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1 : F와 T에 대한 단상②

F와 T의 극단

by Abysskit

7.


T의 극단은 자아로부터의 유리로 발현된다.


마치 게임 캐릭터와 분리된 플레이어처럼, 자신은 아무런 현실적인 데미지를 받지 않는다는 안전한 위치가 당연해지는 것이다. '아니 고작 저거 말했다고 대체 왜 저렇게 화를 내는거야..?' 잘라내고 툭툭 털면 편안해지는 상황일텐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T들이 가진 공감능력의 부재는 여기가 핵심이다. 이들의 시선은 철저히 경험없는 외부자로서의 평론에 그치며, 현재 대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장애요소에 대해서 적절하게 가늠하지 못한다. 요컨대 '잘 알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다.

결국 T들은 부정확하고도 원론적으로 올바른 (= 굴곡없는 평면에서 최단거리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이 결과가 무례함이며, 사회성의 부재이며, 곧 해결만을 추종하는 듯한 성향으로 타인에게 비치게 된다. 악의 없이 제시한 해결책에 상대방이 분노하는 것을 보며 'T'들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편안함을 제공해준다는데 대체 왜 지랄이지..


그러나 자아로부터 유리되어있다는 상태는 아이러니하게 새로운 고통을 창출한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T들은 끝없는 공허함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자극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누구의 존재도 집중력을 소모할 만큼 가치있지 않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현생은 무의미하다. 회의감이 엄습한다. 아무것도 와닿게 느껴지지 않도록 둘둘 말아놓은 덕에 외부와의 모든 접촉은 전부 다 관념적으로만 흐리게 이해된다.


환경이 풍족할 때엔 이 공허감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벽 너머로 슬쩍 보이는 외부는 언제나 위험이 끊이지 않으니 시끌시끌하고 피곤하다. 이 무던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왜 편안한 지 언제나 확인받을 수 있다. 그러니 마음껏 몰이해를 영위하더라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다.

다만 T의 핵심 무기는 결국 외면이며, 잘라냄이다. 잘라내고 잘라내다가 더 이상 잘라버릴 수 없는 자신의 팔다리 정도만 남았을 때, 그제야 벽 너머에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단 사실을, 문 없이 갇혀버린 자기의 처지를 마주보게 된다. 여기가 공허함이 솟는 우물 바닥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안에 자기 혼자 갇혀 질식해버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여기서의 공허함은 비유가 아닌 실질적인 위협이다. 감각의 주체로서 삶을 지속할 이유조차 흐려지게 해버리는 극도의 유리감이다. 예민한 자아의 방어를 위해 T를 활용해야 했던 이들은 혼자 남겨졌을 때 하나같이 같은 모양으로 괴사될 위기에 놓였다. 두려움이 느껴지면 더욱 두텁게 벽으로 자아를 둘러싸버리는 방어기제만 정착된 탓이다. 당장 외부의 무언가라도 느껴져야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데, 높게 쌓아놓은 벽을 뚫고 넘나들 수 있을 강도의 자극은 자신에게 얼마 남아있지 않다. 이때 T들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되찾기 위해 보통은 물리적 고통까지 다다르게 된다. 운동이나 자해같은 신체의 혹사. 아니면 중독 쪽이거나. 또는 종교적, 과학적 의존과 같은 신봉 체계의 성립같은 거. 뭐가 됐든지 간에 별 의미가 없는 나의 존재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찾는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극 T'들의 본래 심성은 보통보다 훨씬 예민하고 나약하다. 타인의 존재감이 너무 과도하기 때문에 이 악물고 외면하는 습관이 자리잡았을 뿐인 것이다.



8.


반대로 F의 극단은 고착된 무능력함처럼 드러난다.


우크라이나에 종이학을 접어 보내는 행위로 대표할 수 있겠다. 가만보니 여기에 할당된 유일한 의미는 고통을 가장 아름답게 영위하고자 하는 존엄성의 자극이다. 바꿔 말하면 문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 모색은 후순위에,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를 간접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승화욕구는 우선순위에 둔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이는 대부분 해결에 대한 의지를 잃고 피상적인 궁여지책에만 머무른 결과물이다. 당연히 이 길 위에만 있다간 감상적이며 비합리적인 자극에 우선적으로 안주하게 된다. 오로지 포장하는 능력만 늘어난다.

