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꽃밭이면 얻어맞는 경험은 필요하다
14.
생각의 덩어리가 끝맺어진 지점은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였다.
전통적으로 양키센스는 결점에 대한 경계보다 창의적 자유도에 대한 집착이 한참 높았을 때 생긴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 나름의 멋이 또 있겠지만, 통일성을 깨고서 동떨어진 도드라짐이 주는 불쾌함이란게 한번씩 있다. 저것도 좀 그랬다.
오로지 경계 너머로 뻗어나가기만 하려는 시도에 매몰되어 보편적인 아름다움에서 탈출해버리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이면 온갖 PC한 연출들이 제법 매력적으로 보여 얼핏 이해가 가지만, 고개를 딱 한번만 흔들고 다시 보면 저게 진짜 맞나..? 싶은 jot토피아가 한번씩 쾅쾅 때려박힌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다른 먼 발치의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몽롱하게 연결되어갔다.
-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감시자(watchmen)는 누가 감시(watch)하는가?
이는 본래 더 거대한 목적 하에 합의된 권력이 고삐를 잃고 풀려나지 않도록, 한계 없이 일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관리자의 힘을 경계하는 어구이다. 닿을 일 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리찍는 통제력의 행사란 감시자의 '쉬움'과 피감시인의 '어려움'이 조합되어있다. 편안함을 희생하고 의도적으로 난이도의 불균형을 유지하는 체제인 것이다. 추가적인 경계장치 없이는 권력의 오용과 변질이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쉽게 휘두를 수 있는 힘 앞에 개인이 쉽게 저항할 수 있을거란 가정은 비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면죄부의 죄는 누가 선고하는가?
K-폐단의 생존자는 사회적 자원의 틈새를 찾아 횡령해내는 것이 몸에 익었다. 비슷하게, 박해의 끝에 부상한 정치적 올바름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인 것처럼 취급받기도 한다. 트렌드에 힘입어 B급 정서라는 직위를 밀어붙여 신선함의 부재를 무마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가까운 사이라는 표현이 무례함을 덮는 핑계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모든것이 일종의 변질된 권력처럼 작용한다. 즉, 불평등이란 간단히 '쉬움'으로 '어려움'을 넘으려들 때 생기는 문제들이다.
'쉬움'에 뿌리를 두어야 할 잣대가 '어려움'의 점수판을 대체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심사는 더욱 세밀해져야만 한다. 전위의 의의는 오로지 기존의 잣대가 부서지는 카타르시스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타르시스의 폭발이란 앞서서 쌓아올린 정교한 스트레스가 있어야 존재할수 있는 조건적인 기법에 해당한다. 즉 만약 새로운 시도를 위해 전통을 부수고자 한다면, 이 때는 창조성의 위대함을 뛰어넘는 수준을 지닌 파괴의 의의를 보여줘야 명확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만큼 위대할 수 있는 파괴란 사실 매우 유효범위가 좁다. 뒤샹의 <샘> 처럼 역사적인 경계를 처음 깨는 조커 카드의 등장 정도만이 진보와 파괴를 동시에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모두가 앞다투어 가전기기만 출품하려는 판은, 즉 너도 나도 관념을 부숴대는것에만 치중하는 예술계에는 결국 치워야 할 파편들밖에는 남지 않아버린다.
허나 그래서 심사는 더욱 세밀해졌나? 심판은 이미 스트레스가 쌓여있어, 해소에만 목말라있는 상태처럼 보인다. 부서지는 파편들에만 희열을 느끼는 변태들인 것처럼 보인다.
현대예술을 향한 실망감은 여기로 귀결된다.
15.
같은 맥락으로 K-아줌마들이 얌체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렵게' 지키는 시민의식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쉽게' 산다면 아줌마들은 지나가는 경쟁자 또는 약자 1에 지나지 않는다. PC가 '묻었다'는 작품들이 혹평을 받는 이유 역시 경계를 깨는 데에 매몰되어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이 경우 전통이 부서지는 순간의 의의는 오로지 답답함을 공유하는 이들을 위한 피냐타 이벤트에 불과해진다. 그 외 관객에게는 아무것도 쌓아올린 것 없이 뚜드려만 맞고 깨지는 경험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매달린 피냐타의 정체는 바로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초창기의 틱톡도, 한국화된 SNL도, 인스타 보고 남자다운 연애스킬을 따라하려는 웬 찐따들도 다 마찬가지다. '쉬움'과 '어려움'의 의의를 혼동해버리는 문제에 해당한다. 원 어구에서 '감시자'의 권력이 집단의 유지와 공존이라는 더 거대한 목적을 위해 조건적으로 제정되었듯, 난이도의 전위 또한 '어려움'에 대한 존중이 선행해야만 그 의의를 유지할 수 있다. 존중 없이 굴러가는 '쉬움'은 오로지 물귀신에 불과할 뿐이다. 모두의 안전할 자리를 조금씩 전복시켜나가는 종양처럼 자리한다.
