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제야 간신히 이별에 냉정해진걸까?

by 위키별출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습은 원활했다. 그 중 칠할은 모리스 덕분이었다. 어딘가 뾰족한 로빈과, 그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긴 하지만 어쨌건 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해주고 있는 나만 있었다면 이렇게 원활한 연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리스는 올마이티였다. 밖에 나가서 음식 재료를 공수해 왔으며 모든 요리를 자기 혼자 다 해냈다. ‘도와주겠다’라면서 다가가도 ‘십 분이라도 더 연습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거다’라면서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우리의 데뷔는 일주일 뒤였다. 그리고 바의 주인은 원하는 곡 리스트가 있었다. 그 중 몇 곡은 데이비드 코헨이었다. 내가 데이비드 코헨의 중후한 목소리가 어울리는 곡을 소화할 수 있을 리도 없고 해서 결국 몇몇 곡은 보컬 없이 연주만 하는 걸로 되었다. 그리고 일부의 곡은 내가 평소에 연주하던 곡, 몇 곡은 우리가 새로 맞춰본 곡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모리스는 대부분의 베이스가 그렇듯 성격도 괜찮았고 귓속에 메트로놈이라도 달고 있는 듯 꽤나 정확한 박자감을 보여줬다.


로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그 이후로도 나와 자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창조해냈으며 그것을 계속 그 상태 그대로 관리해 나갈 것이라는 것을 그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전과 마찬가지로 그와 태연하게 대화했다. 변화는 최대한 줄였다. 로빈이 나에게 마음을 완전하게 읽힌 것은, 그가 동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감정이 됐든 주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들킨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나에 대해 가진 감정이 적의의 하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 나는 그의 행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그전과 완벽하게 ctrl+V, ctrl+C한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로빈은 남의 표정을 잘 읽는 능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의 감정의 변화-부정적인-를 1등석에 앉아 관람하는 영광을 누렸다.


“어디 가? 오늘 연습 안 할 거니?”


어느 시점부터엔가, 로빈은 나만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예의 모리스가 차려 준 밥을 먹고 내 방에 들어가 물건을 챙기는 순간에도, 그는 안 보는 척 담배를 말면서 나를 신경쓰고 있었다. 말도 없이 나가려는 데 그가 붙잡았다.


“아, 잠깐 파푸너 만나러 가. 얘기만 좀 하고 돌아올 게. 네 시 부터 연습하자.”


“혹시 또 스마트 마켓 가는 거야?”


“응, 너도 올래? 파푸너도 음악하는 애라서 너랑 말이 잘 통할….”


그의 얼굴은 톡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어두운 색깔로 바뀌었다. 그는 재빨리 내 말을 잘랐다. 사람이란 고통스러운 문장을 오래 듣지 못하는 법이다. 내 말을 멈추게 하는 것이, 내가 그에게 ‘남친’과 이야기할 기회를 줄 정도로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그의 (잘못된) 판단을 바꿀리도 없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아니, 괜찮아. 잘 다녀와.”


“알았어.”


나는 뒤돌았다. 승리한 것처럼 입술이 위쪽으로 휘어올라갔다. 재미있어 미치겠다. 나는 스스로의 심술궂음에 조금은 반성했지만, 그 반성은 전에 없는 유희의 쾌락과 즐거움에 금세 묻혀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약간 양심에 찔려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연애도 안 할 건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이런 것도 한 때요, 로빈은 몇 년, 아니지 몇 달 뒤면 다른 사람에게 꽂혀서 나에게 모종의 감정을 품었다는 것도 까먹게 될 텐데. 설령 로빈이 나와 사귄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같은 아픔은 어떤 형태로든 종내에는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조금 앞으로 당긴다고 해서 다를 것도 없다. 오히려 사귀고 난 다음의 아픔은 이것의 두세 배, 어쩌면 대여섯 배가 될 수도 있다. 데이트하는 과정에서 기약도 없는 약속을 주고받으면서 꿈과 희망을 키우고, 즐거운 추억도 만들고, 그러면서 충분할 정도의 시간 낭비도 하고, 다른 인간관계를 희생하고 하는 대가를 치룬 다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임스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세월에 지워져 희미했지만, 일부의 아픔은 여태 남아있었다, 헤어짐을 고한 순간에는 물론 승리감도 들었다. 네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이겼네. 라는 유치한 즐거움. 하지만 그 즐거움은 길지 않았다. 후회와 미련이 훨씬 더 길었다. 헤어지지 않으면 안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두 사람 간의 가치관의 차이, 생각의 차이에 몇 번이고 골몰하면서 간신히, 헤어짐을 고하면서도 사실은 나 역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괴로웠고 슬펐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고, 늦고 자시고 이전에 더 이어갈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가 별로 많은 시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금방 다른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음침하게도 나는 그의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그가 새로운 사랑을 성공적으로 시작하고 그것을 이어가는 과정들을 침묵하며 지켜보았던 것이다. 분했다. 그 분함도 진짜였다.


그러나 만약 내가 초기에 그와 내가 맞지 않은 상대임을 알아채고(사실 처음부터 그러한 단서는 쉴새없이 주어졌다)친해지고 정이 붙고 더 알아가기도 전에 안녕을 고했다면 그도 나도 그리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았던 나의 생각을 로빈에게 실천하는 이번 케이스는 옳고, 옳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로빈의 감정을 바라보면서 어떤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있다면, 그건 나만의 몫이지 그의 몫이 아닌 고로 합당한 즐거움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 사귀자고 한 뒤 감정도 없는데 입바른 거짓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알아본다던가 하는 기만과 그에 따른 지독한 민폐는 아니지 않은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민폐라는 점에서 응당 즐길 만한 유희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잠수이별자가 생각이 났다. 그가 한 민폐야 말로 내가 방금 서술한, 그리고 가장 경멸하는 종류의 민폐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와 만남을 지속하면서 때때로 위화감이 들었는데 그의 말과 행동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자꾸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성격적 특성일 수도 있다면서 스스로를 설득했는데, 냉정하게 관찰하면 할수록 그런 점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을 연기하는 법은 알았다. 일정 시간에 연락하고, 주말의 프라임 시간대에 데이트를 하고, ‘내 귀에 캔디’같은 문장만을 사용하고, 매너 있게 행동하고 가끔 이벤트같은 일도 벌이고. 하지만 그 내부에는 내가 다른 연애를 하면서 마주쳤던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합리적이고 사리에 맞는 가면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가 원하는 것이 안정적인 연애의 흉내였다면.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남겨진 조각들을 맞춤으로써 그를 진실로 이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가 진짜가 아닌 주제에 진짜 행세를 했다는 점에서 잠수는 그에게 있어 매우 합당한 선택이었다는 데도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분노가 조금은 잦아들었고, 이제는 잠수이별자가 왜 그랬는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만큼, 가슴에 꽂힌 칼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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