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웠고, 고마웠고, 의아했다.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다려줬다. 술에 취한 나를 혼자 두고 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심술궂게 생각했다. 어차피 같은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기다린 거겠지, 라고.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고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로빈은 눈이 마주쳤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뭐지? 이대로 쟤를 지나쳐서 가면 되는 건가?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여태 집이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내 뒤에 있었던 이유가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혼자 술을 깨기 위해서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아마 웃어 보였던 것 같다.
“왜 안 갔어?”
“….”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팔짱을 풀지도 않았으며, 기댄 벽에서 등을 떼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약간 겁에 질려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로빈, 이리 와. 돌아가자.”
느릿하게, 술주정뱅이의 전형적인 톤으로 그를 밝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그는 여러 번 얻어맞은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주저하는 것처럼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본 다음 내가 오라고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기다려줬다는 점에 반갑고 고마워서 벌써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잊어버린 나와 달리, 그는 내가 가버리라고 고함쳤던 것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멋쩍음을 별로 느끼지도 못했다. 안 올 거면 말아라,라고 생각하며 나는 혼자 택시를 잡았다. 그러나 택시가 서자 그가 와서 택시 문을 열고 날 부축하는 등 시중을 들었다. 모리스의 집은 택시들이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삼거리 앞에 있었기 때문에, 택시는 모리스 집 앞이 아니라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로 불안정한 나에게 걸린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난 택시 기사와 뭣 때문인지 몰라도 싸우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왜 모리스 집 앞까지 가주지 않는가?’라는 식의 별 쓰잘데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로빈이 있어서 망정이지. 그는 택시기사도 달래도 나도 달래어 간신히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사실 이 동네에서 택시기사와 싸움을 거는 것은 별로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서비스업이니까 짜증나도 참아야지’하는 착한 마인드로 일하지 않는다. 열 받으면 정규직도 바로 때려치는데 손님이 날 열받게 하는 상황에서 참을 사람들이 아니다. 점잖게 달래고 체면이고 이런 것보다는 내 감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튼 술에 덜 취해 있고 현명한 해결책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끼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모리스의 집 안으로 들어가고 로빈이 가져다 준 물컵을 비운 다음에야 나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넌 참 복잡한 애야.”
로빈은 반은 질렸다는 듯, 반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변명할 말이 없었고, 남은 기운을 엉뚱한 사람에게 논쟁을 표방한 시비를 거느라 썼기 때문에 대꾸할 의지도 없었다. 나는 반쯤 남은 물컵을 쥔 채로 로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인간이라면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너도 어딘가 비틀려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왜 안 보이는 거야?
——
우리가 공연하러 간 곳은 예상과는 좀 달랐다. 나는 리버티 스퀘어 메인 거리에 즐비한, 잘 정돈되고 웨이터들이 끊임없이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오픈 바에서 공연하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섭외된 곳은 그런 곳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바였다. 뭐, 하긴 우리가 얼굴로 보나 선곡 스타일로 보나 나이 좀 있는 중후한 늙은이들 취향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내가 꿈꾸던 젊잖은 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큰 건수를 노리는 건 무리겠지. 뭐,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괜찮은 건수이기도 하고.
하지만 연주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호감이 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상한 경향성이 있다. 진지한 갤러리가 있고 음악적인 수준이 높은 장소인 경우 페이가 그다지 세지 않고, 그저 음악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청중이 있는 곳의 페이가 오히려 두둑하다는 것은 아직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 중 하나다. 아무튼 우리는 1층에 위치한 카페 앞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참 뒤에 관리인 내지는 지배인인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로빈이 거리에서 연주할 때 몇 번 봤다면서 반갑게 그와 인사하고는, 모리스와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기분이 나빠졌다. 이 남자도 로빈의 팬이라서 이 건수를 승낙한 거다. 로빈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이 음악하는 입장으로써 배가 아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에게도 저런 팬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연주할 장소는 비밀 바였다. 그러니까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초대받거나 멤버인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비밀의 장소가 그 카페 뒤쪽에 있었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가보니, 천장까지의 길이가 3미터 정도 되는 듯한 벽의 한쪽을 옆으로 밀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니 무슨 방공호도 아니고. 계단은 방공호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멤버쉽 손님을 받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양 쪽에 커다란 그림과 조명이 달려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단은 지나칠 정도로 길었다. 지하로 2층 정도 높이를 내려가자 간신히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무대가 있었다. 무대라고 하기엔 관중과 그다지 높이 차이가 없었고, 사람들은 음악에 집중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른쪽에는 넓은 바가 있어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음료나 술을 시키고 앉아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고급 소재의 소파가 몇 개씩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그곳에 널부러져 있었다.
무대에는 이미 공연자가 있었다. 우리와 달리 2인조로, 기타 한 명은 반주를, 나머지 한 명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실력은 좋았다. 손님들은 제각각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소파에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을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손님들의 옷차림은 평소 내가 리버티 스퀘어의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대충 짐작하자면, 이 바는 아마 이곳에서 그래도 알아주는 집안의 돈 좀 있는 자제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음악에 집중하지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 그다지 금수저 축에 들지 못했던 내가 이런 곳의 생태를 잘 알리는 만무하지만, 대략적인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배경이 있어서 이런 곳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사람들이 있고, 힘이 있는 척 하지만 사실은 영업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는 될지언정, 진지하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기는 힘든 자리였다.
공연은 한 시간 조금 넘었다. 한국에서 버스킹 할 때는 멘트 반 공연 반이었는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이 주구장창 연주만 하면 되니까 그 점에서는 나름 편했다. 우리는 적어놓았던 리스트 중에서 무엇을 할지를 정한 뒤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 몇 초간 이쪽을 바라봐주는 사람도 있었고, 아는 곡이 나오면 박수를 치면서 호응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연을 마무리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몇 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본인은 어디서 공연하는데 관심 있으면 나중에 연습하러 오라는 사람도 있었고, 마자니시빌리에 본인의 스튜디오가 있는데 관심있으면 들르라는 사람도 있었다.
보통 공연을 끝내면 나는 그 자리에 있고 싶어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공연 끝났으면 빨리 빨리 사라져서, 청중이 우리 밴드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 벌써 사라졌네. 말 붙여보고 싶었는데. 라는 아쉬움을 주고 싶다. 그러나 우리 베이스와 기타는 나와는 좀 달랐다. 특히 기타의 로빈은 누군가가 술을 권하자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아마시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리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난 먼저 갈게’라고 고한 뒤, 벽 한쪽에 놓아두었던 피아노를 짊어지고는 긴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