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지만 F와 T는 당신 선택보단 결과물에 가깝다.
아쉽게도 삶의 전장은 여유를 넉넉히 주지 않으며
무엇이 됐든 손에 우선 쥐어진 것이 가장 바쁘게 휘둘러져왔기 때문이다.
당신을 T와 F로 벼려낸 당신의 삶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환경적, 생물학적 요인들이 자연스레 섞인 집합체이다. 아마 대부분 그 중에서 가장 튼튼하고 안정적인 무기가 주로 손에 잡혔을 것이다.
- 가령 어린 시절부터 신체적으로 월등하고 또래들과 경쟁에서 잦은 승리를 통해 유리한 고지를 쟁취하며 자란 아이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나약함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지 않거나, 혹 생기더라도 '극복 대상' 정도에 머무를 것이다. 이해보다 승리가 더욱 쉽기 때문이다.
- 반대로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또래 사이에서의 인정을 통해 자존감을 크게 획득한 아이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타인의 관심과 시선을 독차지하려는 방향으로 행동 유인이 자리잡힐 것이다. 안전함은 외부에서 주어지니 자신의 나약함을 실제로 이겨내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이 필요없다. 오직 그럴듯하게 보이는 데에 치중하기 쉽다.
누구든지 간에 보다 쉬운 선택지를 향해서 자연스레 발이 옮겨졌고 그에 맞춰 손을 휘두르며 자라왔을 뿐이다. 타고난 환경을 선택할 기회 같은 그런 모순적인 전능함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의식이 자리잡힌 이후 매 순간 개인은 오로지 자신의 시야 내에서 좀 더 편안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이것이 F도, T도 발달유인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이다.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피로함으로부터 도망 아닌 도망을 치도록 배우면서, '가장 문제없는 해소의 공간'으로 향하도록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그냥 그런 방향으로 빚어졌을 뿐이다.
11.
다만 한 쪽의 유인만 너무 오래, 너무 과다했을 때에 편향성은 행동반경의 경계로 변질되어버린다.
이는 대부분의 극단성이 지니는 본질이자 정석적인 폐해 양상이다. 내가 속한 지금 여기, 이 곳 바깥 너머가 안전할 가능성에 대한 신뢰는 점차 떨어진다. 삶은 단편화된다. 예외 시의 대처 능력 또한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유인이 곧 규율이 되는 과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미지란 안전함의 반의어로만 자리하게 되는 이유도 위와 동일하다. 구속은 곧 안전함이 된다.
예외가 들이닥칠 때마다 '쏠린 F'는, '쏠린T'는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F하게, 더욱 T하게 자신을 보호하려 든다. 평생을 F하도록 길들여진 나의 삶이 고통받지 않고 T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럼 내가 너무 가엽잖아. T하게 자라온 나는 T의 안전함만을 믿기 때문에 F는 약점의 노출이자 실패의 지름길이 되어버린다. 그럼 너무 한심하잖아.
양극성은 더더욱 심화되고 유연함은 그에 비례해 상실된다. 이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사선 너머의 가능성을 탐험해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아진다. 아쉽게도 그럴만한 크기의 용감함이란 범인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 자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는 우물 안에 갇혀 질식하는 동안에조차 손에 쥔 이 T는, 이 F는 오롯한 동아줄이다. 누구도 제 손으로 쉬이 생명줄을 끊을 수는 없다. 설사 이 너머에 구원이 없다 하더라도 발밑의 한줌 땅마저 포기하는 일은 맨정신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크게 잃을 게 뻔한 도박을 대체 누가 한다는 말인가, 벼랑 끝에 몰렸다고 해서 절벽 너머로 뛰어내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로 다가오지는 않을텐데.
'그럼 무엇이 안전한가?'
그제야 더는 답할 수 없는 분기점에 도달한 것이다.
12.
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는 것을.
삶의 어느 변곡점에 다다를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본연에 내재된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성장과 노화는 전략의 변화를 자극하고 때로는 지금껏 상정해온 안전함의 지위가 서로 역전된다. '연약함'의 무게중심이 옮겨져가는 탓이다. 예를 들어,
- 풍족하고 튼튼한 '젊은 T'의 입장에서는 맘에 들지 않는 너를 잘라내는 행위에 부담이 적다. 니가 품고있는 가능성이 별달리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 애착 때문에 짐덩이를 떼어내지 않는 타인을 비합리적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다. 나라면 안 그럴테니까!
그러나 수많은 실패와 손절 끝에 혼자 내몰려 고독한 '늙은 T'도 너를 애착없이 냉정하게 내칠 수 있냐하면, 글쎄..
- 순진하고 감성적인 '젊은 F'의 입장에서 인간관계에 배신당한 나는 영화 주인공에 몰입해 쓰린 마음을 달랜다. 내쳐진 내가 너무도 가엾지만 인류애와 믿음이란 그래도 나를 지탱하는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고작 한번의 넘어짐으로 불신에 빠지는 타인을 보고 한심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나라면 안 그럴테니까!
