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1 : F와 T에 대한 단상①

by Abysskit

0.


머릿속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잡아온 이야기이자

맨날 하는 얘기의 연장이자..

주변의 고통받는 친구들을 위한 정리이다.




1.


F vs T는 개인적으로 오래된 고민거리다. 그시절 다과님의 심리를 들이파던 때부터 나에게 'T'함은 늘 연구의 대상이었다. 얘는 대체 뭐길래 T 아닌 것 같은데 T를 달고있는걸까..?


적당히 '감정형'과 '사고형'정도의 워딩으로는 충분히 묘사되지 않는 어떤 생생한 분기점이 있다고 느껴졌다. 다만 그게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누구나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메커니즘과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포인트들이 함께 존재할텐데, 그런 맹탕같은 설명만 가지고 사람의 주요한 유형을 지정할 수 있을리가 없다. 누군가 F가 70퍼센트라고 해서 매번 7:3 비율로 섞인 멘탈용액을 만들어 경화해낸다는 게 아니잖아. 7/10의 확률로 F한 것도 아닐테고, 70%의 보편성을 지닌 주제나 상황에서 감정적이란 것도 아닐테고..


이건 역시나 임상적인 통계를 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애매함이다. 그 때문에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방면으로 묻고, 또 들어왔다. T들을 마주치면 항상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직접 얻어낸 데이터들을 꾸준히 축적해왔다.




2.


사람을 파헤칠 때 핵심적인 접근의 길은 언제나 단순한 나침반을 따른다. 모든 종류의 행동원리란 곧 '무엇이 안전한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개인이 현재 내놓은 답안지라는 점이다. 그 사람의 시야는 자신이 거쳐온 경험에 따라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짧은 시야로 조명한 '가장 문제없는 해소의 공간'의 성격이 곧 MBTI 유형 중 하나로 표현되는 거였다.



그래서, '무엇이 안전한가?'



3.


관찰 끝에 잠정 요약하자면, T는 곧 '외면'의 발현 요소였다.


응, 아니야! 상관없어!


더 정확히는 자아의 나약한 부분에 대한 외면이고, 고통과 불안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계산에서 빠뜨리려는 방어기제에 그 본질이 있다. 두려움의 원천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야만 안전함이 주어진다고 믿고 모든 자원운용을 탈출루트 모색에 돌린다. 따라서 이들이 만끽하는 삶은 내부의 유약함이 전혀 건드려지지 않는 두꺼운 벽을 전제로 한다.

마음에도 촉각 비슷한 게 있다면, T는 통각에 대한 대비를 위해 완충재를 미리 둘둘 감아 둔화시켜 놓는 작업과 같다. 그래서 이들은 무언가를 쉽사리 느끼려 들지 않는다. 싱그러움이나 애틋함처럼 강렬한 감정적 자극 뿐만 아니라 작은 동요감, 행복의 전이 등의 가벼운 충격조차 무의식적인 벽을 넘어들지 못하도록 완강하게 저지해낸다. 즉 'T'는 생존에 위협이 될 법한 모든 싹을 미리 다 잘라낸다.

그렇기 때문에 T들은 거리낄 게 별로 없다. 직설적일 수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 당연히 서로가 안전할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본론을 바로 던져 생산성에 올인할 수 있다. 오히려 상대방의 컴플렉스를 파악하고 피해야하는 상황에 놓일 경우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약함에 대해 외면한 채로 약함에 대해 가늠해야 하는 모순처럼 다가올 것이다. 이로 인해 T가 배워야 한다는 '사회성'은 본능적이지 않아 난이도가 높다. 결국 일종의 규칙이나 요령처럼 단편적으로만 'F함'을 이해하게 되는 게 T가 가진 한계이다.


이러한 외면의 기전이 자칫 악순환을 유발하기도 한다. 유약함에 대한 편향성이 극단적으로 고착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벽은 굳은살이 아니기 때문에, 뒤에 숨은 내부의 자아는 여전히 말랑말랑한 채로 남아있다. 쏟아져 들어오는 감정적 자극을 막기 위해 'T'의 벽은 더욱 높아지고, 높은 벽 뒤의 자아는 감정에 대한 적당한 대처방법을 배우지 못해 더더욱 취약한 채로 남겨진다.


어찌보면 회피하는 자의 말로가 결국엔 감정을 다룰 때에도 똑같다는 셈인 것이다.



4.


이에 반해 F는 '감내함'이 되겠다.


봐봐, 아프고, 아름다워.


마찬가지로 좀 더 풀어내자면 '겪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에 가깝다.

