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만나는 사람은 적어진다. 이제 특히 친구의 범위는 좁아져 선이 좀 보이는 것 같다. 돈의 소중함을 모를 때는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쓰려했다. 특히 친구들에게, 니꺼내꺼할 것 없이 많이 썼다. 대학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모두가 내 곁에 남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며 30대가 되고 나서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를 챙길 여유가 없고, 정말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만 곁을 지키고 있다. 한 명이라도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써 의미가 있으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났던 시절은 아무래도 비행하던 때였을 것이다. 하루에 몇백 명을 만날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갤리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승객들이 와 말을 건다. 신입 땐 승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나중 되니 피곤해서 말 걸지 말았으면.. 하고 바쁜 척을 하거나 크루들끼리 속닥거렸다.
에미레이트 항공 A380 비즈니스 객실은 호텔처럼 바가 있다. 승무원들은 서비스를 하며 사람에 치이다 보니 나를 포함하여 혼자 있고 싶어 하거나 대화하기 싫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비행 중 승무원이 대화하는 승객의 90%는 불만을 가진 손님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라운지 포지션을 좋아하는 크루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승무원 트레이닝 중 '아기 받는 법'을 배운다. 말 그대로 임신한 승객의 아이를 받는 법이다. 만삭인 산모들은 비행이 제한되지만, 간혹 미국 또는 영국 등의 국가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임신한 배를 숨겨 탑승하는 승객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 통계를 보면, 1년에 1번 이상 비행기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이를 대비하여 비행기에는 각종 Emergency kit 가 구비되어 있다. 뾰족한 물건은 무기가 될 수 있어 제한되지만, 비밀의 공간에 아기의 탯줄을 자르는 특수 가위도 있다. 화장실에서, 갤리에서 아이를 받는 와중에도 다른 400명을 위한 서비스는 계속된다.
비행기를 많이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비행기 내부는 더운 법이 없다. 특히 가만히 앉아있는 승객에겐 더더욱 춥다. 추운 겨울에도 냉방을 끄지 않는 이유는 승객들이 기절(faint)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압이 상승하고, 장시간 앉아있다가 일어나게 되면 건강한 사람도 기립성 저혈압이 오기 마련이다. 기내식이 고칼로리인 것도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내 기억으로 일반식 1 접시에 약 7~900 칼로리였다. 나는 이걸 한 비행에 4개씩 먹고도 살이 빠졌었다.
기억에 남는 승객이 있다. 아이 엄마가 나에게 비틀비틀 오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냥 기절이 아니라 눈이 뒤집히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의식이 없는 승객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비행기를 뒤졌다. 빈자리가 많아 어딘지 어려워하고 있는데, 2살쯤 돼 보이는 아기가 혼자 앉아있었다. 시니어들이 아이 엄마의 응급처치를 맡았고, 나는 아이를 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유니폼을 입고 승객의 자리에 앉아 아기를 보고 있으니 뭔가 이러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너무 해맑았다. 아기랑 놀아주고 있으니 그 장면이 재밌었는지 크루들이 사진을 찍어줬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라 웃고 있는 아기를 보면서 혼자 아기를 데리고 먼 길을 왔을 엄마의 힘듦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기억에 남았다.
어린 나이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했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파일럿과 결혼하는 게 목표라며 서비스가 끝나면 비즈니스 클래스로 남편을 찾아 나서던 동료, 일등석 술을 페트병에 담아 나가려다 잡힌 승객, 이코노미석에서 아프리카 어디 왕자라며 들이대던 아저씨, 브라질에서 태극기를 흔들러 시청에 간다던 분.. 재밌는 일이 많았구나. 한국에 돌아오고 근 몇 년은 다 합쳐 100명도 안 만난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