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유령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애초에 내가 어디서 공연하는 것 따위는, 이미 그 뿐만 아니라 나와 공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설령 그가 까먹었다고 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금방 어디를 뒤지면 나를 찾을 수 있는 지 알 수 있고 말이다.
나는 다음 날 모리스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배를 채우려고 리버티 스퀘어를 헤메다가 그만 파푸너와 길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보컬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이라면서 이따 여덟 시에 어디에서 공연할 건데 올 수 있느냐고 했다. 일정도 없고 혼자 연주하기도 쓸쓸하니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던 나는 오케이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덟 시에 파푸너는 오지 않았고(나중에 알게 된 바 살로메라는, 파푸너의 마음을 쥐고 탈탈 흔들었던 여자 때문이었음) 나는 기오르기나 일리야도 아니고 약속 하나는 잘 지키던 파푸너가 오지 않은 데 기분이 좀 상했다. 어쩔 수 없어져서 펼쳐놓았던 피아노를 메고 스마트 마켓쪽으로 향했다. 기다리다가 그만 배가 고파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느릿하게 걷고 있는데 옆에 와서 어깨를 탁 치는 사람이 있었다. 로빈이었다.
“도망친 게 고작 스마트 마켓이구나.”
그는 ‘잡았다 요놈’이란 표정이었다. 애초에 도망친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뿐이었던 나는 억울했다.
“도망치기는, 페이스북에 메시지 남겼잖아. 오늘 돌아간다고.”
“아, 그런 메시지 보냈어? 못 봤어.”
그는 나를 근처의 다이브 바로 끌고 갔다. 주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그를 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말도 없이 집을 나와버린 내 행동 때문에 그가 침묵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마 오해했을 것이다. 있어달라는 데 나간다는 건, 말은 안 하지만 상대를 싫어한다는 싸인인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가 가져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표정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노력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킬킬거리고 웃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것을 두고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비록 내가 나다움에 빠져 나다운 변덕을 부린 것에 불과했는데, 결과는 원하는 것으로 돌아오다니.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은, 취향 저격의 말상(난 항상 좌우가 좁고 아래위가 조금 긴 얼굴이 끌렸다.)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제의 나에게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려고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 분명하거늘,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 시작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는 맥주를 좀 마시더니, 오늘 니노에게 숙박비를 내고 왔으니까 오해도 어느 정도 풀렸을 것이다, 네가 니노의 호스텔에 가도 그가 소리지르거나 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니노의 호스텔에 묵고 싶지 않기 때문에 대안을 찾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모리스의 집, 좋지 않아? 위치도 좋고 연습하기도 최적이잖아.”
“응, 그렇지. 다른 어떤 집을 찾아도 그 집 같은 조건은 어려울거야.”
시내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 앰프에 콘덴서 마이크까지 갖춘 작업 환경, 새벽 세 네시, 혹은 밤새 실컷 연주를 해도 너그러운 이웃들, 우드스탁 기념물이 가득한 스피리추얼한 인테리어, 더군다나 식사를 챙겨주면서 식비 청구도 하지 않는 모리스까지 붙어 있는 집이라니.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다. 나도 되도록이면 그 집을 택하고 싶다.
“…네가 그 집에서 지내는 게 맘에 든다면 다행이네. 그렇게 해. 내가 불편하다면 나갈게. 다른 갈 곳도 정해놓았어.”
“뭐?”
그는 평소에 행동이 좀 느릿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기타로 속주할 때 빼고는 방금까지 마구 움직였던 손가락과 연결된 손과 팔, 어깨 근육같지 않게 모든 몸의 부분들을 무척이나 느리게 움직였다. 그리고 온화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잘 한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그러기도 쉽지는 않았겠지. 그는 눈 앞의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킨 다음,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왜 그렇다고 생각해?”
그는 이제까지 내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비호감의 행적들을 하나 하나 상기시켜주었다. 친해지려고 해도 자꾸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못 들은 척 하고(그는 저번에 내가 못들은 척 한 것조차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_-;;), 모리스 집에 있으라니까 다음 날 사라진 것까지 예로 들었다. 그 말들을 하면서 그의 입가에는 조금 자포자기의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거 전부 네 오해야. 설명하게 해줄래?”
그러자 그는 맨 처음에 니노의 호스텔에서 마주쳤을 때도 넌 날 아는 척 하지 않고 지나쳐 가려고 했다면서, 그때부터 이미 자신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맥주를 하나 더 시켰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나는 그에게 방금 네가 한 말들은 어리석은 생각이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나는 그가 가진 증거들과 정 반대의 것들을 이미 잔뜩 가지고 있었다. 내가 너를 싫어했으면 모리스의 집에 갔을까?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버스킹을 했을까? 심지어 이번에도 밴드를 짜려고 했을까? 떠올려 봐라, 모리스의 집에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자주 말을 했는지. 심지어 얘기가 재미있어서 저녁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얘기한 적도 많지 않았는가. 네가 잊어버린 모양인데 니노의 호스텔에 있을 때도 우리는 새벽 네 시까지 얘기하곤 했었다. 기억나지 않느냐. 싫어하는 사람과 그렇게 엮이려고 하는 얼간이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걸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순간 어딘가 덫에 빠지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임스였다. 그가 그렇게 얘기했던 것은 제주도의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당시에 그가 왜 나를 따라 제주에 왔는지, 왜 이렇게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지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아홉시쯤 게스트하우스의 벙커침대를 차지했다. 그는 2층으로 갔고, 나는 1층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가 내려오더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오늘을 끝으로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도대체 왜냐고 하니, 그가 말했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계속 쫓아다니는 것에 지쳤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무슨 수법이 아니었나 싶은데…. 아무튼 그 말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즉각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너랑 있으면 즐겁고, 시간이 잘 가고, 기타등등의 변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나는 내가 어떤 어리석은 반응으로 그를 즐겁게 했는 지 간신히 알아차렸었다.
나는 눈 앞의 로빈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 수법이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나? 같은 함정에 빠질 리 없다고 자신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