말이 복잡할 뿐, F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충돌과 손상은 자연스럽고도 지배적인 법칙이니까. 아픔이 느껴진다는 건 자명한 상처의 신호이자 치유를 위한 약이 필요한거지, '아니? 난 안아파~ 나는 시간을 되감아 상처를 없던 일로 한다!' 라는 스탠스를 취하려 들지 않는다는 얘기와도 같다.

기쁨도 슬픔도 전부 다 삶의 일부로서 역할을 가진다. 그렇기에 고통받을 때엔 빠른 해결보다는 충분히 견뎌낼 힘을 더 필요로 한다.


쉽게 도망칠만한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와닿게 느껴지는 행복이란 'F'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이다. 쨍하게 아플 수도, 자비 없이 차가울 수도 있는 여러 위험요소들 사이에서 포근 폭닥한 따듯함이 맞닿는 감각이란 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포함해서 마음에 다채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는 것도 'F'의 전형이다. 미식적 취향이란 섬세함의 끝에서 발현되는 전유물이다.

다만 고통의 강대한 당위성 앞에 무력하기 때문에 더 발버둥치게 되는 것도 'F'함의 본질이다. 감정적인 발산은 필연적으로 서러움을 동반하는데, 이 서러움이란 게 곧 통제능력 너머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는 것과도 같다. 서러움은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 크게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운명의 상대를 보내며 새나오는 상실감과 엄습해오는 단절감부터, 작게는 너무너무 먹고싶었던 핫도그집이 바로 오늘부터 문을 닫는 소식까지 넓게 포진되어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든 감정적 데미지를 너끈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F'한 유형은 무력함에 가장 취약하다. 개인의 내구도를 넘는 잉여분의 고통은 댐처럼 주변으로 방류되어 감정의 수위를 유지하게 돕는데, 때론 이런 분산의 과정이 사람을 공격적이고, 추하게 만들기도 쉽다. 언제나 줄줄 새는 불평의 수원지, 픽픽 새나오는 분노의 덩어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추레해지기 쉽다. F는 쿨할 수 없다. 눌러 쌓아둔 찌질함의 자취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며 많은 애를 써야한다.

이것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는 땅이 곧 F가 느끼는 안전함이다.

그렇기에 F가 굴러갈 때엔 사람 사이의 원활한 관계유지를 필수적으로 요한다.



5.


위 설명이 전형적으로 어딘가 남성적, 어딘가 여성적인 묘사라고 느껴진다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마 사회적 + 생물학적 유인 덕분에 그렇게 배치되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튼튼하게 타고났을수록 T의 부담이 적고, 섬세함에 익숙할수록 F의 부담이 적을테니까. 사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후에 서술한 극단적 발현 부분이 좀 더 성별적 스테레오타입에 일치한다는 게 자연스럽다.


혹시 근미래에 젠더를 초월한 세상에서는 T-F 비율 따라 연애시장이 마련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6.


하지만 T도 F도 겨우 반쪽에 불과하다.


서로간의 병용 없이 단일한 메커니즘만으로 구성될 경우 감정 운용에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 한평생 외면만으로, 순응만으로 살아낼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인생의 전 구간에서 예외 없는 삶의 방식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속세를 떠나 산에 들어가서 살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대부분의 대립항에 해당하는 얘기지만, 본디 극단성이란 좁은 시야가 전제되는 환경의 부산물이다. 그렇기에 미숙한 성장기 시절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엔 충분히 단일한 T, 단일한 F만 가지고도 살아낼 수 있겠다. 아이들이 얼마나 멋모르고도 잔인할 수 있는지, 또 정도를 넘어 몰입할 수 있는지를 보면 한번씩 놀라기 쉽다. 성인의 눈으론 그 편향성을 도저히 좇아갈 수 없다. 두 눈을 다 뜬 이상 반쪽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러한 수준의 삶만을 구성하고자 끝끝내 성숙하길 거부한 사람의 전유물이라고도, 이 '단일성'을 요약할 수 있겠다. 특히 T-F의 스펙트럼은 두려움을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 편차가 더더욱 도드라진다. 이들은 삶이 아주 쉽고 풍족했거나, 발달 현황이 미성년자 수준이거나, 아니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벽 너머 반대편으로 자연스러운 눈길 한번 줄 일이 없다는 건 양가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발밑이 행복한 낙원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벽 너머에 끔찍한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사실은 모를 리가 없다. 거부한다고 고개를 돌려놓아도 몰락의 예감은 정직하다. 벌써 등줄기를 타고 올라올 준비를 마쳐놓은 지 오래였다. 틀어막아놓은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어렴풋한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극단의 말로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벽이 무덤자리로 남는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때를 놓쳐 고치를 찢고 나오지 못한, 우화의 반대편에는 어떤 결말이 예비되어 있을까?



그게 궁금했던 나는 동일한 잣대를 그대로 집어넣고 반대편 끝을 관찰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