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려. 네 표정과 말과 행동이 다 따로 따로 노니까.
과거가 문제다.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해졌다. 내가 과거가 전혀 없었다면, 과거의 실패가 없었다면, 과거의 가슴 아픈 기억이 없었다면, 모든 것은 더 심플했겠지. 하지만 내 기억들은 전부 우울한 흑색으로 채워졌다. 시작은 찬란한 태양빛임이 분명했던 기억들은,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빛을 잃다 못해 어둡게 새로 채색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고쳐지는 일 없이, 어둡게 채색된 채로 내 안에 기억되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 부당한 면도 있었다. 모든 인간들과의 연결이 그렇듯, 마지막에 더러운 기분을 안겨줬다고 해서 그 전의 모든 밝은 추억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었을텐데, 그러나 나는 그렇게 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엉망이었다.
그리고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고 싶었다. 즉, 취하고 싶었다.
아마 그는 변명을 원했을 테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시나리오 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현재 너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게 생각하고 있다(특히 기타와 작곡 실력을), 그러나 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다, 여기 오기 직전에, 그러니까 네가 저번에 짐작해냈던 대로 어이없는 실연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홧김에 왔다, 그리고 더이상 연애는 안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날 꼬셔 봤자 넌 소득이 없을 테니까 그런 얄랑한 수법은 그만 사용하기를 거두고 다른 표적을 물색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을 자신이 없다. 더군다나 상대도 이런 말을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널 싫어하는 건 아니고 흥미가 없는 것도 아닌데, 연애할 기분은 아니다. 네 잘못은 아니고 내 잘못이다. 아무리 사실 그대로라지만 이런 표현을 변명이 아닌 사실 그대로 믿어줄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승낙은 아니지만 여지를 줄 테니 더 밀어 붙여봐라’라는 메시지를 내포한 밀당 스킬로 여겨지기라도 하면 다행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제 맘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 혹은 상대 감정 갖고 노는 사람(음… 이 부분은 조금 찔리는 구석도 있군)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한동안 말없이 맥주만 붓다가 나는 말했다.
“네 착각이야. 하지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냥 그 집에 있어. 난 널 싫어하지 않아. 곧 공연하는 데 헛 생각은 그만하고.”
반쯤 비운 맥주를 내려놓은 다음 나는 팔짱을 끼고서 나름 멋진 척을 하면서 말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혀가 좀 꼬였다. (*이 모든 대화는 영어입니다.)그러나 로빈 역시 허세를 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아냐, 넌 나를 피하려고 들잖아.’라고 말한 뒤 덧붙였다.
“잊었어? 난 사람들 표정 잘 읽는다고.”
“알았어. 마음대로 해.”
설득해도 의미가 없다. 나가더라도 연습만 제대로 하면 아쉬울 것 없잖아. 뭘 그렇게 파고드는 거지? 다소 짜증이 난 나는 남아있는 맥주를 들이킨 다음 거칠게 일어섰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게, 용량 이상의 알콜을 들이부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나는 폼없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비척거리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몇 분 지나, 나는 그곳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술에 약한 편이라서 그다지 마시지 않았는데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아마 자정 정도 되었을 거다. 내가 앉은 버스정류장의 벤치는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데다 버스가 끊길 시간이라서 사람이 아예 없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전형적인 만취 술꾼이 으레 그러하듯 버티고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도 취한 채로 정류장에 앉아본 적은 없었다. 술취해서 거리에 힘없이 나도는 사람을 구경은 많이 했지만, 내가 그 입장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기에는 한국의 밤거리는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다행히 이곳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풀어져도 괜찮은, 여자가 혼자 술 취해 있다고 나잡아 잡슈라는 사인이라고 해석하는 치들이 많지 않은 거리였다. 그래서 난 방심했다.
옆에 로빈이 와서 앉았다. 아마 계산을 하고 오느라 늦었나 보다. 원래 느린 움직임이 더 느릿한 걸로 보아 이 녀석도 조금은 취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있다가 내 앞에 무릎을 접고 앉더니 말을 걸었다.
“진짜로, 내가 모리스 집에서 나가도 상관없어? 괜찮겠어? 자주 못 보게 되어도 아무렇지 않겠어?”
“….”
도대체 무슨 말을 원하는 건가. 나는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용을 썼다. 이딴 얄팍한 수작에 걸릴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아니, 이런 생각을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나란 인간은 뻔해졌는지도 모른다.
“너무 헷갈린단 말야. 표정하고 말하고 따로 놀잖아. 상관없는 사람이 이런 얼굴을 하나.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거야? 상관없는 사람이 짜증 내면서 그렇게 뛰쳐나가나?”