경계를 흐릴 수 있는 것은, 우선 경계가 명확할 때 뿐이다.
무정부주의 하에서는 혁명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
<토르 라그나로크> 의 그랜드마스터가 일리가 있었다니, 세상에.
문화 발전의 최전선에서도 우리는 같은 문제를 앓고 있다.
분명 PC주의의 붐과 숏포밍은 분명 수많은 가능성을 낳고 발전시켰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메세지는 강력하다. 소외받는 이들을 스포트라이트의 중앙으로 올리거나, 업계의 진입장벽을 낮춰 입문이 '쉬워진다는' 건 당연히 사회를 더 건전하게 만드는 데에 이바지한다. '쉬움'을 마다할 단순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파괴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같은 방향성 내에서 찾을 수 없다.
그간 전통을 부순다는 명목 하에 너무도 많은 자원이 소모되었다. 실사화된 <인어공주>는 너무 많은 팬들의 가슴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닥터 후>는 칩널 체제 하에선 설정 파괴의 참신함 이상을 전달하지 못했다. 초기 '틱톡' 판은 영상 컨텐츠 제작의 높은 참여도를 참신한 요소로 민답시고 억지로 왜곡된 음악의 템포, 반복되는 엉성한 안무, 어설픈 상황설정이 합쳐진 끔찍한 몰골들이 유행했었다. 오죽하면 <Khaby Lame>, 속칭 '한심좌'처럼 그 작위적인 양태를 꼬집는 컨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정도였다.
이 뿐인가? '쉬운' 입문 이후의 재생산의 용이성과 AI 창작의 발전에 힘입어 대부분의 매체는 질적인 하락이 너그럽게 용인되고 있다. 자막에 오타가 나면 좀 어때, 빠르고 쉬운데. 기괴할 정도로 건드려진 보정 필터의 적용은 이제 그러려니..하는 범주 내에 들어가버렸다. 봤던 쇼츠 자막만 베껴 또 보고, 작위적인 콩트도 또 보고, TTS 목소리 듣던 것 또 듣고.
가진 의의와 한계가 모두 '쉬움' 의 연장선에 그쳐버린다. 이게 정말 아름다움이 맞나? 자문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난이도가 전위된 문화의 과도기에 흔히 드는 고민들이다.
16.
흥분이 한 김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자연스러운 자정의 시기가 온다.
새로움이 주는 가치가 발전욕구와 교차하는 지점이 이 즈음이다. 신기술의 파급력은 흥미가 떨어지는 시점까지 유효하기 때문이다. 새 장난감은 익숙해지기 전까지 제일 재밌다. 입체 영상 기술(필터 안경을 끼고 보는)이 유행하던 시절 '3D'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아동용 영화들은 시도 때도 없이 화면에다 뭔가를 디밀어대곤 했다. 그게 그냥 신기하고 재밌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4D'라는 타이틀을 달고 의자가 움직이거나 하는 효과를 추가한 어트랙션도 우후죽순 쏟아져나왔었다. 그러나 그런 기술적 특징들이 작품이 가져야 할 설득력을 전부 채우기는 힘들었다. 이 3D 기술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다듬어지다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출시 정도에 와서야 메인스트림으로 활용할만한 위치를 부여받았다. 여러가지 연출효과 중 공간감의 극대화 효과 하나 정도로 적당하게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AI 기술 또한 이 다듬어지는 과정이 아직 오래오래 예정되어있다. 활용 맥락에 따라 좀 다르겠으나, 아직은 문외한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심히 부자연스러워보이는 지점들이 도드라진다. 그러니 90년대의 CG를 지금와서 돌아볼 때 드는 생각처럼, 아마 2020년대 초중반 현재의 AI도 어설프거나 불쾌한 골짜기에 쏘옥 들어가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1~20년 후에 돌아보며 대체 저런 맥락없이 기괴한 연출에 왜 열광했는가를 의심하게 할 수준일 것이다.
같은 관점의 연장에서 바라보면 PC주의 또한 일종의 신기술처럼 다가온다.
우리가 현재 오류투성이인 AI를 쓰는 이유는 그것이 그저 쓸만하기 때문이며, 실리적인 편의성의 크기가 압도적이라 다소간의 미적 불쾌함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 외 의의는 별로 없다. 감추지 못하고 도드라질수록 몰입감을 해친다. 그렇다면 편의성이 업계 표준으로 갖춰진 이후의 리그에서는 당연히 충분한 자연스러움을 연마한 정도, 즉 완성도가 다시 주요한 경쟁력으로 자리잡을 게 자명하다.
