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Mickey 17, 2025)
* <미키 17>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팬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딱히 영화 팬을 자임하지 않는 대중들에게 봉준호는 '사회적인 감독'인 듯하다. <살인의 추억(2003)>이나 <괴물(2006)>, <설국열차(2013)> 에서도 사회 비판과 같은 단어가 주된 해석이긴 했으나 역시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냈다고 평가받으며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2019)>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봉준호는 동시에, "영화는 메시지를 담는 도구가 아니다."라는 발언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무리 옳다고 생각되는 사상이나 메시지를 본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으로 영화를 사용하는 데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봉준호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도, 그의 영화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인간 봉준호 씨가 가진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한 평가이다. 그보다 감독 봉준호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얻고자, 빼앗긴 것을 돌려받고자, 혹은 단순히 빼앗고자 달려드는 사람의 에너지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에너지의 충돌이나 뒤섞임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에너지의 현상적 역학에 집중하는 연출과 함께 이어지는 여러 특징들이 있다. 이를테면 영화 안에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직접석인 선악의 판단은 불필요하다는 듯 유보되는 특징인 일종의 비도덕성이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사회의 합의된 규칙보다는 서사 내에서 개인들이 근본적으로 지지하고자 하는 개별적인 윤리와 실천을 지지하며 진행될 뿐, '일반'이라는 모호한 기준에서 선악을 판별해 징벌하거거나 단죄할 목적이 없다. 봉준호의 영화는 흔히 관객에게 '그래서 누가 나쁜가요?' 하고 묻는 질문으로 읽히는데, 이 역시 비도덕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기택이 나쁜가, 동익이 나쁜가 하는 누리꾼의 토론이 이루어졌던 <기생충(2019)>의 경우가 그렇다.
두 번째 특징은 조망적인 관점이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은 쉽게 현미경을 들이대고 핀셋으로 교정하는 이미지를 상기시키지만, 그의 명작들은 오히려 원경에서 사회를 관조하는 태도에 가깝다. 한 내화면 안에서의 상승과 하강, 심도 등으로 씬을 연출하는 섬세함이나 폐부를 찌르는 대사와 같은 봉준호의 시그니처 역시 사건이나 인물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파악할 때 비로소 강렬하게 와닿도록 설정되어 있다. 하나는 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아래에 있다, 그 관계를 파악하게 해 무형의 위치 에너지를 감각하게 만드는 식이다. 그리하여 그의 디테일은 변태적인 지엽성이 아니라 더 멀리서 프레임 내 구석구석을 바라보라는 요구가 된다.
그러나 봉준호의 소위 '미국 영화'들은 한국에서 만들어져 명작으로 평가받는 필모그래피와는 다른 경향성을 보인다. <옥자>, <설국열차>, <미키 17>에서 확실히 봉준호는 태세를 바꾸고 있다. 여기서의 인물들은 납작하다 평해도 좋을 정도로 선악의 카테고리라이징이 확실하다. 악역을 변명하는 부차적 서사도, 선역이 왜 선역인지 설명하는 장면도 없이 인물의 선함 혹은 악함은 어떤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아주 상징적으로 존재한다. 선역과 악역이 정해져 있고 선역이 세계의 악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는 전세계인에게 익숙한 권선징악의 우화적 플롯일 것이다.
봉준호의 이런 '두 번째 갈래'의 영화들은 또한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역학을 배제하고, 그보다는 주인공 한 명의 감정과 목적, 동기, 행위만을 물고 늘어진다. 이때 영화는 주인공에게 심리적으로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있고, <기생충> 등의 기존 봉준호 영화들과 반대된다. 그동안의 작품들이 숲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탑 위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식이었다면, <미키 17>과 같은 영화들은 오직 미키 단 한 명만을 주시하며 그의 입장이 곧 영화의 입장으로 삼는다.
