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편안함의 폐단
9.
3-40대의 섹드립은 맵다.
아재개그는 형편없고 부장님들은 꼰대다.
지하철의 노인들은 시끄럽다.
촉법소년은 무모하다.
예전과 다르게 애정이 식었다,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아줌마들은 부끄러움이 없다.
모두 다 유명한 클리셰들이다.
정확히는 무결성을 추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느낀 무법자들에 대한 주요한 감상이다. 규칙에 대한 신봉이 강력하고 그 너머의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배척할수록 이러한 감상은 더 강력한 질색의 표출을 포함하기 쉽다. 아니,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예의라는 게 있고 그건 꼭 지켜져야 하는 데, 왜 상대방은 저렇게 무례하게 굴지? 또는 왜 저렇게 시대에 뒤쳐져있지?
정답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안전한 범위를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10대, 20대에는 섹스든, 실수든, 개인사든 정치적 신념이든 민감한 주제에 대해 건드리기만 해도 치명적인 위험이 동반된다.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조롱하는 지, 내가 상대의 역린을 건드렸는 지, 나를 속이려고 하는 지, 내가 나를 너무 오픈하지는 않았는 지 잘 가늠할 수 없다.
게다가 적정한 공존의 선과 자신의 객관적 위치를 잘 모르고 착취 의지를 불태우는 상대들도 많기 때문에, 앞선 언급과 마찬가지로 광인들 속에서의 자리잡기처럼 생존의 전략이 훨씬 더 까다로워진다.
화장실 한번 잘못 갔다가 똥쟁이로 소문나면 어떡해?
섹스 얘기 한번 잘못 했다가 여/남미새로 몰리면 어떡해?
그러나 30대 이후로는 여러 사회적 상황에서의 가능성이 거의 다 해금된다. 즉, 특정 상황이나 주제에 대해서 나올만한 시나리오를 대체로 다 체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울리는 사람들도 얼추 상황 진행과 대응에 대한 정석을 숙지하고 있다.
똥얘기가 나오면 뭐 급한가보지 / 스스럼 없는 사이인가보지,
섹스 얘기가 나오면 대충 이정도 선에서 하겠지.
만약 적절한 상황파악 없이 섹스섹스! 파울볼을 날리거나 반대로 섹스라는 단어 하나에만 꽂혀 펄쩍 뛰는 사람을 보게 된다고 쳐보자. 이 나이 즈음이면 대충 견적을 내고 피로함을 미리 감지해 자리를 피해버리는 프로토콜이 이미 자리잡혀있다. 반대로, 서로 피로함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주어질 경우라면 숙련자의 경험담과 개인적 비유가 더해져 대화의 수위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수가 있다.
이렇듯 나이가 들수록 안전한 자리는 더욱 늘어간다.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들이 사실은 감당할만했구나- 하고 보이는 순간, 나의 행동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별달리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 규칙에 느슨해진다. 반대로 발 밑의 구멍이 두려웠기 때문에 가질 수 있던 빠릿한 움직임은 점차 느려지기 십상이다. 생존이 자극되어 너와 나의 무결함을 좇아갈 필요가 없으니 내부의 압력을 유지할 이유 또한 잃어버린다.
더는 튼튼한 나룻배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10.
참 안타깝게도 무례함의 발현 또한 이 편안함의 원리로 인해 심화되는 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상에서 겪는 무례함이란 서로가 학습한 '안전한 범위'의 진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생긴 소통 오류라고 진단할 수 있다.
'트롤'들에게도 문화는 있던 것이다.
앞선 언급처럼 K - 공공질서에 대한 존중과 그를 어길 시 돌아오는 불이익은 사회적 교류가 왕성한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가장 따르기 안전한 프로토콜이다. 그러나 K-아줌마들(로 대표되는 가장 전형적인 막무가내식 인간군상)의 세계에서는 다소간의 일탈이 주는 편리함이 기본 상식처럼 전제되어있고, 나의 일탈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상대방 또한 그럴 것임을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엔 그들이 다년간 생존에 치여가며, 용인된 질서 이상의 결과를 내야만 하던 고생스러운 경험이 전제되어있다. 나아가 그러한 정서를 서로 공유한다는 일종의 전우애와, 작은 일탈에 대한 사회적 제재의 강도가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 않다는 안전함의 학습 또한 포함된다.
