울하긴 했다. 진작 좀 말해주지.
나는 크게 지적받지 않을 만큼만 꼼지락댔다. 가끔씩 생각했다. 나는 왜 자꾸 움직이지? 자습 시간에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만지고 피부의 요철을 뜯고 손톱 밑을 파고 다리를 긁고 괜히 더 흥미로워 보이는 문학 지문을 읽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문제가 되는 학생은 없었기에 잠깐의 의문만 반짝였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우등생이었다. 우울증에 학업 부담에 일정 관리를 극도로 어려워했지만어쨌든 성적은 괜찮았다.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학교에서 제법 입시에 기대를 거는 학생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만 그랬는가 하면 나는 머리가 채 다 커지기 전부터 이미 어른스러운 아이, 똑똑한 아이였다. 누가 이런 학생에게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연상되는ADHD를 읽어냈겠는가? 그래도 진작 좀 말해주지.
대학교 새내기가 됨과 동시에 정신과 약을 달고 살았지만 우울증과 불안장애, 불면증에 관한 약만을 받았다. 좋은 선생님들이었지만 급변한 환경과 갖은 해묵은 것들이 뒤섞인 우울에서 다른 무언가를 읽어내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학교의 관계와 일과 공부들은 이전보다도 더 능동적이고 체계적인 처리를 요구했고 나는 그저 중간이라도 가길 간절히 바라는 학생이 되었다. 한 가지 공부에 집중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교수님은 ADHD에 대해 설명할 때 이런 말을 빼놓지 않았다. 'ADHD 아동에겐 수영을 시켜라.' 산만하고 제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아동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력 훈련이 아니라 에너지를 소모할 격한 운동이라는 말이었다. 시끄러운 남자아이들이 끝없이 뛰어다니는 바둑 학원이나 서예 학원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위안 삼았었다. 적어도 난 어릴 때 산만하다고 지적받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나는 매우 얌전한 학생이었으니까. ADHD는 그대로 성장했을 경우 품행장애, 반사회성 인격장애, 각종 중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설명으로 이상, 범죄 심리에서도 등장했다. 휴,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구나. 그러나 우울증과 ADHD에 대하여, ADHD로 인한 부정적 경험에서 비롯된 우울감인지 우울증으로 인해 생기는 주의력 저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누가 진작 좀 말해주지!
나의 주의력에 대한 의문은 언제나 머릿속 한편에 존재했지만 나는 곧 눈을 돌렸다. 어쩌면 이마저 끝없이 의식의 흐름에 휩쓸리는 내 병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원 진학은 인지신경과학 연구실을 준비하면서도 늘 시선을 끌었던 주제가 '주의력'이었다. 일단 주의력은 뇌과학에서도 다루는 주제 아닌가? 교수님은 여러 번 내가 관심을 둔 주의력 문제는 임상심리학에 가깝다고 말씀하셨다. 심리학과 대학원 지원생의 대다수가 임상심리 지망인 학교였다. 그들의 화려한 스펙과 연구 계획서들. 나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지. 물론 다른 연구실이 만만하지는 않았지만 최고 경쟁률만은 피하고 싶었다. 전공을 재고하기보다는 주제를 바꾸는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ADHD와 우울증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싸움을 머리에 이고서 경쟁률이 높은 임상심리 연구실에 지원하지 않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들을 적고 있었던 셈이다.
참 억울했다. 그러나 무엇을 억울해해야 할지마저 알 수 없었다.
평범함이라는 단어에 많은 노력을 태우면서 지겹게 참아왔던 나날들 숨 막히게 달려왔는데도 아직도 나아가지 못하고 혼자서 뒤엉켜 있어 ... 이미 늦어버린 것 같지만 난 그저 내 갈 길의 나를 좀 더 믿어보고 싶어 <이미 늦어버린 것 같지만(극동아시아타이거즈, 2020)>
대학교의 마지막 학기 무렵에 홍대로 인디 밴드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노래가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꽉 차서도 꾸역꾸역 대학원 원서를 작성하고 있는 나를 쿡쿡 찌르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마침내 ADHD를 진단받은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듯 당연한 길로 여겼던 대학원 진학에 실패한 상태였다. 전공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석사 이상의 학위가 필요하다고 모두가 말했으니까. 늘 그렇듯 장기적인 계획 따위 세우지 않은 채, 적당히 눈앞의 일을 해치우며 살다가 입시를 맞이한 나는 준비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대학원생도 직장인도 아닌 ADHD 환자가 된 나는 '평범함이라는 단어에 많은 노력을 태우'는게 무슨 뜻인지 치미는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깨달았다. 그건 내 삶이었구나. 나는 눈앞에 있는 것 하나를 겨우 해결하면서 학생 노릇을, 심지어는 우등생 노릇을 해왔구나. 급조한 껍데기를 하나씩 내밀면서 텅 빈 속을 들킬까 불안해했던 시간들이 드디어 정산을 치르는 듯했다. 나는 정말 '혼자서 뒤엉켜 있'었다.
진단 이후 성인 ADHD를 가진 이들의 책을 몇 권 읽어 보았다. 음, 이 분들은 참 극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셨군. 나와 유사한 증상을 서술한 문장에서 만나는 반가움 한 구석에 약간의 이질감이 들었다. 난 정말로 '얌전하고 똑똑한 학생' 취급을 받았고 그에 대한 부담은 느꼈을지언정 품행이나 학업 집중력 같은 문제로 지적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내가 '모범생'이었던 기억으로 박혀있는 고정관념일까? 아니면 책들 속 내용과는 다른 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례로 다가갈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의 나를 이루는 모습들을 그간 애써 무시해왔던 시각으로 돌이켜보고자 한다.아직도 나는 대학원생도 직장인도 아닌 ADHD 환자이지만 이제야 실마리 비슷한 것을 하나 잡은 상태이다.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지 그마저도 질려 관둬버릴지 알 수 없지만 써 보기로 한다. 하다 하다 안 되면 ADHD 환자로서 가장 자신 있는 '의식의 흐름' 쏟아내기라도 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