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내 숙박료를 왜 네가 내니

by 위키별출신
30.jpg



비밀 계단을 오르고 숨겨진 벽장을 통과하여 카페 1층에 도달하니, 도망치고 싶었던 생각은 이제 옅어져 있었다.

페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공연 경험을 주는 장소임에는 분명했다. 내가 공연하는 것을 주의깊게 보거나, 좋아하는 곡을 연주한다는 점에 반가워하거나, 안 그런척 몰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거나 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한국의 공연이 그리웠다. 이곳에서는 둘 중 하나다. 중국인이라고 생각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아니면 중국인이라고 생각해서 내 실력을 평가절하하거나. 게다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돈은 받을 지언정 사실상 청중이 없는 공연을 한 점도 우울한 기분을 부채질했다.


물론 도피성 여행을 와서 버스킹을 하다가 무려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들어가 공연을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고 자평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는 기질이 있다. 그리고 이번 공연을 물질적인 면을 빼놓고 평가하자면, 의미 따위 없었다. 내 음악에 공명해 주는 사람도, 그렇다고 로빈이나 모리스의 것에 공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들은 음악하는 사람들을 초청하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철저하게 음악에 무관심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사실은 혼자였던 것 같은 기분.


이런 기분인 채로 모리스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단에 걸터앉은 채로 호스텔에 있는 여자아이중 하나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열 시 정도 됐으니까, 호스텔에서도 한참 흥미있는 사건이 생길 만한 시간인 것이다. 오늘 공연까지 모리스의 집에 있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이제 슬슬 호스텔에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됐건 공연을 막 끝낸 공연자가 그 공연장 근처를 맴도는 것은 높은 확률로 누군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날 여러 가지 상념 때문에 카페 1층에 앉아 있었던 나에게 (해당 카페는 지하의 비밀 바만 운영하고 폐점이라 사람이 없었다) 말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말을 붙였던 것은 레반이라는 기타리스트였고, 그 다음에는 루스타빌리 근처에서 공연하는 스모키 화장이 짙은 릴리라는 보컬 겸 기타였다. 거리를 다니면서 그녀의 공연을 조금 봤었는데 데쓰메탈 계열이라 내 취향은 아니라서 박수만 조금 쳐 주고 지나갔었다. 그 다음에는 누구였더라…? 아무튼, 피아노 메고 공연장 앞에 앉아 있는 동양인 여자란 그냥 지나치기에 좀 아쉬운 존재인 모양이었다. 약 이십 분 정도밖에 안 앉아 있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을 붙였다. 피곤할 정도로.


장소가 안 좋은 가 싶어(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중앙에 있는 카페였다) 피아노를 들춰메고 호스텔 쪽으로 가려다가 웬 여인이 나를 붙잡고 본인 남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해서 거기에도 붙잡히기도 했다. 호스텔에 가겠다는 결심과 달리 가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런, 나를 붙잡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갯수가 너무 많다 보니, 나는 뭔가 인간이 아닌,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가 내가 그곳을 떠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추측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만에 돌아온 호스텔에 니노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리아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랫만에 돌아와 보니 호스텔이 잔뜩 바뀌어 있었다. 높은 천장에 섬세한 문양이 아름다웠던 커다란 돔형의 거실은 앞쪽은 나무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뒤쪽은 하얀 벽이었는데, 무슨 생각인지 니노가 거기에 온갖 색깔의 물감을 칠해놓았다. 시각적인 재능이 없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면 모두의 눈에 잔인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증명을 몸소 한 것 같았다. 마리아라는 훌륭한 그림쟁이가 있는데 왜 니노가 그 난리를 혼자 저지르고 해낸 것인지 지금도 미스테리다. 아무튼 그렇게 어지러워진, 정갈한 분위기를 잃어버린 거실에서 마리아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호스텔 손님인 것이 분명한 두세 명이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마리아는 날 보자마자 십년 만에 만난 가족이라도 찾은 것처럼 반가워했다. “도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한 다음 내 오른쪽 뺨에 진하게 키스를 남기고는 살며시 껴안아주었다.


나는 모리스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방금 공연을 끝내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로빈의 이름이 빠질 수가 없었는데, 그 이름을 듣자 마리아는 ‘니노와 로빈이 한바탕 했다’고 전했다. 늦게 내라는 호의에 응했을 뿐인데 숙박비 떼 먹은 사람으로 몰린 로빈이 니노와 무난하게 마무리를 지었을 리가 없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로빈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외였다.


마리아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니노는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경계성장애 같은 게 아니었나 싶은데, 혼자 소설을 쓰다 못해 나와 로빈이 편을 짜고 본인을 엿먹이기 위해 이같은 일을 벌였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로빈을 만나서 로빈 욕에 내 욕도 믹스를 한 듯. 거기까지 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니노의 입장에서-그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옳다는 것은 아니고-생각해 보자면 로빈이 사라진 다음 나도 사라졌고 쌍으로 숙박비를 안 내고 없어졌으니, 둘 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다. 물론 현실은 그가 있지도 않은 사실로 사람을 욕하며 길길이 날뛰니 감당하기 힘들고 꼴도 보기 싫어서 나간 거지만. 그러나, 그가 로빈에게 제시한 이론은 자못 인종차별적이었다. 그래서 열받은 로빈이 니노와 싸웠음은 물론, 그같은 욕을 먹은 나를 편들기 위해 본인 것은 물론 내 숙박비까지 다 내고 갔다고 마리아는 말했다.


그런 얘긴 없었는데…?


나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함께 붙어 있었던 로빈이 ‘네 숙박료 내가 냈다’라는 말을 꺼냈는데 내가 못 들은 순간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없었다. 도대체 언제 얘기하려고 그랬지? 얘기 안 한 상태에서 내가 그가 이미 내 숙박료를 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이 호스텔에 돌아와 니노에게 숙박료를 주면, 니노 혼자 내 숙박료*2 라는 이익을 챙기게 되지 않는가.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얘기를 하면 좋았을 것을. 널 위해 돈썼다는 말을 하기 싫었나?


아무튼, 마리아는 그래서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했던 돈이 주머니에 들어오긴 했지만, 상황이 완료된 다음 자신이 동경하던 기타리스트가 이제 더 이상 자신과 말을 섞어주지 않을 거라는 현실에 절망한 것이 분명한 니노가 호스텔을 내버려두고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확실히 니노는 내가 이 호스텔에 머무르는 기간 내내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었다. 그가 저녁 시간에 호스텔을 비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는 이곳을 책임지는 게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굴었었다.


어찌됐건, 그가 절망한 덕분에 나는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마리아를 니노의 찜찜한 시선에서 자유로운 채로 독점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마리아는 그동안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들을 설명해주었고, 내가 없는 동안 완성한 그녀의 그림도 보여주었다. 파란색과 검은색이 많이 들어간 배경에 여자의 얼굴 반쪽부터 허리까지가 들어가 있는,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인물화였는데 음울한 분위기가 뚜렷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29. 술꾼 다룰 줄 아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