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은 초가삼간 태우듯이
평생 사랑을 하면 된다
싫어하는 것은 죽어도 하기 싫어하는 반면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른 짚에 불을 붙인 것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늘 뜨거운 '덕질'이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무엇인가 관심을 갖고 좋아하고 시간을 할애하고, 나아가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살아도 죽어있는 생활을 해야 했고 숨 쉬는 일 마저 지루해졌다. 연예인, 스포츠, 영화, 만화, 음악, 게임, 심지어는 애인까지 나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한동안 내 모든 열정과 시간과 돈을 끌어 그것을 탐닉하는 데에 바쳤다.
문제는 언제나 적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의 덕질은 내 모든 것을 넘어 마땅히 집중해야 할 생활까지 불태우는 것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하나에 빠지면 몇 날 며칠이고 커뮤니티를 보며 밤을 새우다 아침해를 보며 잠에 들었고 순식간에 헤비 유저가 되었다. 연예인이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꽂히면 모든 일상이 그로 가득 찼고 그의 정신적 안위를 걱정하느라 나의 정신이 메말랐다. 그 분야에 관한 물건은 돈이 생길 때마다 숨 쉬듯이 사들였다. 특히 돈을 쓰는 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따로 다뤄야 할 정도다.
한 분야에 빠지면 그것의 세상에 완전히 파고들어 현실과의 연결을 끊다시피 하는 것은 그렇잖아도 쉽지 않은 나의 인간관계를 더 어렵게 했다. 친구나 가족과도 덕질이 아니면 할 말이 없었을뿐더러 함께 그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 되었다. 일상에서 혼자 생각의 흐름에 끌려다니다 불쑥 남들은 잘 모르는 덕질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했다.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 전에는 내 관심사가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와 다르다는 사실마저 잘 인지하지 못했고 내가 잘 알고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급격히 흥분해서 잠시도 조용히 할 수 없었다.
물론 몰입할 것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팬아트를 그려보고 싶어서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기본 근력이 필요해서 운동을 하기도 하고, 한국어 자료가 없어서 공부를 할 때보다 더 많은 영어 문서를 읽기도 했다. 사실상 나에게 학교에 다니고 성적을 챙기고 인간 꼴을 유지하는 등의 의무가 아닌 일을 할 수 있는 생기와 원동력을 주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그 시기에 진행 중인 덕질이었다. 덕질을 하면서 알게 되는 상식도 많았고 그 안에서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도 했으니, 사회 경험을 포기한 대신 덕질에서 경험을 쌓은 셈이다.
문제는 짚불이 너무나 빨리 타버린다는 것이다.
약간의 방해 요소가 생기면 덕질을 위한 열정은 찬 물 끼얹은 듯 사그라들었다. 방해 요소라는 것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생긴 논란일 수도, 어렵고 힘든 과정일 수도 있고 내 주의를 흩어놓을 만한 무언가 일 수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내 취미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사를 가면서 배움의 환경이 변하면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커뮤니티에서 누군가에게 지적당하면 그날로 인터넷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성장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다는데, 나는 무엇을 배우든 계단 한 칸을 오르기 직전에 질려서 성장하기를 멈추곤 했다. 누군가는 아직 무언가를 완전히 익히기에 젊은 나이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이 경험들은 자주 나를 끌어내렸다. 끝을 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이것저것 얕고 넓게 간만 보다가 말아놓고선 아는 척하는 사람, 이것이 내가 아는 나였다.
문제는 개인적인 관계가 덕질이 되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나의 덕질과 같은 열정 불사르기는 연예인이나 취미생활에 한정되지 않았다. 나는 애인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애인의 심기에 눈치를 봤으며, 실망시키지 않으려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과 고질적인 무기력증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언제나 내가 미움이 아닌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고, 여기에 충동적인 성격이 합쳐져서 스킨십의 적정 수준도, 자신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도 알지 못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일종의 분리불안을 느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만들고 있을까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떨어져 있다는 사실과 연락이 안 된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로 다가왔다. 서로를 분리해내는 데에 실패한 양육자와 자식 같은 관계를 동등한 성인의 연애에서 재현하는 것은 병적인 상태에 가깝다. 아이에게 양육자는 세상 그 자체이고 양육자의 말은 절대적이다. 아이가 자신이 양육자와 다른 독립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발달 과정으로 거쳐야 하며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채울 것을 양육자에게 요구하고 양육자는 그것을 이행한다. 내가 가스라이팅에 아주 취약한 상태였고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임을 깨달은 것은 관계를 완전히 끝내고 되새겨볼 때에 이르러서였다.
사실 이 이야기가 ADHD와 크게 관련 있는 문제인지, 아니면 내 여러 가지 결핍이 만들어낸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ADHD로 인한 낮아진 자존감이, 높은 충동성이, 감정의 잦은 격앙이 연애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여성이 ADHD를 가지고 있을 때 이 특징들은 모두 가스라이터의 먹이가 된다.
요즈음 하는 덕질과 이 글 쓰는 취미는 내 삶에서 아주 보기 드물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피드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감정 소모를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지만 이를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말하진 않겠다. 나 역시 장기간의 심리 상담과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해본 끝에 겨우 이만큼의 효과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늘어놓았지만 관심사가 자꾸 바뀌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취미 학원을 좀 다니다가 그만둘 수도 있고 흥미가 식은 후에도 그 당시에 즐거웠던 자신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모든 연애는 어느 정도 상대를 향한 덕질의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내가 충동적인 덕질로 빚을 지지 않으면 안 될 때, 사회생활을 못 하게 될 때, 애인에게 집착하고 휘둘릴 때까지 스스로를 다잡을 수 없다면 '나'를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닌 '나의 병'을 완화할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게 평생 대상을 바꿔가며 덕질을, 다른 말로는 사랑을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