PC주의의 활용도 동일한 의의를 지닌다. 궁극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쓸만하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계 홍길동은 참신한 가능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작가주의적 독창성의 난이도를 낮추고 시의성을 너그럽게 만족할 수 있다. 면죄부를 듬뿍 들고있는 극단적인 팬베이스를 모으기도 쉽고, 무엇보다 시원한 파괴는 세심한 창조보다 훨씬 묘사하기 쉽다. 걸캅스! 여자경찰 빼고는, 다 무능합니다!
이 편리함을 주요한 경쟁력 삼아 몇 번 생각없이 휘두르다보면, 붕괴를 주력으로 삼는 전개 또한 어느새 고루한 클리셰에 들어가버린다. 그럼 더 이상 터뜨릴만한 카타르시스가 남아있지 않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빌드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충동적으로 오픈한 탕후루집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실격휘슬을 듣고 머쓱해할 알렉산더 대왕처럼, 작품적 완성도란 '쉬움'이나 파괴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양성에 대한 고찰을 고작 한 시대의 유치한 유행으로만 남기고싶지 않다면, 단순한 이상적 가능성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PC주의는 과연 어떠한 부분에서 인간 사이의 정교한, '어려운' 비전까지 도달해나갈 수 있는가?
혼란과 전위는 언제나 예기된, 발전을 위한 양분에 해당한다.
다만 신시대의 도전장들에는 대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기존 업계가 부숴지지 않을거라 굳게 믿고 불편함을 풀어내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는 모양이 마치 사춘기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짊어지지 않는다면 무너진다는 사실을, 모두 그러한 책임감 아래에 귀속되어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안전함에 대한 인식이 너무 느슨하기 때문이다.
17.
바로 여기가 개지랄의 효용성이 다시 등장해줄 타이밍이다.
물리적인 경쟁과 생존의 자극 앞에 습관적인 불편함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인간은 결국 생물이다. 더 예쁘고, 더 강하고, 더 정밀하다는 것은 생존의 유리함과 뗄 수 없는 가치이다. 더 우수한 자질에 대한 선망은 당연히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질서가 전위되는 원인은 미학적 고민의 초점이 이러한 주요 원리로부터 너무 멀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비키니를 입고 외설적인 포즈를 취하는 수염난 뚱보 아저씨는 대체 어떤 식으로 생존에 유리한 요소들을 어필하고 있는가?
앞서 언급했듯, 학창시절의 아이들이 잔인할 수 있는 이유는 좁은 거리 내에서 물리적인 성장폭이 가시적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해소욕구와 적나라한 위계의 확인은 생물로서 한 종이 지닌 본능에 가장 가깝다. 그를 조절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뒤쳐지는 요소들에 대한 수치심이 교육되며, 이를 가지고 2차적인 기준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질서 판단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각 요소들이 최초의 잣대로부터 점진적으로 멀어질 수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몇 걸음 내에서 이해 되는 거리에 있다.
반면 드워프 수염을 한껏 기른 푸른 피부의 아가씨가 보여주는 자질들은 직관적이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확률에 유리함을 보탤 수 있다는 지는 부가적인 입증을 거쳐야 한다. 가령 앞선 T-F 글에서도 언급했듯 '연약함'이란 누구에게라도 예정되어있는 시련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주하고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용기가 관객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가치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혹 그게 저 너머의 동성애 난교에 대한 묘사로까지 이어진다면 대체 몇 단계를 뛰어넘어야 하는걸까.
서로가 전제하는 미학적 이상이 엉켜버렸을 때, 우리는 자신이 영위하는 '안전함'이 보편적인 질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 지를 먼저 가늠해야만 한다.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었다면 북쪽을 먼저 찾아야 하는 것과도 같다. 정규분포를 무시하고서 합리성을 상정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오직 그 후에야 어떠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지, 각자의 맥락을 포함시킬 지를 조율할 수 있다.
요컨대 '쉬움'은 쉬려는 이를 위해서, '어려움'은 뛰려는 이를 위해서 제창되었다는 얘기이다.
인간사란 언제나 후자를 전자의 영역으로 편입하려 애쓴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려운 문제들을 쉽게 해결하려는 노력이란 분명 발전의 핵심 동기가 맞다. 다만 어느 순간에 그 순서가 뒤섞여 고민의 결이 엉켜버렸다면, 무엇이 쉽고 어려운 지에 대한 직관이 붕괴되어버렸다면 우선은 주저없이 초기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적절한 프로토콜일 것이다.
질서가 선행하고, 그 이후에 융통성이 뒤따른다.
보편성이 선행하고, 그에 따라 마이너함이 정의된다.
자신의 시야를 좌표와 범위로 설명할 수 있다면 혼란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18.
혹시 또 모르겠다,
폭력이 아예 거세된 <데몰리션 맨>의 세계관이 몇백만년씩 이어진다면 우린 유전적으로 파리 올림픽에서 다룬 비주얼을 K-팝문화보다 보수적인 매력으로 느끼도록 바뀌게될지도.
하지만 아마 그 때에도 트로트는 지금처럼 똑같이 구수하게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