'아유~ 학생 나 잠깐만 줄 앞에 좀 설게~? 미안해요~~'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일탈은 합리적이며 융통성있는 사회적 전략이다. 아낄 수 있는 자원을 왜 지불하니~호호호깔깔깔! 이와 같은 '아줌마'들의 질서는 직접적인 제재방법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이변 없이 유지될 수 있고 또 해당 세계로의 편입 또한 끊이지 않는다.
신기하게 이러한 전략은 소위 '일진'이나 촉법소년, 심지어는 온라인 악플 작성자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일탈에 대한 약한 제재정도를 꾸준히 학습하여 안전한 범위를 확인하고 나면, 자신의 시야 안에서 일탈은 가장 유리한 위치선정 전략으로 간주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정작 시야 너머의 몰락에 대해서는 경험도 이해도 없기 때문에 간혹 선을 잘못 넘어 중징계가 예정된 경우 크게 무방비하다. 잡혀들어간 범법자들의 변명은 하나같이 똑같다. '이래도 되는 줄 알았어요..'
즉, 이들은 모두 빌런과 숙련자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있다.
거꾸로 말하면, 그 어느 정형화된 사회에서의 숙련자들이든간에 마찬가지로 이런 모양이기 나타나기 십상이다. 군대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모두 FM과 '가라'는 전형적인 양상으로 자리잡는다. 모두가 다 자기 나름의 안전한 공간을 여분으로 마련해간다.
11.
물론 빌런과 선량한 일반인 사이의 비유가 아닌 일상의 여러 소통과정에서도 '안전한 범위'의 진도차는 오해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연인 사이에 애정이 초반의 설렘에서 안정감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연애관계의 안전함을 학습해버렸기 때문이다. 권태롭다고 한껏 꼬장을 부리고서 헤어지고나서 후회하는 클리셰는 애인관계의 안전함의 범위를 잘못 가늠했기 때문이다. 애인에게 무리한 기대를 하다가 상대가 지쳐떨어지는 이유도 비슷하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사이에서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만큼이면 충분히 안전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오는 데, 왜 저걸 안하려고 하지..?'가 커다란 이유를 차지한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도, 조언을 해주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서로의 쉬움, 편안함, 안전함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사실 우리는 상대가 뭘 어려워하는 지도 잘 모른다. K-사회에서 안전함의 습득이란 대체로 능동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의 과정이란 원래 어렵고, 어려운 무언가는 치워버리는 것이 가장 쉽지 구태여 자원을 들여 이해할 이유는 별로 없다. 자기 배의 구멍을 메꾸는 작업은 잘 짜여진 사회의 레일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순간 쉬워졌기 때문에 할만했을 뿐이다. 나 또는 주변에서 학창시절의 왕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구요? 졸업을 할 때까지 버티는거지.. '금방 지나갈거야'가 최선의 해결법인 것이다.
이렇다보니 무기력함은 대물림되고 서로간의 소통 오류는 거의 메꿔지지 않는다. 그래서 K-문화는 양극화되어있다. 나이나 지위, 재력 등의 달성을 통해 광인들 사이를 탈출한 이들과 그렇지 못하고 함께 갇혀있는 이들로 크게 나뉘는 것이다. 이 간극이 다시 높은 스트레스로 환원된다.
무결성을 향한 유인이 더욱 커진다.
12.
이 모든 논의를 다 싸들고 다시 문화적 요소로 초점을 다시 돌려놓아보자.
개인이 가진 안전함의 진도 차이가 '쉬움', '편안함', 곧 '신선함'의 선별 기준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이 모든것이 다 같은 방향의 이야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재개그'는 취향을 심하게 탄다.
