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라지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모리스의 집에 눌러앉은 것은, 한없이 나다운 일이긴 했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떨지 생각해보지 않은 철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모리스는 정말 내가 거기 눌러앉은 것에 대해서 나쁘지 않게 생각했던 걸까? 로빈은 또 어떻고? 그가 나에게 보여준 호의는 진심이었을까? 진심이라고 한다면, 그 호의는 과연 내가 해석하는 그대로였을까?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 누군가가 A를 하라고 하면 A를 하지 않고 B를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모리스의 집을 떠난 것은 로빈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숙박료를 내지 않는 것은 내가 모리스의 집을 떠날까봐라서 라고 했다. 내가 만약 그의 도덕적인 선택의 방해물이 된다면 당연히 없어져줘야 순리이지 않겠는가? 안 그런가?? 니노에 대해 실망해서 다시는 알고 지내지 않든 알고 지내든 간에 갚을 것은 빨리 갚고 내 탓을 하지 않는 게 바른 선택일 것이다.
아니, 이 모든 복잡한 생각의 루트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머리가 복잡해져서 식히려고 그곳을 떠났다. 모리스의 집에 사는 것도 아니고 집세를 내는 것도 아닌데, ‘나 오늘부터 너희 집을 떠나’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훌쩍 떠나기로 했다. 모리스와 로빈이 자고 있는 새벽에 조용히, 뭔가 잘못한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몰래 말이다.
그렇다. 나는 종잡을 수 없고, 심술궂고, 남을 실망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애초에 연애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잠수 이별을 당하고, 그걸 제대로 수습을 못해서 여기까지 원 웨이 티켓으로 피아노를 끌고 날아 와서는, 동양인이 한 명도 없는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나도 정상은 아니다. 물론 나는 세상의- 특히 한국의-정상의 범위가 손바닥만큼 작기 때문에 정상에 속하는 사람들의 숫자 자체가 적을거라고 생각하는 축의 사람이지만 말이다.
나는 내 생각만 하느라고, ‘모리스의 집에 머물러 달라’는 말을 했는데도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다음 날 아침에 사라진다는 상황에 직면한 로빈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이다. 진짜 내가 그런 생각까지 했다면 사라진다는 선택지로 빠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잡은 숙박지는 호스텔이 아니었다. 호스텔에 가면 사람들이 내가 멘 피아노를 가르키면서 ‘쳐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해당 호스텔 안의 모든 사람들과 말을 트게 되고, 친해지게 되고, 같이 밥을 먹게 되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고…. 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철저히 혼자가 되는 고독감이었다. 나는 일부러 부X닷X의, 숙박업소 설명란의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곳을 골랐다. 그리고 선택에 잘못은 없었다. 호스텔이 몰려 있는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곳은, 조지안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자기들의 집에서 방 하나를 개조해서 손님에게 내어주고 있는 형태였다. 고로, 그 집에 손님은 나 밖에 없었다.
물론 철저히 혼자가 되기는 어려웠다. 조지안은 ‘손님은 신이다’라는 사상이 있는 사람들인 데다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피아노와 함께 나타난 나를 무척이나 반겼다. 나는 손가락이 삐어서 못 친다는 되도 않는 변명을 하고, 짐을 작은 방(세 평 정도인 데다 창문도 없었다)에 내려 놓은 다음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개월 전에는 그나마 여행자의 마인드로 쏘다니고 있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로빈에게 가졌던 감정. 나는 그와 음악을 함께 하고 싶었다. 실력이 욕심 났다. 내가 그보다 레벨이 딸린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함께 하면서 자극을 받고 싶었다. 열등감도 있었다. 내가 그에게 받고 싶은 것은 영감이지 애정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그의 호감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면, 그 끝은 좋지 않을 것임이 자명하다. 내가 그와 같은 감정이면 모르겠다. 내가 그와 다르다고 고백하면, 끝은 제임스와 똑같아진다. 울고, 괴로워하고, 날 싫어하고, 멀어진다. 물론 사람 마다 힘듦을 견디는 탄성은 다르니까, 상황은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겠지만 골자는 그렇다. 자신이 보여주고 쏟아내는 만큼의 호감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원망으로 되갚아진다. 별로 달가운 게 아니다. 처음에야 신기하고 즐겁겠지만 말이다. 빚 내서 외제차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호감은 뒤집으면 미움이 된다.
그래서 그의 감정이 사그라들기를 원했고, 오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게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면? 나는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면서 뭔가 다른 묘안이 없나 고민해보았다. 그가 나를 왜 좋아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냥 음악을 하고 자신과 말이 좀 통하는 게 이유라면, 그런 비슷한 여자를 한 명 더 데려다 주면 되지 않을까? 물론 그에게도 취향이 있으니까 바로 대안 쪽으로 갈아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나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끝낸 다음, 나는 애초에 내가 그와 떨어져서 고민하기로 했던 또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그가 나에게 애정이 있다는, 그래서 나와 연애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그처럼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럴 경우엔, 지금처럼 아무 말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은 마이너스가 될 터였다. 실력이 그와 비등하지도 않은 상대방이 신뢰성까지 없다면 선택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생각을 지나치게 하고 말았다. 나는 그의 연락을 받지 않을 생각으로 휴대폰 전원을 꺼 놓고 있었는데, 혹시 모든 것이 내 착각인 경우에 이번 일로 희생될 나의 신뢰성이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바의 공연이 코앞이지 않은가. 이제 와서 피아노 연주자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켠 다음, 로빈의 페이스북에 ‘내일 밤에 돌아갈게’라고 DM을 보낸 다음 전원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