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해서 알아낼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더군다나 모리스의 말이 맞다면 내게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인지하는 순간이 될 터였다. 에로토마니(Erotomania)란 게 있다. 클레람버트 증후군(Clerambault)이라고도 하는데, 한 마디로 연애 망상이다. 누군가에게(특히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에게)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종의 심리적 장애다.
상대가 친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미소를 지었거나 다정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상대가 자신에게 깊은 애정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눈 마주침, 아침 인사, 예의상의 미소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상대가 자신에게 열렬한 마음을 품었다고 받아들이는 주관성에 치우친 판단. 아마 그렇게 판단한 사람의 심리의 밑바닥에는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 그리고 상대에 대한 호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게 내 얘기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농담이 아니다. 나는 모리스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약간 불안해져서 구글로 에로토마니를 검색하고, 이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의 증상을 읽으면서 혹시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지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사랑받고 싶은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고, 사람들이 좋은 추억으로 회귀할 때 묘사하는 그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인류애적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은 내가 인지하지 않았어도 늘 그 자리에 있어 왔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쉴새없는 연애로 이어졌다. 하지만 연애는 내 욕망을 채워주기엔 너무 일시적이고 허무했으며 깊이가 없었고 때로는 가짜였다. 끝없이 배신당한 슬픔과 괴로움 때문에 결국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어, 피리어드를 찍겠어 라고 결심했지만, 혹시 내면의 욕망은 그대로인 채 표면의 껍질만 단단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고슴도치의 얄팍한 결심은 아니었을까.
나는 최대한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로빈을 향한 심술궂음은 어디에서 발로하는 것이고 내가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지, 감정이 있긴 한 것인지, 그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진짜인지, 혹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내 착각은 아닌지.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이 포근한 장소에서 매일 그와 얼굴을 마주쳐서는 안 되었다.
상대방이 열에 들뜬 모습을 보면서 비웃을 셈이었는데, 혹시 열에 들뜬 것이 이쪽인 건 아닌가?
나는 모리스가 저녁을 만들고 있는 거실에서 빠져나와 이미 어둑해져 버린 베란다로 나왔다. 나무로 만든 데크는 매달리자 삐걱하는 둔탁한 소음을 냈다. 그렇다고 밴드 공연이 코앞인 지금 와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무책임하고, 한 편으로는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그의 감정을 모른척 하는 즐거운 유희에서 나만의 착각으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오늘 밤만 이들과 연습을 진행해 보고, 팀을 깰지 일시 정지할 지 어떨지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래참의 계단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집주인과 볼일을 끝낸 로빈이 계단을 올라왔다.
아, 이런 써글...
나는 속으로 욕을 뱉은 다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둑하게 변한 밤하늘 쪽을 바라보았다. 나를 내버려 두고 달콤한 식사 냄새가 마구 풍기는 따뜻한 거실 안으로 들어가면 될 것을, 로빈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몸놀림이 느릿한게 집주인과 맥주라도 한 잔 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가 청소년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허구헌 날 술을 마신다고 핀잔을 줬다. 그는 피식 웃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로빈은 집주인과 역사 이야기를 좀 했다고 말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인접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 틈만 나면 ‘너의 할아버지가 나의 할아버지를 죽였고’라면서 으르렁 대기 일쑤다. 종교적인 문제도 있고 과거에 싸웠던 전력도 있어서 그렇다. 나는 한중일도 그렇다, 보통 인접국가는 멀리서 보면 별 것 아닌 문제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물론 일제 제외), 그러나 이는 환경적 이유에서 생긴 차이와 이로 인한 유리함을 단지 유리함으로만 놔두는 게 아니라 다른 국가를 어떻게든 착취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비롯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자신도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었다면서 아는 척을 했다. 우리는 인간이 동물을 가축화한 점에 주목했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소, 돼지, 양, 말 같은 가축이 13종이나 있는데 그것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했던 에스파냐 군대는 이겼다. 이미 가축을 기르다가 여러 번 전염병에 당하면서 유럽인들은 병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이 진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질병 때문이었다. 가축화라는 건 도의적으로 정당한 행동이 아니지만 유럽인은 그것 때문에 여전히 덕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쌓은 부로 또다시 패권을 차지한 점을 지적했다. 나는 세상은 부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있는 자는 더욱 더 많은 것들을 차지하고 없는 사람들은 갖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버스킹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실력이 있어도 요령이 부족하고 수단이 없는 사람은 뒤쳐진다. 음악적 소양이 다소 부족한 파푸너는 엄청난 팁을 벌어들이고 있었지만, 실력은 있어도 앰프도 없고 선곡 스타일도 대중적이지 않은 기오르기는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둘 다와 함께 공연을 하고 있으니 둘의 차이를 보다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보니 모리스가 밥을 먹으라고 우리를 불렀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그와의 대화가 즐거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 혼자 고민을 해 볼 시간을 도무지 그가 주지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니노의 호스텔에 돌아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최대한 압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로빈에게 니노에게 숙박비를 주러 갔느냐고 물어봤다. 그가 숙박비를 냈다면 나도 그곳에 돌아가는 데 별 장애물이 없어졌을 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연하게도(?)아직 가지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니노가 ‘로빈이 돈을 안 줘서 경찰에 간다’고 난리를 친다 한들 경찰이 이와 같은 케이스의 고소장을 받아 줄 리도 없고, 욕을 먹었기에 기분이 나빠서 더더욱 시간을 끄는 수동적 공격을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표정을 조금 굳힌 다음, 니노와 싸워 봤자 얻는 이득이 없으니 그냥 곱게 돈을 줘라, 나도 엮여 있어서 거기 가기가 껄끄럽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금 침묵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이랬다.
“내가 숙박비를 니노에게 지불하면 넌 바로 호스텔로 돌아갈 거잖아? 난 네가 이 집에 머물고 있는 게 좋단 말이야.”
“….”
나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일 지도 모르는 차에, 그런 매달리는 듯한 말을 해서 나를 자극하면 어쩌라는 말이냐. 나는 포기하듯이 조금 눈을 감았다 떴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