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님아, 그 다리를 건너지 마오.

난 원래 누군가의 옆에 있으면 편안하지 않아

by 위키별출신

로빈은 나중에야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동안 모리스와 놀았다. 갑자기 호스텔에서 사라진 나를 두고 니노가 뭐라고 할 지 상상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딴 취급을 받았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 호스텔을, 완전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곳에는 내 짐이 너무 많았다. 앞서 얘기했듯 나는 큼지막한 캐리어 두 개와 피아노를 메고 이곳에 온 사람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는 짐을 줄이는 게 아니라 짐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니노는 피해망상을 빼면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음악을 하는 나에게도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호스텔의 일부분을 나를 위해 개조도 해주었다. 마리아가 나를 위해 그림도 그려줬고, 비건 카페에서 받은 귀여운 조각상과 참고하라고 받은 책에, 버스킹하면서 사람들이 건네준 여러가지 장식품에…. 하여간 갖가지 물건이 니노의 호스텔에 있었다. 그냥 나올 수 있을리가 없고 꽤나 시간 들여 내 짐을 챙겨야 한다. 못해도 세네 시간은. 그러나 내가 당장 니노의 호스텔에 가서 짐을 챙겨 나온다? 로빈과 한패라고 여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남자가 과연 내 숙박비를 정산하고 날 고분고분 보내줄까? 그렇다고 그의 피해망상을 들으면서 그곳에서 버티는 건 마치 폭력 가정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 욕을 듣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리스의 음식은 그가 자신했듯 맛있었다. 모리스가 구운 양파와 신선한 야채와 직접 뭉쳐서 만든 패티가 들어간 대형 버거 같은 크기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준덕에, 그 안에 담겨 있던 소스를 볼에 묻히면서 먹고 있었는데 맨 끝에 있던 방에서 로빈이 빠져나왔다. 그는 내가 있다는 걸 알고는 당황한 얼굴로 바깥으로 사라졌다.


쟤가 어떻게 여기 온 거야?


내가 여기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로빈과 모리스 사이에 언쟁이 오갔다. 내가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것은, 내가 밥먹고 피아노를 치러 들어간 사이에 바깥의 테라스에서 무슨 목소리가 몇 번 오가다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소리를 친 것도 아니고 공간도 분리되어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피아노 소리를 줄였을 땐 이쪽의 눈치를 본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이 없어졌는지 그들은 조용해졌다. 나가서 얼굴을 보면 대충 어떤 대화를 나눴는 지 알 수 있겠지 싶어 나갔다. 기분이 상한 것이 역력한 모리스는 뭘 사오겠다면서 테라스에 연결된 계단을 통해 바깥쪽으로 나갔고 로빈이 이쪽에 예의바르게 미소지었다. 내 얘기군.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었어?”


로빈은 내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고는 내 옆에 와서 긴 손을 테라스의 나무 데크에 갖다댄 뒤 체중을 싣더니 물었다.


“왜 여기 온 거야?”


나는 사실대로 고했다. 어차피 니노가 미쳐 날뛰었다는 이야기도 해줘야 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니노에 대해 화가 나서 그러는 줄 알았다. 호스텔에 남아있는 짐이 숙박비의 몇 배는 될 텐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로빈은 말했지만 그 문장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원체 화를 잘 안 내는 인간이긴 하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도 열받아 하지 않으니 신기하군.


“내 생각엔 니노에게 무슨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가 하는 종류의 것으로 말야.”


“아,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두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볼때는 어렸을 때 무슨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어.”


나는 그가 누군가 한 사람 타겟을 정한 다음에 그에게 엄청나게 잘해 주다가,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애정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단박에 상대를 악마 취급해 버렸던 니노의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떠나가게 되면 사람이 상처를 입게 되고 다른 사람의 반응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행동 패턴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니노의 호스텔에서 지내면서 느꼈던 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의 과거에 대해서 억측을 교환했다. 그 다음, 테라스에서 벗어나 연습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안에 있던 기타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들었고, 나도 피아노를 무릎 위로 올렸다. 그리고 부당하게 욕을 먹은 자들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피아노와 기타를 치고 놀았다. 그렇게 한두 시간인가 친 다음에는 로빈이 최근에 찾아낸 괜찮은 앨범이라면서 구석에 있던 노트북을 켜더니 몇 곡을 들려주었다. 아이슬란드의 인디밴드였다.(지금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에너지를 대충 발산한 다음이라 조금 쉬어야 겠다 싶었고 그는 왼쪽 벽에 붙어 있는 푸른 색 패브릭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담배를 피웠고 나는 주인이 없는 주방에서 머그잔에 따뜻한 차를 타서 그의 옆에서 홀짝이면서 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로빈이 한참 있다가 중얼거렸다.


