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진행 중이다
*랑세 - 중독(2021) 가사 인용
앞선 글은 어떤 대상이나 행위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좋아하는 것은 적당히 하면 된다. 인생에서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줄이면 줄일수록 좋다. 또는 적당선을 유지하지 않으면 완전히 금지하는 것보다 못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그 사실을 알지만 조금도 절제하지 못한 채 빠져들어 버리는 나는 중독에 아주 취약한 사람이다.
'덕질'을 시작하면, 무언가에 한 번 빠져들면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소비'였다. 충동은 의식하기도 전에 먼저 나의 생각 구조를 바꿔놓고 이 돈을 빨리 써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결제 버튼을 누르도록 만든다. ADHD 치료를 받으면서도 가장 고쳐지지 않는 데다 본격적인 화두에 놓고 상담 치료라도 받으려 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감이 고개를 들어 상담을 진행하기 어렵게까지 만드니, 현재까지 나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히는 증상이다.
빠져든 대상은 여러 가지였지만 한 번도 수집이 취미였던 적은 없었다. 그때그때의 나는 분명히 필요성을 느끼고 나름의 사용처를 고려하며 구매를 결정했다. 그러나 두근거리며 택배를 받고 포장을 풀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처음 생각해 두었던 쓰임은 현실성 없는 계획일 뿐이었고, 진짜 목적은 그저 그 물건을 사는 일 자체였다. 나는 끊임없이 새롭고 질 좋고 예쁜 것을 찾아다녔다. 펼쳐본 적도 없는 책, 한 개 가격이 한 달 생활비에 육박하는 장비, 한 번 돌려보고 집어넣은 음반, 각종 한정판 상품, 좋아하는 작품이나 밴드의 로고가 그려진 스티커, 배지, 엽서, 돌아보면 아무런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집 한구석에 쌓여만 갔다.
이 습관은 수중에 돈이라는 것이 생긴 후부터 발생했었다. 지금도 빈약한 경제력이 중, 고등학생 때 어떻게 있었겠는가? 그러나 의외로 나는 그때 돈이 많았다. 학교에서 적당히 행실 바른 학생의 이미지를 쌓으며 적당한 성적을 유지하고 선생님들의 신임을 얻다 보면 각종 재단의 장학금 기회가 나에게 돌아왔다. 경제관념 없는 청소년에게 약간의 조건만을 두고 주어진 돈은 교재비며 학원비 같은 '학업과 진로에 도움 되는' 곳에 쓰이지 않았다. 물론 구매한 책을 읽기도 하고 공부를 위한 교재를 사는 데에도 조금은 쓰였지만 그마저도 자연스럽게 물건을 집어 들고 결제하는 습관에 일조한 것처럼 보인다.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돈은 교재나 학용품 약간을 사는 것 이상으로 당장의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되었고, 등록금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 용도로 내 손에 직접 주어지는 장학금은 더욱 귀해졌다. 그리고 소비 습관은 물건을 사 모으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혼자 배달 음식을 시켜먹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고, 혼자 술을 마시는 빈도도 증가했다.
전화 통화라는 부담스러운 절차도 없이 버튼을 몇 번 누르면 음식이 온다. 배달원만 잠깐 마주치거나 아예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자리에 놓인 음식만 가져가면 된다. 배달 음식은 짧은 시간 내에 소비의 짜릿함을 맛보게 해주는 가장 쉬운 창구였다. 게다가 구경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맛있는 음식으로 배도 채울 수 있다니! 보상 회로를 자극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을 얻는 합법적인 방법 중 가장 간단한 선택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를 키운 것은 당시 내가 머물던 거주 환경 상 냉동실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혼자 먹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 배달 음식의 대부분은 양이 꽤 많다는 점이었다. 소분도 나눠먹기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그 많은 음식을 꿋꿋이 앉은자리에서 다 먹었다. 2, 3인분의 음식을 혼자 먹는 습관에 짠 음식,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은 살을 찌우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결국 1, 2년 사이 어느 전문가가 봐도 건강하지 않다고 진단 내릴 법 한 몸상태를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배달 어플이 귀하신 분 대접을 해 줄 정도였으니 소비 금액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음은 당연했다. 부모님께 생활비가 떨어졌다며 연락을 했지만 사실상 그 생활비의 사용처는 대부분 불필요한 식비였고, 그 사실을 알기에 손 벌리기는 더욱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눈치 정도로 사라지는 것이 중독일까. 부모님의 눈치를 보고 죄송해하고 그런 자신에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쉽게 줄여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현재는 배달 음식에 심각한 충동을 느끼지는 않는 상태이다. 애석하게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과 공유할 만한 유익한 해결법을 찾아 고친 것이 아니다. ADHD 바탕에 우울증이 만들어냈던 배달 음식 중독은 다시 우울증으로 식욕이 사라지며 함께 사라졌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던 노력은 배달 어플을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아예 지우고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심심할 때 읽을거리를 찾듯이 배달 어플을 켰다가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그리고 배달을 시킨다 해도 냉동 보관 등 내가 먹을 만큼만 두고 나머지를 처리할 방법이 있을 때 훨씬 과식을 덜 했다. 물론 이러한 방법 만으로 배달 음식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면 나의 충동성과 중독 성향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음주는 여전히 문제이다. 맥주를 자주 마셔서 도수가 높은 술은 많이 접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지만, 맥주 양만 고려해도 한 자리에서 상당히 많은 양을 마신다. 그리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하던 것을 쉽게 멈추지 못하는 성향, 돈을 쉽게 쓰는 성향과 맞물려서 처음 준비한 술을 다 마시고 나면 더 구입하곤 한다. 심지어 술에 취해 고삐 풀린 뇌는 예전 습관까지 되살려 배달 음식을 주문한다! 여러 모로 나의 소비 습관은 현재 진행형 문제인데, 술과 관련된 소비는 그중 가장 심한 부분을 담당한다.
미약하게나마 나를 잡아주는 것은 음주량을 기록하는 습관이다. 매일 아침 전날 술을 마셨는지, 마셨다면 얼마나 마셨는지를 기록한다. 일주일에 몇 번이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음주 기록을 들여다보면 강력한 '현타'가 밀려온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마시는 것은 계속해서 경계하게 된다. 한 자리에서 많이 마시는 것도 결코 좋지는 못할 텐데, 어찌 되었건 자주 마시는 것이 알코올 중독에 위험하다고 하니 조금은 조심하는 중이라고 자기 위안 삼아 본다. 술을 마시는 중간에 더 사 오는 습관은 어떻게 고쳐야 할지. 고삐 풀린 뇌의 소비 명령은 의식 수준이 아닌 나를 더 귀찮게 하는 방법을 평소에 준비해 두어서 막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되지만 아직 마땅한 수를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분명한 것은 쇼핑, 배달, 음주 등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한 중독이 장기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텅 빈 잔고 때문에 자주 우울해하고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혹시 필름이 끊겼진 않았을까 걱정한다.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자극을 얻는 법과 뒷 일을 생각하지 않고 '지르는' 방식의 소비를 줄이는 법을 찾는 작업은 약물치료와 함께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