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대체 내가 몇 살로 보이니
“오늘은 그 사람과 함께 공연 안해도 돼?”
그날 저녁, 모리스와 로빈, 나는 함께 연주 연습을 두 시간 정도 했다. 모리스는 우리가 이렇게 팀을 짜서 거리로 나가면 상당히 반응이 좋을 것이라면서, 자기가 아는 바의 주인이 이런 조합의 밴드를 찾고 있으니 곡을 좀 맞춰 본 다음 거기에서 공연을 하자고 우리를 설득했다. 확실히 로빈 혼자, 혹은 로빈과 모리스 둘 보다는 훨씬 때깔이 나는 조합이다. 어느 카페와 바에서도 우리를 반겨줄 터였다.
하지만 로빈은 그리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 좋아, 라고는 이야기했지만 표정이 별로였다. 모리스의 말이 끝난 뒤에도 내 쪽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모리스가 잠시 쉬자면서 베이스를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테라스로 나간 뒤에 그렇게 물었다.
“누구?”
“너 맨날 스마트 마켓에서 만나는 남자 있잖아.”
파푸너 얘긴가. 하긴 내가 파푸너와 공연을 이 시간이면 하긴 했다. 파푸너는 앞서 말했듯 전략가요 왕년에 축구선수를 했던 감이 있어서 공연일도 제깍제깍 지켰는데 이 날은 그가 ‘통계상 유동인구도,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도, 그에 따른 팁도 많은’날이라면서 반드시라도 좋을 만큼 나를 불러내던 요일이었다. 우리는 공연이 끝난 뒤 스마트 마켓에 가기도 했고, 공연이 없을 때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파푸너의 파란만장한 연애담과 일리야에 대한 험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빈이 물어보는 뽄새를 보니 내가 그와 사귄다고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연락 안 해도 돼. 그는 조지안이라서, 내가 안 나타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일리야랑 공연할 걸?”
“….”
그는 납득하지 못한 듯한 눈, 사실 정확히는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봤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오해는 이용할 만 하다. 내가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고 생각하면 감히 나에게 들이대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래서 그가 이렇게 저렇게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 나는 최대한 그가 오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의 양심에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고 파푸너에게 잘못 전해지기라도 하면(파푸너는 영어를 잘한다) 큰일 날 일이기에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을수록 로빈의 얼굴은 점점 핼쓱하고 시커멓게 변해갔다. 그리고 나는 그가 오해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파악하게 되었다. 그가 스마트 마켓 주변에 점찍어놓은 자리에서 도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나와 파푸너가 이야기하는 걸 본 모양이었다. 그는 우연찮게도 나와 파푸너가 ‘데이트’하고 있는 장면을 몇 번이나 봤다고 했다. 나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누가 마트에서 데이트를 하지? 혹시 로빈 역시 내가 어리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동안 그렇게 어울려놓고도 로빈과 나는 서로의 나이를 아직 잘 몰랐다. 나는 천장을 잠시 쳐다본 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고, 한숨을 쉰 다음 물었다.
“너, 내가 도대체 몇 살로 보이니?”
나는 이 말을 뱉은 지점에서, 파푸너와 사귀고 있다는 그의 오해가 내 목적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말았다. 그는 내가 스무 살 초반에서 중반 정도로 보인다고 했고, 나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려보였다. 아부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니, 아마 인종이 달라지면 상대방의 나이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는 경향성에서 나오는 것일 터다. 나는 어렸을 때나 그런 데서 데이트를 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 뒤, 내가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제 나와 파푸너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감을 잡았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살짝 돌았다. 실수를 깨달은 나는 그의 오해에 쐐기를 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최대한 재빨리 덧붙였다.
“내가 원해서 거기서 만나는 건 아니야. 파푸너가 워낙 고집이 세서 말이지.”
엄밀히 말하면 한없이 거짓말에 가까웠다. 나는 그와 데이트하는 사이도 아니고 어디서 만나건 아무런 감정이 안 든다. 그러나 나는 애인이 제대로 된 곳에 끌고가지 않아서 불만족한 척, 분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로빈의 표정은 볼만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와의 문답은 그에게는 마치 롤러코스터 같았을 것이다. 알쏭달쏭함, 기대했다가 다시 그 기대가 배반당한 허무함이 공존하는 눈으로 그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너무 재밌다. 객관적으로 내가 그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데다 공유하고 있지 않고, 그로 인해 그의 속마음까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잠시 순간의 우월감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눈동자와 마주친 뒤, 나는 이전 연애들의 조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나는 내가 한 거짓말-정확히 말하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로빈이 오해하는 것을 유도하긴 했다-의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거실로 나와서 모리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냉장고를 뒤졌다. 낮에 사 놓은 맥주가 보이기에 집어들었다. 딸깍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뚜껑을 땄다. 로빈은 다행히도 혼자 기타를 몇 곡 치더니 내 쪽으로 오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제임스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몇 년 전이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앉아 있었고 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철철 쏟아질 것 같았으며 귀는 빨갰고,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코카서스 인종의 장점은 감정의 변화를 관찰하기가 아주 쉽다는 점이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기라도 하지 않으면 얼굴 색이 그다지 변하지도 않는 동양인과 달리, 새하얀 피부에 피가 순식간에 몰리는 장면을 보는 것은 무척 드라마틱, 감동적일 지경이었다. 그는 내가 내뱉은 말 때문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비록 내쪽으로 눈동자를 돌리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의 눈동자는 현실 세계의 것을 비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커먼 무언가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절망이라는 이름의 애절한 감정이었겠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손으로 셔츠 포켓 속에 있던 담배를 꺼내려고 했는데 그만 폼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주워들은 그는 담배를 피우러 옥상으로 갈게. 라는 말을 했다. 성대를 어떻게 움직였나 싶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은 밤이었고 옥상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그가 옥상이라고 지칭하긴 했지만 사실 그곳은 옥상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저 빌딩의 윗 부분이었고 안전상의 이유로 그곳으로 기어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극단으로 치달은 그의 감정을 눈 앞에서 감상하는 것이 흥미로웠던 나는, 태연하게 ‘나도 한 대 피울게.’라면서 그를 따라올라갔다. 혼자가 되어 눈물을 글썽이거나 감정을 삭일 생각이었던 그는 내가 따라 가는 덕분에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반응한 이유는 그가 사랑을 고백했는데 내가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솔직하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에 고통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후회되거나 미안하기는 커녕 더욱 괴롭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점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여기에 또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나는 로빈의 고통을 보는 것이 흥미롭고, 더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아마도 호기심과 우월감에 내가 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느냐’, 라고 지금 묻는다면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기 어렵다. 대신 이런 말은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