“난 원래 누군가의 옆에 있으면 편안하지 않아. 빨리 어딘가 다른 장소로 싶어서 초조해하는 편인데 참 이상하지. 너랑 있으면 어디에도 가고 싶지가 않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호감? 내가 자신에게 포근한 이불 같은 존재라는 뜻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있으면 항상 불편함을 느낄 만큼, 끊임없이 남에게 비위를 맞추는 게 네 본성이라는 뜻인가? 나도 그래, 라던가 고맙군, 이라고도 대꾸하지 못하고 나는 잠자코 그의 그림자도 닿지 않은, 그러니까 그의 위치와는 좀 빗나간 위치의 벽을 쳐다보았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 들었어?”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아, 하필이면 그거라고는 말하지 말아 줘. 물론 다른 의미 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모른 척하는 쪽으로 말이다.


“아, 미안. 노래 듣느라고 못 들었어.”


나는 그쪽에 무심한 척 시선을 돌렸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상처입기 직전에 달한 얼굴을 본 다음에는, 내가 어떤 반응이라도 하면 그에게 힌트를 주게 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 태연한 척 하면서 나는 머그컵을 내려놓고 테라스로 나갔다.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잘못 본 거여야 했다. 심각한 두통의 원천이 되는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발생할 리가 없다. 내가 자뻑 기질이 좀 있어서 스스로 보고 싶은 것을 봤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오른쪽 손으로 턱밑을 쓰다듬었다. 로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좋은 편이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연애 대상 중 하나로 선정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연애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지 않을 예정이고, 그를 위한 수행을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실연을 당하고 이역만리로 날아와 버스킹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또 연애질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로빈은 기타는 잘 치지만 약쟁이란 말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와 사귀거나 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른대로 고하면 우리의 버스킹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게다가 여기서 그와 어색해지면 나는 지금 즉시 니노의 호스텔에 돌아가야 한다. 로빈이 오늘 당장 바로 니노의 호스텔로 돌아가 숙박비를 갚을 것 같이 보이지도 않는데(그는 한국인이 아니라서 모든 사안을 바로 바로 처리하지 않는다) 나만 돌아가서 무슨 고통을 당하란 말인가? ?


다행히도 잠깐 밖에 나갔던 모리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현관에서 울렸다. 나는 재빨리 모리스에게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한참 뒤에야 연습실로 들어갔다. 로빈은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떠오르고 말았다. 하필이면 왜 지금인가. 제임스였다. 제임스가 예전에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금 표현은 다르지만, 같이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다던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던가 뭐라던가 비슷한 톤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런 식의 말을 한 다음 그날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내게 고백 비슷한 걸 했었다. 저 말로도 안통한다 싶었나보다. 물론 두 번 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었다. 나중에 그가 결혼해달라고 하고 나서야 그게 호감이 있어서 한 말이구나 이해가 됐다. 어쨌건, 그러니까, 이 문구는 어디 레딧 같은 사이트에서 ‘유혹할 때 잘 통하는 관용어구 10선’으로 올려져 있기라도 한 거란 말인가? 본격적으로 고백하기 전에 한 번 간 좀 봐 볼 때 쓰고, 그래서 답이 없으면 그 다리를 건너지 말고?


난 확실히 별로 좋지 않은 답을 전했다. 알아들었다면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지. 나는 모리스와 대화하다가 잠시 침묵한 뒤, 부디 로빈이 다리를(만약 정말로 다리를 건널 생각이었더라면) 건너지 않기를 빌었다. 세상엔 이런 다리 저런 다리가 많고 다리란 원체 대체 가능한 면도 있다. 대안이 되는 다리도 많은데 꼭 이쪽을 택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