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냄에 대하여

2022.02.28

by Abysskit

단절감 후에 오는 닿아있음의 달콤함.

잔뜩 늘여놓은 고무줄처럼, 압력에서 해방된 폭발은 강렬하고 화려하지 않을까.

또 고요하지 않을까?




나는 삶이란 단절감의 의의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탄생으로서 우리는 연결된 모체와 끊어짐을 느끼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라는 울타리가 갖추어진다. 그 순간에 우리는 잃어버려서는 안될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다. '삶'이다. '자신'이다. '나'라는 개념에 속하는 물리적인 제한이 생기기 때문에, 마주하는 모든 경험들은 바깥의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 나뉘어 구별되어버린다. 현재의 물리적 상태로 배열된 '나'의 영역을 인식하고 유지하는 게 제 일의 원칙이 된다. 소유권이다. 잃어버릴 수 있기에 소중하다. 그 지점부터 상실의 고통과 그로부터의 안도라는 대비가 생긴다.


닿아있음은 안정적이다. 잃어버릴 '나'가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다. 빈 화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나야! 하는 것보다, 텅 빈 화면의 픽셀 하나 하나가 다 '나'의 일부이자 전부인 연결체인 게 더 거대하며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지우게 된 이유는 뭘까.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부여받은 죄인들이라도 되는걸까?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거리로 위안할 뿐이고..?




조심스럽지만, 나는 이 모든 걸 일종의 궁극적인 미학으로서 이해하고 싶다. 단절이라는 제약을 정해놓았기에 그 너머의 통합감이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의도적인 어긋냄이다.

모두 연결된 하나기에 나아감도 퇴보함도 없을 절대적인 안정 속에서, 생명의 탄생과 똑같이, 첫 단절감이 규정됨으로서 비로소 불균형적인 가치가 부여된다. 단절의 심화와 통합의 회복을 기준으로 첫 잣대가 생긴다. 동그라미가 있기에 안과 밖이 처음 생기고, 커다람과 작음이 생긴다. 좋은 것, 나쁜 것을 지정할 수 있기에 간절함이 생긴다. 이 모든게 다 구별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으로서 '나'를 잃는 게 편안하고, 달콤하고, 무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단절을 넘어서는 극단적인 통합감을 느끼는 순간에,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던 '나'를 내려놓고 모두 중의 하나로 돌아간다는 건 아마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할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탈출구로서 이해하는 생각 또한 삶의 고통에 짓눌리는 이들에겐 무척이나 합리적이다. 피로한 하루 후에 꿀잠으로 빠지는 순간처럼, 다 놓아버리는건 보상처럼 느껴지겠지.


다만.. 죽음 후에는 그럼?

그 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이른 죽음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해할까..?


절대적 안정이 기본 상태인 세계에선 어긋남만큼 특별한 게 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실의 고통이 있기에 현재의 맞닿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고 또 재회의 행복함을 꿈꿀 수 있는거라면, 고통이 없는 안정 속의 세상에선 행복 또한 아무런 가치도 느낌도 없을 것이다. 옛 시절의 자신을 기억이 아닌 타인의 이야기로만 인식할 수 있는 아쉴다처럼, '나'일 수 없기에 무덤덤할 것 같다. 또는 감각을 그리워하는 유령처럼, 작은 어긋남이라도 느껴보고싶어서 고통마저 선망의 대상으로 갈망하게 될 것 같다. 힘들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세계. 소유도 침범도 없는 세계. 자유롭지만 자유의 의미 또한 없는 세계.

내가 인식하는 죽음은 그렇다. 분명 실제로는 한 차원 높은 감각이겠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슬픔과 행복마저 산 자들의 전유물일 것이다. 동그라미를 전부 지워 모두와 하나가 된 후에, 이 곳에 동그라미의 흔적이 있었지.. 하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산 자들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삶의 본질은 불균형이다. 필연적으로 고통스럽다. 소유권이 주어졌기에 상실이 고통스럽고, 고통을 이겨내기에 행복하다. 영겁의 안정 속에서 주어진 흔치 않은 불균형의 기회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결국 삶의 모든 아픔이 소중하다.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에 여행의 고생이 의미있어지는 것처럼, 또 좋은 여행이란 게 익숙한 집을 떠나 온전히 모든 낯섦을 즐기고 오래오래 기억하는 과정인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단절을 가능한 한 전부 감내하고 이겨내서 극상의 통합감을 맛보는 게 모두가 목표로 할 최고의 삶이라고 감히 정의할 수 있다.


'나'로서 삶을 온전히 누리고 원래의 하나로 돌아와 단절감이 찬찬히 녹아가는 순간에, '나'와 '모두'의 경계에 서서 우리는 포근해하고 행복해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명 먼저 떠난 모두가 편안하게 쉬고있음을 안다. 적어도 살아있는 나의 이해로 비견할만한 개념 안에선 '휴식'으로밖에 빗댈 게 없다. 삶의 단말로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잃어버린 모두와 다시 맞닿게 될 것이고, 멀어져있음이 생생할수록 재회의 행복도 커다랄 것이다.


그래서 상실에 슬퍼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당신의 '돌아감'에 기뻐하고, 그간의 당신의 여행길을 돌아보면서.. 동그라미 안에 속한 단절자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가까이 '너'와 닿아있으려고 남기는 모든 과정이 애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자취에 대해 온전히 기억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 특별히 여기는 행위 또한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래서 나도 슬퍼하고, 기뻐하고, 기억하기로 했다.

할아버지 안녕히가세요. 니니도 안녕.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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