그러나 수많은 기만과 배신을 겪어 피로해진 '늙은 F'도 사람 거르는 눈이 안 생겼냐 한다면, 글쎄..
나의 시작점이 T였든 F였든 상관없다.
반쪽짜리만을 고집하며 살아가기에 인생은 녹록지 않고 전체 그림을 알아야만 편안해지는 시기가 반드시 도래한다. 그것이 연인과의 관계든, 부모자식과의 관계든, 상실에 대한 대처든, 실패에 대한 대처든, 이는 인생의 커다란 사건들을 겪어가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다. 애착이란 연약해진 후에는 거부하기가 쉽지 않고 상실이란 도망친다고 되돌려지는 게 아니다. 단일한 모양의 자아와 영원히 유지되는 단편성이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짤막한 진통효과는 줄 수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변수의 반쪽을 배제하고서 삶의 방정식을 완성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단일성의 한계가 임박할 때 그간 눈돌려왔던 내 반대편 끝자락은 더이상 먼 곳에 있지 않다. 내쳐왔던 가능성이 시야 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니 끝까지 힘주어 눈을 감고 살 게 아니라면, 평생 벼랑 끝에 매달려 살다 죽을 자신이 없다면, 우리는 F한, T한 상대방을 언젠가는 이해해야만 하는 셈이다. 그 과정의 가장 깊은 곳에 유기된 자신의 나약함을 똑바로 마주봐야만 하는 거대한 시련이 예정되어있다. 삶의 환경으로 인해 분기되었던 T와 F는 반환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드디어 다음 질문 한가지로 합쳐져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사선에 떠밀린 이들이 보이는 아주 당연한 반응이다.
정말로 꼭 연약함을 마주해야만 하는걸까?
13.
즉, 두려움 너머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
분명 우리는 벼랑 끝에 몰리지 않더라도 두려움에 대해 궁금해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 벼랑 끝에 몰리지 않으면 바깥을 궁금해할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단일함을 벗어날 수 있도록 쉽게 주어진 환경 또한 부유함의 일종이며, 작은 실패와 해결을 지속적으로 모색해본 경험이란 축복인 셈이다. 괜히 너른 인성을 보고 삶의 수준이 짐작된다는 말이 있는게 아니다. 탐구라는 행위는 피상적인 작용 반작용 너머의 교양을 영위할수 있는 만큼의 심적 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누구도 단순히 두려워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바쁘디 바쁜 삶에서 깊이 이해할 필요라는 건 사치처럼 다가왔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단단히 마음을 걸어 잠근다. 차라리 먼 행복을, 막연한 자유를 깎아내리는 것이 낯설고도 명확한 심연을 마주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실패의 무게가 절대적일 때, 어쩔 수 없다는 건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면죄부이다. 다시 T만으로, F만으로 삶을 구성하기 위해 출구 근처를 다시 공구리쳐 막아둔다. 여기는 문이 아닌 벽이야. 그러면 다시 또 벽을 딛고 익숙한 고통으로 빠져들 준비가 된다.
이제 나를 조금 더 지탱하는 것은 바깥에 대한 두려움이다. 단일한 나 정도까지는 최소한 건질 수 있다.
그럼에도 환경과 재능, 행운과 기회의 어떠한 유인이 맞아 딱 한발짝을 내딛을 기회가 생겼다면, 주저하느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깨져버린 벽의 틈에 머리를 쑤욱 넣어본다면.. 이러한 용기의 비합리성만큼이나 말도안되는 원리 위에 세워진 평화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너머에 그간 찾아왔던 해답이 있음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분명 기존에 익숙했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을 하찮은 일들 투성이다. 그런데 혐오스러운 것들이 득실거릴 것만 같았던 심연 너머에도 문명이란게 있었다니!
그리고 그렇게 열린 세계를 계속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우리는 간단히 성숙함이라고 부른다.
서투르더라도 상관없다. 닫지 않으려는 용기가 중요하다. 미지를 가늠하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익숙한 세계 너머에서 발견한 단서에 쓰임새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은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다. 모두에게 예정된 '연약함'이 발발했을 때, 그 하나 하나가 대비를 위한 재고가 되어 차곡차곡 자리잡힌다. 대처 범위가 늘어난다. F에서 시작한 나도 점차 명쾌한 해결의 의의를 배우고, T에서 시작한 나도 어느새 진득한 감내함의 범위를 익힌다.
이러한 이유로 성숙한 사람은 친절하고도 전략적일 수 있다. 내가 틀릴 가능성이 편안하다면, 다시말해 심적으로 안전한 자리를 마련해놨다면 다양한 인간군상이란 그저 단서 채집의 보고가 된다. 이는 결국 예외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으로도 이어진다. 자기 통제 하에 유연하게 F해질 수도, T해질 수도 있다면 자연스레 나의 감정상태란 더욱 자유롭고도 안전하다.