이게 문제가 되는 지점은 해결이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도, 그 확률에 힘을 보탠다는 유의미한 선택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공포에 비추어 상대의 극복과정까지 불가하다고 지레 전제해버리는 부분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의 편향성을 근거로 들어 상대에게 무력함을 함부로 전가시켜 버린다.



극 F의 고민상담을 들어주기 어려운 이유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정말 모든 튜닝이 자신이 겪고 있는 무력함의 무게를 분산하고자 하는 시도에만 맞춰져 있다.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얼마나 아프길래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지를 알아주기 바란다. 압도적인 존재감의 공포와 그 앞에 선 자신이 느낄 무력감의 크기를 이해해 주는 대화를 원한다. 거꾸로 해결의 단서를 모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오히려 거부감을 주게 되는데, 이는 F가 무력함을 타파할 수 없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하잔 말은 사지로 내몰리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극F들은 무력함을 마음껏 표출하고 수습받을 수 있는 안전한 자리를 마련하는 데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따라서 이들은 1) 해결해야 할 법한 충돌상황을 거의 안 만들 수 있으며 2) 인정과 애정, 위로와 이해를 쉽게쉽게 얻을 수 있고 3) 해결능력을 모의하는 것보다 포장능력을 활용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을만한 공간을 형성해나간다. 그렇지 않고 돌파에 대한 가능성을 다루며 불화를 야기하는 개인은 피해버리거나 철저히 배척하려 든다.

또는 위의 안전한 조건을 가지고있는 희생양을 찾아내려 무던히도 애쓴다. 그리고는 마치 자존감의 배터리처럼 상대의 호의를 착취하거나, 상대적인 우월감을 얻어내 자신의 무력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허세를 부린다. 무력함의 극복에 대한 해결능력은 여전히 없기 때문에, 희생양이 착취에서 벗어나면 더욱 쉬운 먹잇감을 노리려는 경향성이 있다. 대체로 더 어리고 미숙한 상대를 향해 간다. 정 없으면 모성에 기대기도 한다.


끊임없이 구석에 몰려 이것조차 여의치 않은 경우에 결국 극F는 그간 쌓인 서러움이 폭발해버리는 것이다. 비난과 원망 등의 날 선 반응이 새나오며 자신의 안전한 공간을 우선 사수하는 것이 무의식적인 방어법으로 자리한다. 상처받은 자신에 대한 연민과 오래 적립된 막막함이 끝없이 순환한다. 자기가 얼마나 두려웠고, 그럼에도 얼마나 애썼는 지를 곱씹을수록 서러움은 배가 된다. 공격성엔 어렵지 않게 더욱 불이 지펴진다.

이때 극F의 마음속에선 상대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아주 당연한 그림으로 자리한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더이상 대처와 피해보상의 메커니즘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향이 극단적으로 자리하면 단어와 표현 하나에 모든 트리거가 다 눌려버리는 아주 지랄맞은 성격이 완성된다. 고통당할뻔한 공포를 장작 삼아서 활활활, 감정은 잘도 탄다.



이처럼 극T와 다르게 극F의 폐단은 대체로 무능력함을 어줍잖게 무마하려는 시도로 귀결된다. 위의 모든 단계가 실질적인 문제 해결로 귀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은 타인의 힘을 빌려야만 생존이 보장된다는 극단적 결점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높은 확률로 독립적인 자아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심지어는 해결능력의 부재상태는 그대로 둔 채로, T스러움을 표방하는 걸로 스스로를 포장하려 드는 허세도 유서깊게 횡행하고 있으니 말 다했지.. T도 패션이 되는 세상이다.



9.


이렇게 극단에 내몰린 F / T는 각자의 방향으로 발버둥치는 모습이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벽은 점점 좁혀오는데 안전한 곳이 남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폐소공포증이 발발하는 탓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피었다한들 두 기전의 뿌리는 결국 동일하다. 인간 본연이 마주한 심리적 고통과 공포,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자아의 유약함이 바로 그것이다.

본질적으로 T와 F는 그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처방전과 같다. 다만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내몰려있었기 때문에 진단의 명민함에 관계없이 당장의 결정을 강요받아왔을 뿐이다. 선택지는 단순하다:


이 고통을 무시하고 이겨낼 것인가, 받아들이고 적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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