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정의 공격에 김현경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회사 대표실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백수정. ‘남편만 철저하게 무너뜨리면 돼. 자기 딸인지도 모르고 관계를 한 걸 알게 된다면…. 후 훗, 죽고 싶겠지. 사는 게 지옥일 거야. 각오해 김정호.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은 대가야. 내가 젊은 남자를 만난 것도 결혼생활 내내 진심 어린 사랑을 주지 않은 당신 때문이야. 쇼윈도 부부로 사는 것도 지긋지긋해. 날 원망하지 마. 하지만 성주가 이번 일에 연루되면 안 돼. 절대 안 돼.’ 수정은 책상 위에 놓은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30분 후 수정의 사무실로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이 들어왔다. 두 남자는 비서의 안내에 따라 대표실로 들어가서 수정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수정은 창가에서 소파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최 탐정님. 이리 앉으세요.”
“네. 사모님.”
최 탐정과 실장은 나란히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수정은 비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후 최 탐정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보수를 두 배로 줄게요.”
“네. 그런데 아드님은 잘 해결된 거죠?”
“그래서 보자고 한 거예요. 둘이 만나는지 감시 좀 해주세요. 만약, 계속 만나면 플랜 B로 가세요. 헤어지는 계획…. 아시죠?”
“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단 미행부터 하겠습니다.”
“아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그 애만 떼 내세요. 아들이 상처받지 않게.”
“사람 마음을 바꾸는 거라 그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두 배로 준다고 했잖아요.”
수정은 미간을 찡그리며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최 탐정은 가지고 온 탐정활동 계획서를 수정 앞에 놓았다.
“사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단 활동 계획서를 만들었는데요. 잠깐 설명드리겠습니다.”
“네.”
“먼저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남편분에게 김현경의 존재를 알게 하는 계획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 10시에 계획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수정은 계획서를 읽어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추모공원에 현경이와 성주가 같이 가면 절대 안 됩니다.”
“네. 그전에 둘 사이를 확실하게 정리시키겠습니다.”
“그럼, 이지영의 딸이 김정호의 딸이라는 건 어떻게 알게 할 건가요?”
“김현경에게 친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겁니다.”
“어떻게요?”
“그건 믿고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최 탐정은 나머지 계획을 설명했다. 수정은 마치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정호. 날 원망하지 마. 어차피 네가 뿌린 씨앗이니까.’ 수정의 미소에는 비장함이 묻어있었다. 최 탐정은 그런 수정의 표정을 보며 ‘지독한 년. 나쁜 년. 천벌 받을 년. 내가 돈 때문에 하지만 너 같이 표독스러운 년은 처음 본다.’라고 속으로 말했다.
“뭐해요? 당장 실행하지 않고.”
“네. 우리는 입금되면 움직이거든요.”
수정은 핸드폰으로 500만 원을 계좌이체 했다.
“착수금 500 입금. 나머지는 성사되는 대로.”
“감사합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최 탐정은 수정의 사무실을 나가서 미스 박에게 전화했다.
“김포 김현경 오피스텔로 5시까지 와. 오피스텔 맞은편 커피숍 알지?”
“네. 알아요.”
“착수금 받았고, 김현경 만나서 생부의 실체를 알려주고 김성주와 정리하게 만드는 것부터 할 거야.”
“네. 이동할게요.”
[송도 캠퍼스]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는 현경. 강의실 앞에 성주가 서 있다.
“현경아!”
“선배. 또 기다리고 있었네.”
“‘또’라니, 당연한 걸.”
“배고파. 맛있는 거 먹자. 오늘은 내가 쏠게.”
“야야, 천하의 자린고비가 점심을 산다고?”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현경이 한 발 앞서 걸었다. 그런 현경의 뒷모습을 보며 성주가 현경 옆을 지나 앞으로 가서 마주 보며 말했다.
“우리 공주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네. 그렇지? 내 눈은 못 속여. 누구야? 어떤 놈이 또 고백했어?”
“아니네. 온 학교에 소문나서 그 많던 추종세력이 다 어디로 갔는지, 참, 나도 궁금하네.”
