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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항살이 Sep 02. 2022

크게 라디오를 켜지 마

스피커가 아닌 내 마이크의 볼륨을 낮추고

  똑딱똑딱, 달달달달, 툭, 쩝쩝, 쾅.


  자잘한 생활 소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공기가 있고 귀가 있는 한 모든 것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정말, 정말, 정말 못 견뎌서 귀를 막기를 택한 사람이었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어폰과 음악은 대체로 혼잡한 소리를 내는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보호막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살 수는 없다. 결국 나는 자주 세상의 소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시계 초침 소리가 거슬려 잠에 못 든 적도 여러 번인 데다, 작든 크든 가전제품의 소음이 귀에 들어오면 듣기 싫어도 내 온 청각신경은 그쪽으로 향해 돌아오지 않았다. 


  뻔하게도 소음에 예민한 것 역시 ADHD의 증상 중 일부였다. 말귀는 잘 못 알아듣는데 소음에는 예민하다니, 억울하기도 하지. 일단 신경 거슬리는 소리가 나면 하던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청각은 점점 더 소음에 파고들어 누군가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하다 이 문제 때문에 곧잘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저 나의 짜증 많고 예민한 성정 탓이려니 해왔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집중력이 약한 '내' 탓이었다. 학생인 나에게 집중력이 약하다는 것은 ADHD 같은 질병을 의심할 징후보다는 학생으로서의 덕목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ADHD 뒤에 꼭 붙어 다니는 나의 친구, '자책'이 찾아왔다.

  

  자책이 ADHD와 꼭 붙어 다니는 친구인 이유는 정말 여러 방면에서 사람을 괴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음에 예민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도 해당된다. 누구나 자신이 아는 단어가 들리면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지만 나는 한 번 주의력이 흩어지면 무슨 내용이든지 온 신경을 다해 옆사람의 대화를 듣는다. 남의 사정을 엿듣는 것 같아 부끄럽거나 영 거북한 이야기를 꺼내 무시하고 싶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라면 일반적인 기준에도 못 미치는 외향성을 가진 내가 끼어들 일은 없다. 문제는 아는 사람들일 때이다. 대화를 하다가 불쑥 다른 주제를 꺼냈던 것처럼 대화 속에 들어있는 단어 하나를 잡고 난입을 한다. 희한하게도 이럴 때에는 내향적인 내 성격이 발목을 잡아주지 않는다. 말을 얹고 싶은 충동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끼어들었을 때 누군가는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나의 말을 받아준다. 이러나저러나 뒤돌아 서고 나면 '내가 왜 끼어들어 친한 척을 했지' 하며 민망함과 후회에 몸 서림을 친다. 이런 형태의 자책감은 나의 인간관계를 상당히 위축시킨다.


  자책감은 나를 작게 만든다. 



  누구나 움직이면서 소리를 낸다. 크든 작든 발소리가 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나고 음식을 씹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럴 때 정말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다른 사람들을 시끄럽게 하지 않기 위함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듣는 만큼 남들이 내가 내는 소음을 듣고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라는 전제가 담겨있다. 소리를 잘 못 듣는 사람이 크게 말하는 것의 반대로 나는 작게 말하고 작게 움직였다. 나쁘게 말하자면 소심해졌다. 누군가가 불필요하게 큰 소음을 발생시키며 행동할 때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나 시끄러운 것은 싫어하지만 나는 문자 그대로 치를 떨며 강하게 분노했다. 그러나 내 탓, 자책에 너무 익숙해진 소심한 생각 구조상 분노는 표출은커녕 자기 파괴적인 사고로 이어진다(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가장 예민했던 시기의 내가 소음 때문에 나는 화를 그대로 표출했다면 아무 데나 싸움을 걸고 다녔을 것이다). 점점 더 불편한 것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고 눈치 보며 표현도 못 하는 나에게 실망했다.


  자책감에서 한 발자국을 옮기면 자기 파괴가 있다. 너무나 시끄러운 세상에서 나는 스피커가 아닌 내 마이크의 볼륨을 낮추고, 낮추고, 또 낮췄고 동시에 세상을 차지하는 내 존재의 볼륨도 작아졌다. 



  그런데 예민한 청각은 ADHD의 한 증상이기도 하지만 가지고 있는 불안함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귀에 들어오는 모든 대화가 나를 흉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 즈음이 가장 소리에 예민한 시기였는데,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의 발 소리나 책 넘기는 소리는 물론 입 속 혀가 움직이는 소리까지 견딜 수 없는 정도였다. MMPI 검사 결과의 2번, 7번 척도(우울증, 강박증)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의사 선생님은 불안장애와 관련된 약을 처방했다. 뱃속에서 녹아내리는 알약과 함께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예민함은 사라졌고, 불안장애 약과 ADHD 약을 같이 먹는 지금은 어느 정도의 소음은 무시하고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질환은 하나만 온다는 법이 없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초조한 증상 등이 있다면 불안함과 연결하여 치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문가가 아님에도 감히 말해보자면, ADHD보다는 불안장애로 진단받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불안이든 ADHD든 치료를 통해 외부의 소리에 덜 신경 쓰게 되면 훨씬 덜 예민해진 나를 발견한다.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들려도 내가 하던 일과 생각에 머무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소리는 기억에서 잊힌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을 불편해하고 발소리나 문 닫는 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로 인해 참을 수 없는 불편함과 분노를 느끼지는 않는다(남의 대화에 끼어드는 일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다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무던해지면 나에게도 무던해지고, 그래서 자책도 덜하다.



  소리에 예민한 증상을 이야기하다가 ADHD 환자가 느끼는 자책감에 대해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자책은 비단 이런 문제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민한 청각을 어떻게든 해결해도 스스로에게 화살표가 향하도록 굳어진 생각은 잘 바뀌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자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해 두는 것이 좋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강박은 갖지 않고 그저 그런 자신을 지켜보기. 이것이 내가 배운 방법이다. 내가 얼마나 자주, 작은 이유로 자책을 하고 있는지 깨닫다 보면 조금씩 그 마음의 구조를 바꿔나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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