가슴 한 켠이 뜨끔해졌다. 그래, 잊고 있었는데 로빈은 사람 표정을, 아니 왜인지는 모르지만 내 표정을 이제까지 100%의 확률로 읽어냈었지.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 지 모르겠어. 그냥 속 시원하게 진실을 얘기해 주면 안 돼?”
“난 진실을 얘기하고 있어. 네가 믿고 싶지 않은 거겠지.”
“말장난 하지 말고.”
말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로빈, 난 취했어. 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취한 사람에게서 뭔가 듣는다고 해서 그게 어떤 증명이나 증거성이 있게 되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여기서 술 좀 깨고 모리스 집에 갈 테니까 내버려 둬. 먼저 가라고. 가!”
마지막 말은 거의 고함이었다. 뭐, 술주정뱅이의 전형적인 패턴이긴 하지.
그는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알겠다고, 먼저 가겠다고 하면서 버스정류장을 떠났다.
간신히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술 때문에 세상이 돌고 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인적이 드문 조지아의 거리, 내 나라에서 약 7천 킬로미터는 떨어진 도시의 음울하고 조금 추운 거리에서 맥주에 취한 채로 혼자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처량한 기분이라니. 택시와 자가용 몇이 내 앞에 놓여진 이차선 도로를 굉음을 내면서 몇 번 지나갔고, 그 다음에는 정적이었다. 나는 정확히 이런 상태에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스무 살, 아니면 스물 한 살.
그때도 버스정류장이었다. 지금처럼 만취한 채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건 아니었고, 마침 그 옆에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혜민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날이라고 기억되는데, 술에 너무 취해서 전화를 한 나머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그녀가 전화를 받아들었을 때, ‘여보세요’라고 얘기했을 때의 쨍하면서도 차가운 질감만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열두 시를 몇 분 넘긴 시각이었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지만 밤 12시에 전화하라고 했다. 그 목소리가 떨리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나는, 심각한 바보였다. 있지도 않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 속의 호감의 편린을 찾으면서, 나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쌍방이었으면 좋겠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헷갈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때 했던 말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로빈이 내게 한 말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헷갈려. 네 표정과 말과 행동이 다 따로 따로 노니까. 도대체 네 진심이 뭐야? 왜 날 가지고 노는 거야? 아니면, 넌 아무런 의도가 없고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건가? 나에 대한 마음을 숨기고 관심이 없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왜 드는 건지 모르겠어. 그건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게도 책임이 있어. No라고 말하면서 왜 Yes라는 표정을 짓느냔 말야.
그건 정말, 혼자만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넌 정말로 모종의 이유로, 마치 지금의 나 같은 이유로 진심을 숨기고 있었던 거니.
아니, 도저히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같은 말이 오갔을 지언정. 내가 혜민의 표정에서 발견한 나에 대한 호감은, 내 착각이었을 거다. 로빈의 경우는 착각이 아니다. 그가 어떤 감정을, 호감에 한없이 가까운 표정을 나에게서 발견했다면, 본인인 내가 인정하는데 그건 사실이다.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도망쳤지만, 그것이 그의 음악 실력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그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것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그에게 감정이 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호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질리도록 뻔하고 벗어나기 힘든 중력을 가진 감정을 나는 순순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별이 다가오기 전에 이별부터 본다. 그런 한심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깨닫고 보니 눈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엉망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계기는 잠수이별자이긴 하다. 하지만 이 슬픔은 그에게서 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마음을 다해서,사력을 다해서 진심을 전했는데도 상대에게 중요하게 취급받기는 커녕 악랄한 도구로 사용되어졌던 과거의 쓸쓸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혜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곧이 곧대로, 하다못해 동정심이라도 베푸는 게 아니라 그저 위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턱짓으로 노예를 부리는 것처럼, 하찮은 것을 발견한 것처럼, 귀찮은 먼지를 검은 색 옷에서 아무렇게나 떨쳐내는 것처럼.
그저 내가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그렇게 했다.
정말 바보같은 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버스정류장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나는 여전히 조금도 내 지시를 정확히 받을 생각이 없는 뭉툭한 신경을 움직여, 그러니까 느릿하고 취한 것이 분명한 움직임으로 버스정류장의 벤치에 양 손을 대고 힘을 줘서 일어났다. 모리스의 집에서 그리 멀진 않지만 걸어서 그곳에 돌아갈 체력이 없었다. 니노의 호스텔로 돌아갈까, 아니면 모리스의 집까지 택시라도 타야 할까,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삼 사 미터 정도 떨어진 어둑한 벽에 로빈이 기대선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