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정소감>, 샛노랗게 어여쁜 문장들이 가득한.
<다정소감>
김혼비
안온북스
2021년 10월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귀엽고 재미있고 짠하고 똑똑하고 발랄하고 그 모든 걸 다 하는 책. 그중에 제일인 것은 다정이라.
들어 보기만 들어봤지, 김혼비를 읽은 적은 없었다.
뭐랄까, 너무 신나 보였다. 첫 책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나. 여자들만 모여 무언가를 한다는 이야기라는 점은 끌렸지만, '쾌활하게 공을 차다가 왁자지껄 맥주를 마시고 헤어진다'라는 류의 호탕함은 내가 책이라는 매체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목만 들어도 피로가 몰려왔다는 얘기다.
그런 첫인상으로, 앞으로도 만나지 않을 것 같았던 김혼비의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느냐 하면, 실수였다.
도서관 앱에서 다른 도서를 예약하려다가 <다정소감>을 잘못 체크한 거였고, 그걸 알았을 땐 다음날이었으며, 도서관 앱에서 취소를 하기 전에 벌써 예약 도서가 도착했다는 카카오톡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부지런한 이전 대출자분이 예정 반납일보다 매우 앞서 반납을 한 덕에 <다정소감>은 이미 내 이름이 입력된 예약 도서 책장에 들어앉아 있던 거였다.
그리하여 (내 기준) 지나치게 신나 보이고, 지나치게 쾌활해 보이는 김혼비의 산문집을 읽게 된 거였다. 이왕 빌린 거 피로함을 견디며 절반이라도 읽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웬걸, 재미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일단 작가 또한 여름을 힘들어하고 겨울을 그리워한다는 것부터가 합격(?!). 일상에서, 세상에서 마주하는 작고 큰 일에 대한 김혼비의 생각에 구절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생각에 공감하고, 다른 방향으로 뻗은 시각을 배우고, 취향에 웃고, 다짐을 따라가다 보니 벌써 에필로그였다. 정말, 재미있는 독서였다.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시련> <축구와 집주인>…… 아, 다 좋았다. 꼭지 두 개 정도를 꼽아 보려고 했지만 실패다. 밖에서 읽다가 '웃참'에 실패한 부분도, 눈앞이 흐려진 부분도 모두 좋아서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이렇게 쓰지? 부러워!'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작가는 <다정소감>을 내고 한 인터뷰에서 “B급 느낌이 묻어나는 A급 문장을 쓰고 싶다”라고 했는데, 그 바람은 이미 이룬 것 같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문장들 틈에 세상을 향한 섬세하면서 대쪽같은 시선이 콕콕 박혀 있는데, 그런 문장을 쓰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쉽게 쓴 것 같은 문장이 사실은 가장 어렵게 쓴 문장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되새겼다.
존재를 토닥이고 다정을 다짐하는, 샛노랗게 어여쁜 문장들이 가득했던 <다정소감>이었다.
'좋은 구두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류의 말 보따리에 '손가락 잘못 놀린 실수가 좋은 책을 물어다 준다'라는 말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좋은 구두 어쩌구' 이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소비 심리를 허황하게 자극해 구두 좀 팔아보려는 장삿속 수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자매품: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 →에 대한 나의 생각: 웃기고 있네])
아, 우연의 기쁨이여.
중년, 단체, 패키지여행,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빚어내는 어떤 편견. '여행부심'과 '예술부심'이 이중으로 빚어내는 어떤 오만. 거기에는 후세대에 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를 생활 밀착적으로 관람하는 문화를 경험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예술에 관심을 갖고 취향이라는 걸 만들어가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며, 지금처럼 여행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여행을 가기까지 거쳐야 하는 복잡한 절차들이 쌓은 심리적 장벽을 패키지여행의 형태로 넘어보려는 세대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중년 안에서도 경험치와 감수성이 천차만별일 거라는 고려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미술관에 가는 건 '경험'을 쌓는 걸로 봐주지만, 그래서 당장은 지루해하고 별 감흥을 느끼지도 못해도 그런 경험들 끝에 돌아올 '무언가'를 기다려주지만 5, 60대 중년이, 이제 와서, 떼를 지어,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는 건, 단지 패키지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으니 별생각 없이, 유명하다고 하니까, 그 앞에서 사진이나 찍고 싶어서,라고 쉽게 단정 지었다. 그들에게는 쌓을 '경험'도 미래의 '무언가'도 없을 거라는 듯이.
(27-28쪽,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 중에서)
수전 브라운밀러와 영지 선생님의 말은, 마음대로 누구를 때리라는 뜻이 아니다. 폭력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문명의 선을 지키며 살되, 저 선을 넘어버린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 공포와 억압에 가로막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말라는 뜻이다. 은희는 왜 맞서 싸우려 생각하지 못했을까? 또 나는 그전까지 왜 맞서 싸울 생각도 못 한 걸까? 큰소리 내면 안 돼, 때리면 안 돼, 싸움은 나빠, 여자가 나대고 과격하면 못 써, 여자는 어차피 지게 되어 있어, 같은 것들만 잔뜩 배우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만 도가 트느라, 고함치고 때리고 맞는 원초적 싸움에서 나를 주체로 놓아보지 못한 것이다.
하다못해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일 하나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친구 H를 보고 알았다. 살면서 누구에게 고함 한번 쳐본 적 없는 순하디순한 H는 미국 유학 시절 타고 가던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지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 저만치 뭍에 있는 사람에게 “Help me!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좀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까스로 마지막 말을 쥐어짜서 “Would you mind…… helping me?(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살려주시겠어요?)”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한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말이다! 상대방이 위급함을 눈치챘기에 망정이지 ‘우쥬마인드'가 정말 마지막 말이 될 뻔했던, 하마터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을 뻔한 이 이야기는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중략) 축구를 시작하기 한참 전에는 나 역시 고함에 익숙지 않아 두려웠다. 위기의 순간에 공포와 억압을 이기고 소리 지를 수 있을까?
(49-50쪽, <축구와 집주인> 중에서)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거센 돌풍이 방 전체를 흔들어대길 바란다.
(75-76쪽,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중에서)
T와 서재를 합친 7년 전만 해도 철학서가 가득 꽂혀 있는 T의 책장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기호와 기표들의 저장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그 300여 권의 책들이 한꺼번에 생생히 살아나 나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집에 있는 그 모든 책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갔을 때 얼씬대지 않던 코너의 책들이 내가 읽을 책들로 바뀌면서 인생이 급격하게 유한해졌다. 이 책들은 저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품고 있을까. 이 중 몇 퍼센트나 읽을 수 있을까. 마트롱의 책을 몇 번이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에 가능한 한 오래도록, 꼿꼿하게 머물고 싶어졌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눈을 보호하며 나를 잘 돌보고 싶어졌다. 어떤 좋은 책들은 사람을 오래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114쪽, <책으로 인생이 바뀐다는 것>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