작가주의적 시각은 영화감독의 개성이 필모그래피 안에 통일적으로 존재하되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에 초점을 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독 하나의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한 영화라고 해도, 그것들을 하나의 연장선 안에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 명의 손을 거쳤는데도 의도나 연출 방향이 아예 다른 두 개의 갈래가 존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갈래 안에서 평가한다면 그 영화나 해당 갈래를 더 흥미롭고 유효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문득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유명한 두 이름을 가진 작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명작들로 자리잡은 그의 어둡고 날카롭고 전율적인 세계 대신, 모호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느슨한 제2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더 재미있게 즐겨 볼 수는 없을까. 미키 17과 미키 18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는데도 같은 미키인 것처럼 너무 다른 이 영화들은 모두 봉준호에게서 출발했다. 하지만 <기생충>과 <미키 17>은 당연하고 아주 마땅히, 다른 창작물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공평히 대하자고 말하고 싶다.
(<기생충> 계열을 갈래 1, <미키 17>과 같은 영화를 갈래 2로 부르겠다)
최근 개봉한 <미키 17> 역시 봉준호의 또다른 갈래에 속하는 영화이다. 앞서 서술한 것과 유사하게 <미키 17>은 독점적인 미키의 오리지널리티만을 구심점으로 작동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주인공과 고정된 세계의 구조 자체는 <옥자>, <설국열차>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미키는 나샤처럼 선하면서도 용감해질 수 있고, 티모처럼 오직 이익만을 동력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고, 일파처럼 욕망을 파괴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다. 미키 외의 인물은 인물이라기보다는 미키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한 요소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 노골적이고 어떤 가치관을 대신하며 미키가 속한 우화적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러 인물들이 사건을 일으키고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갈래 1의 영화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미키만이 유효한 행동하는 갈래 2와 같은 영화의 경우에서는 긴장감이나 관객의 효과적인 몰입을 보조할 트릭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를 위해 <미키 17>이 채택하는 방식은 마취와 각성이다. 미키가 반복되는 죽음마저도 체념한 영화 초중반부, 관객은 미키가 인간 실험체가 되어 고문당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비상식적인 이야기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파편적 정보들, 암울한 미키의 처지와는 동떨어진 서정적인 음악, 군데군데 섞이는 미키의 익살맞은 자조는 모두 관객으로 하여금 미키라는 인간의 핵을 느낄 수 없도록 마취시킨다. (이는 봉준호가 갈래 1에서 자주 사용한 원경 조망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미키가 17번째 죽음을 가까스로 피하고 죽음을 저항하는 순간, 미키와 관객은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각성하기 시작한다. 미키는 정해진 죽음을 거부하고, 관객들 역시 죽는 것이 직업인 미키가 계속 살아나가기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봉준호의 세계는 치밀하거나 느슨하게 모두 잔인했다. 계층의 사다리를 악착같이 기어오르던 기정을 죽이고, 실종된 딸은 돌아오지 않고, 멸망한 세계에서나마 평등을 바랐던 커티스의 넋을 모조리 빼 버렸던 봉준호는 아마도 자신 스스로에게만 진실된 정의를 위해 죽고 죽이는 사람들을 생생히 체감했고, 따라서 좌절될 수밖에 없는 약자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를 거쳐 <미키 17>은 어떤 결말에 이르러 정지되었나.
엿보인 것은 뜻밖의 망설임이다. <미키 17>의 마무리에는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 해피엔딩 직전의 악몽과 같이,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미키의 대사는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불안스럽다. 미키 1, 미키 2...... 그리고 미키 17, 미키 18이 아닌 단 하나의 미키 반스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짐처럼 원만하지는 않을 것임을 우리 모두 예감하기 때문일까. 폭탄을 매달고도 크리퍼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미키는 25년전 남의 강아지를 안고 아파트 복도를 내달리던 어떤 사람과 닮아 있다. 선하지만 결코 성인은 아니며 유별난 신념을 관철시킬 능력도 모자란 주제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봉준호의 뷰파인더 앞에 서 있지 않나. 8번째 봉준호는 현남이 당도했던 현실과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유치한 몽상 속을 고민하며 불안과 희망을 모두 긍정해 본다.
+ 2025.04.01
누구는 다중우주를 펼쳐보고 희망을 얻고
누구는 수많은 나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용기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