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가망이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느 쪽이 착각인가?!

by 위키별출신

파푸너와 이야기만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와 함께 공연도 잠깐 하게 되었다. 피아노를 들고 가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목소리에 화음을 좀 넣어주었다. 삼십 분정도 공연한 다음 로빈과 모리스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로빈은 보이지 않았고, 모리스가 예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았다. 로빈은 어디 간 거야, 라니까 집주인에게 기타 쳐 주러 갔단다.



이 집 주인은 요란한 인테리어에서도 알 수 있듯 음악에 미친 사람이었다. 집주인 조지안 할아버지는 특히 우드스탁 계열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 덕분에 우리는 새벽 세네 시에도 아무런 방해 없이 연습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방음도 안 된 연습실에서 베이스와 기타를 앰프에 물려서 거의 본 공연 맞먹는 소음을 몇 시간에 걸쳐 내는 데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환경이라니. 한국이라면 꿈도 못 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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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환경의 소중함을 나는 이후 한국에 돌아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네 시에 피아노를 치면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단톡에 불평글이 올라왔다.(내가 살고 있는 집은 단체톡방이 있고 주민은 의무가입해야 한다) 새로 이사온 스무살 후반의 남자가 길게 올린 글이 있었다. 다 같이 사는 곳에서 음악 연습을 하는 것은 몰상식하다면서 주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새벽 네 시도 아니고 오후 네 시에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알고 지내야 하는 사람이므로, 나는 그에게 카톡을 보내 ‘죄송하다’면서 언제 연습을 해도 좋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토요일 오후가 안 된다면 저녁은 되느냐? 안 된다. 좋다. 일요일은 되느냐? 안 된다. 평일 저녁은 되느냐? 안 된다. 결국 그가 된다고 대답한 시간은 평일 낮의 일정 시간 뿐이었다. 평일에는 일하러 가서 없으니까 상관없다면서. 즉, 그는 자신이 그곳에 살고 있는 이상 제 귀에 들리는 다른 소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조용한 곳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은지 조금 된 집들이 으레 그렇듯 아랫집 윗집의 소음이 선명할 정도로 잘 들려서 어느 집인가가 저녁 열두 시 넘어서 사랑싸움을 하고 있고 어느 집이 밤새 통화를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불평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약간의 소음은 그려려니 하면서 서로 이해하며 살아온 것이다. 저녁 늦은 시간, 새벽 시간대의 소란함만 아니면 어느 정도의 생활 소음은 발생해도 괜찮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공사 소음이 발생하고 있었다. 크레인으로 땅을 긁고 목수가 망치로 나무를 땅땅 내리찍는 소리, 철골이 서로 부딪치는 소음 등은 내가 만드는 음악적 소음의 데시벨을 충분히 능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 공사 소음보다 내 음악 소리가 더 거슬린다면서 공개적으로 불평 글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는 내가 내는 소음만 저격해서 단톡에 올리곤 했다. 생각하니 열 받는군.)


나는 그가 불평한 뒤로 다시는 집에서 연습하지 못했다. 소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하지만 만약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반드시 당장 되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은 동유럽의 한 국가를 떠올렸다. 음악적 소양이 대단한 사람들이 무궁무진하게 많은 데다 언제 음악 연습을 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던 신기한 곳.



아무튼 열받는 얘기는 이쯤하기로 하고, 내가 로빈을 곯려주면서 므흣해하던 시기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원래 조지아가 음악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는 나라니까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이 집 주인은 그런 특성이 두 배는 업그레이드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왕년에 그 역시 공연을 하러 다닌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는 우리가 새벽 연습할 때 종종 나타나 하차푸리나 킨칼리 등 먹을 것을 주면서 ‘배고프지? 먹으면서 연습해!’라면서 감상도 하고, 자신도 가끔 껴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로빈을 빌려간 것도 그런 취미활동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둘만 남은 모리스와 나는 공연과는 전혀 상관없이 서로 좋아하는 곡을 알려주고 즉석으로 맞춰보면서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셋이 맞춰 연습을 해야 의미가 있었고, 이미 며칠 간의 합주로 대강은 맞춰 둔 상태였기 때문에 여유가 있기도 했다. 한 시간인가 두 시간 정도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 ‘그래, 너 그럭저럭 하네’라며 만족스럽다는 신호도 보내고 그 멜로디가 아니라고 짜증도 내면서 연주를 하다 보니 조금 쉬고 싶어졌다. 그는 무슨 차를 마시고 싶냐고 내게 물은 다음, 주방에서 코코아를 타서 나에게 가져왔다. 건네받은 음료를 홀짝이고 있는데 모리스가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흘렸다.


“그래도 로빈이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저번에는 상태가 안 좋더니.”


안 그래도 그의 실연한 마음을 쥐고 휘둘러대는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는 나는 호기심으로 귀가 번쩍 뜨였다. 무슨 상심, 이냐니까 모리스는 순순히 그간의 사정을 불었다. 저번에 약에 취해서 헤롱대기 직전, ‘가망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괴롭다’고 하더니, 이제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간 걸 보니 마음을 잘 정리한 모양이라 다행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여자애가 누군지 들은 바가 없냐니까 모리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나도 자세하게 캐묻거나 한 건 아니고 얼핏 들은 거라서,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인 로빈이 꼬인 발음으로 말한 거라서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 라고 했다.


“….”


나는 오른쪽 눈썹을 들고 입술을 한일 자로 길게 늘였다. 그거 나인 것 같은데. 시기도 대충 맞아 떨어지고. 로빈이 했던 말을 종합해 보자면. 스마트 마켓에 앉아 있는 파푸너와 나를 발견한 그는 한두 번은 그려려니 했지만 매번 발견하게 되고(로빈은 스마트 마켓 근처에서 버스킹을 했다) 뻔질나게 만나는 우리 두 사람을 보면서 자신에게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좌절 후 이곳에 와서 약을 하고 널부러진 상황이구만. 불쌍한 지고. 모리스, 설마 장본인이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그러나 모리스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면 역시 남편이 있는 여자겠지? 조지아 여자들은 일찍들 결혼하잖아. 스무살 초반에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라고. 로빈도 안 됐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천장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조지아 여자들에 대한 모리스의 감상은 어떤 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면서 슬픈 연애스토리를 읊어주었다. 들어본 바 확실히 한동안은 연애를 꿈도 못 꿀 것 같은 애절한 이별사였다. 이어 그는 다시 로빈의 불륜 행각에 대해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짐작이 가는 그의 조지아 여자사람친구의 몇을 예로 들면서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보였기에 수상하며, 그녀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얼마 전에 여자를 가운데 두고 남자 둘이서 칼 들고 싸우는 것도 봤다면서 로빈이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되면 분명 100% 질 것이 틀림없다(그는 기타는 잘 쳤지만 싸움에는 이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몇 번 긁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모리스의 말투가 너무도 설득력 있어서 나까지 설득 당했다. 정말 그런 거면 어떻게 하지.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고 로빈이 어디 가서 칼맞아 오면 우리 밴드는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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