그 끝에 이르러 F와 T는 서로 대립하는 원리로 남는 게 아닌, 합치된 스펙트럼의 이해 내로 편입되는 것이다. 즉, F-T의 '통합상태'와 '단절상태'라는 한 차원 더 높은 기준점으로 잣대는 재구성된다. 대립항 둘을 조율하는 것이, 명확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현재 나의 각 비율을 가늠하는 것이 조금 더 편안하다는 믿음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게 된다.
두려움 너머에는 보류된 평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14.
언젠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T남친의 F여친 적응기'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요약하면 T스러운 접근법을 조율해 F한 상대를 달래주는 과정을 '유미의 세포들'처럼 서술해놓은 글이다. F의 트리거를 피하는 동시에 T스럽게 직선 거리로 결론내고픈 욕구를 눌러놓는 의식의 흐름을 귀엽게 담아냈다. 본인도 힘들 때 F의 위로를 받는 게 효과적이고 소중하다고 마무리하는 건 덤이다. 묘사가 귀엽고 스탠스가 건강하니 한번씩은 다들 찾아보기를 권장한다. 거기 달린 볼품없는 댓글과 그에 대한 작성자의 현명한 대댓글까지가 완벽한 한 세트를 구성한다. 통합감을 획득해 안정적인 사람과 단절을 유지하느라 불안이 자극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지 적나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게 가장 모범적인 조율의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편향성을 인지한 채로 상대의 편향성을 존중하는 대화방식이다. 'T인 나에게는 사실 jot도 신경쓰이지 않는 요소들이지만, 그것이 너에게 두려울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윤곽을 더듬어나가겠다'라는 노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이 F한 상대방에게 얼마만큼의 안정감을 주게되는지까지 캐치해낼 수 있다면 관계의 유지는 별로 어렵지 않다.
만약 반대로 F 여친이 T남친에 적응하는 과정을 서술하게 된다면, 아마 'F인 나에게는 분명 불안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있지만, 너는 투명하고 담백한 성격이니 의도의 무해함을 최대한 신뢰하고 편안하게 얘기하겠다' 정도를 핵심으로 잡아야 하겠다. 마찬가지로 T한 상대방에게 얼마만큼의 편안함을 줄 수 있는지까지 도달한다면 소통의 문제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성숙함도 사실 그래서 줄이면 별 거 없다.
서로간의 소통도 별 거 없다.
그저 자신이 삶에서 빼놓았던 변수가 무엇인 지를 이제야 이해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15.
한참 돌아왔지만, T와 F의 스펙트럼은 두려움에 대해 일차적으로 대처하는 메커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누구든지 완전한 원을 그려본 후에야만 빈틈없고 안전해질 수 있다.
T/F로 시작했지만 어찌보면 모든 극단의 기저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원리일지도 모른다.
하기사 모든 성장은 극단을 먼저 딛고 깨어나가야하는 과정이다. 힘들 수밖에..
그러니 자신과 자신, 또는 자신과 타인의 T - F 사이에서 꾸준히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슬슬 눈돌리지 않고 나와 너를 온전히 보아야 할 때가 왔을 지 모른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조금만 더 용기내본다면 좋을텐데.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너무 패닉하지도 말고.. 다 알고 나면 정말 훨씬 낫다.
다만 오래 쌓인 공포라는 것은 다소간의 권유 정도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란 것 또한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히 안전한 땅과 아주 사소한 뒤틀림이다. 때로는 준비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꿈꾸자. 언젠가는 자유로울 당신의 모습을 멀찍이서, 천천히 그려보는 것이다.
- 시간이 한참 지났고 당신은 많이 자랐으니 벽 밖의 세상도 생각보다 편안해졌을 수 있다. 안믿기겠지만 고개 좀 빼꼼 내밀어봐도 이제 안 죽는다. 그러니 전쟁통처럼 살지 않는 법을 배워야할 때일 지 모른다. 안전한 자리에서 소박한 감각들을 느껴볼 기회가 다시 왔다면, 용기를 내서 붙잡았으면 좋겠다. 다소 나약하더라도 훨씬 평화로운 삶일 것이다. 그것도 당신이 바라는 모양보다도 더 많이 행복하게.
- 경험이 많이 쌓였고 당신은 많이 자랐으니 무력함을 걷어내고 한번쯤은 치밀하게 준비해서 두드려 패보라. 안믿기겠지만 가만히만 있으면 전부 죽는다. 그러니 행복할 자리를 마련하는 법을 배워야할 때일 지 모른다. 치열함은 꾸밈 없이도 아름답고, 굳은살은 거품처럼 터져버리지 않는다. 나약해보일 것 같지만 훨씬 평화로운 삶일 것이다. 그것도 당신이 바라는 모양보다도 더 많이 행복하게.
'무엇이 안전한가?'
아마 직접 두드려보기 전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