이 취향 차이도 개인별 '안전함'의 범위로 해석할 수 있다. 아재개그는 대체로 일차원적인 말장난이나 발음의 유사성을 주로 포함하기 때문에 쉽고 가볍다. 이는 유머에 별다른 자원을 할애하지 않는 여러 사회계층에게는 적절한 양의 자극으로 수용될 수 있으나, 지루함/낡은 것에 대해 민감한 사회계층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별다른 자극으로 인식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해당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트리거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준선만큼의 '신선함'을 제공하지 못했으면서도 효과적인 유머가 가져오는 분위기 환기 / 방어기제 완화 / 동조감 유발 등의 사회적 자원들을 습득하려 하는 착취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즉, 아재개그의 시전자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수준의 유머였으나 수용자는 때로 그렇지 못할 수 있다.
평론가가 분석하는 영화와 대중적인 관객의 선택 사이의 괴리 또한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수 많은 영화를 감상하며 반복적인 클리셰에 익숙해진 평론가가 느끼는 '신선함'이란 관객 입장에서는 괴이하게 비틀어진 변태적인 입맛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이패션계도 비슷한 극단성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고, 각종 분야의 '덕후들'이 느끼는 감동의 포인트 또한 얕은 취향을 향유하는 사람이 보기엔 마찬가지의 괴악함이 느껴지기 쉽다. 물론 반대의 시점에서 대중적인 취향이란 정형화된 구조의 지루함이나 단편적인 변주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붕어처럼 느껴질 것이다. 앞선 아재개그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충분하지 않은 구조적인 깊이에 신선함을 느끼도록 강요받는 부조리한 경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뛰느냐 쉬느냐의 문제다.
쉬려고 하면서 뛸 수는 없기 때문에 소통의 오류가 생긴다.
13.
이제야 10대 문화의 민감함을 지나 트로트가 가진 낡음까지 생각을 거슬러 연결해볼 수 있었다. 꾸준히 언급했듯 '쉬움'의 개인차는 크고, 여러 요인들로 인해 '쉬움'의 한계를 맞닥뜨릴 경우 '쉬움'은 곧 지루함으로 전락한다.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트로트의 요소들이 지나가다 귀에 날아든다는 것은 트렌드에 과민하거나 음악'덕후'스러운 접근으로는 참기 어려운 감각이다. 트로트가 품고있는 안전함에 대한 낙관적인 풀이법이 '아줌마들의 세계'처럼 비집고 들어와 악의없이 방어기제를 작동시켜버린다.
'아유 좀 이래도 괜찮아~',
'아뇨, 이거 안됩니다.'
저 낙관주의는 미숙한 불안의 발현인가, 과숙한 융통성의 폐해인가. 정말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트로트의 밝음도 있었다. '쉬움'의 한계 또한 '안전함'과 마찬가지로 충분한 탐색을 거친 이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모두가 강박적으로 한계를 더듬거나 새로운 컨텐츠에 목말라하지는 않는다. 안전한 자리를 찾아 느슨해진 이들이 마음편히 즐길 수 있는 문화 또한 돌아올 집처럼 자리를 지켜줘야 한다.
그래서 말년의 귀농처럼, 솟아오르는 향수처럼 저무는 세대에게 사랑받는 안식처인거겠지. 반항기 가득한 아들딸래미가 결국엔 엄마아빠를 이해하고 닮아가는 것처럼, 쉬운 문화란 멀리 딛고 도약해낼 모체의 역할을 든든히 해주는 게 아닐까 한다.
반대로 도약은 언제나 최전선에서만 일어나고, 생존을 담보로 변화에 항상 촉을 곤두세우는 긴장감이 곧 젊음의 정체가 아닐까 한다. 치열하지 못한 건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당장 뒤질거같지 않아서 그러하다. 뭘 몰라서, 뭐가 없어서, 서툴러서 불안해하는 그 압력도 언젠가는 소망하게 되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게 오묘하다. 익사할뻔하는 도중에는 절대로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뛰려고 하면서 쉬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