“날 추종세력에 넣지는 마라. 난 추종세력 아니다.”
“그래? 그럼 선배는 뭐야?”
“뭐긴, 난 널 추앙해.”
“호호호 봐준다. 그 말 좋았어. 맘에 들어.”
“그럼 나 먹고 싶은 거 말해도 돼?”
성주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나 빼고, 다.”
“하하하, 들켜 버렸네.”
“낙지 볶음밥 먹자. 아주 맵게.”
“너, 매운 게 당기는 걸 보니 뭐가 있네. 확실해. 맞지?”
현경은 성주의 팔짱을 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보이냐? 내 속을 훤히 뚫어보네.”
“그럼, 내가 사랑하는 공준데.”
현경은 식당에서 낙지볶음밥을 주문한 후 성주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손 차지?”
“괜찮아. 대신 내 손이 따뜻하잖아.”
“맞아. 선배 손이 따뜻해서 좋아.”
“현경아, 무슨 일이야. 말해 봐.”
현경은 성주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성주는 그런 현경의 눈빛을 보며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선배, 아니, 오빠. 잘 들어.”
“오빠? 듣기 좋은데.”
“그래, 이제 오빠라고 부를게. 그게 나도 좋아.”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오래 들여. 말해 봐.”
“아니야. 일단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자.”
성주는 더 다그치지 않았다. 그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매콤한 낙지볶음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래. 맛있게 먹고 이야기하자.”
“고마워. 오빠.”
성주는 밥 위에 채소로 덮여 있는 그릇에 낙지볶음 한 주걱을 얹어서 현경에게 주었다. 그런 후 자기 밥그릇에도 낙지볶음 한 주걱을 넣어서 비비며 말했다.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괜찮겠어?”
“어. 괜찮아. 오늘은.”
평소 같지 않은 현경의 표정과 말투에 성주는 그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마치자 현경이 차분하게 말했다.
“오빠. 우리 한 달만 만나지 말자.”
성주는 청천벽력 같은 현경의 말에 입이 딱 벌어졌다.
“왜? 갑자기?”
“사실, 어제, 오빠 엄마가 찾아왔었어.”
“뭐, 우리 엄마가? 왜? 무슨 말을 했는데?”
성주는 놀라움과 급한 마음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난, 오빠랑 헤어질 마음 없어. 사랑하니까. 다만 한 달이라도 어머님이 하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야. 한 달 정도는 버텨 보겠는데 더는 안 되겠다는 거지.”
“작전상 후퇴?”
“그렇지. 나하고 오빠하고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돼. 아마 감시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내가 봤거든. 그 사람들.”
“뭐? 감시하는 사람? 우리 엄마가 사람을 시켰다는 거야?”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그리고 잘 들어. 오빠를 불효자로 만들지 않고, 나도 당당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 그렇게 해줘. 나 믿지?”
“그래. 믿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를 하지 그랬어.”
“아니, 그건 현명하지 못한 거야. 내가 만약 오빠한테 바로 전화했으면 오빠는 엄마한테 가서 대들었을 거야. 모자지간 이간질 시키는 것 밖에 안 돼. 어차피 우린 평생을 같이 갈 거야. 그 과정에 한 달은 아무것도 아니지.”
성주는 현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경이가 이 정도로 생각이 깊은 여자였구나!’
“그리고 오빠 엄마가 나한테 돈도 주셨어.”
“뭐? 돈을?”
“어. 5천만 원.”
“헉, 5천만 원? 아들 몸값이 그것밖에 안 돼서 실망인데.”
“그렇게 말하지 마. 나 한텐 큰돈이야. 어쩌면 내가 키다리아저씨한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정도로.”
현경은 키다리아저씨에 대해 성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고아가 되어버린 자신을 후원해 주는 고마운 아저씨라고.
“나, 그 아저씨 한번 보고 싶다.”
“그래. 나도 소개해 주고 싶어. 지금은 말고. 한 달 후에.”
“알았어. 네 말대로 해볼게. 이제 심각해지지 말고. 웃어라.”
“고마워 오빠. 내 말 이해해 줘서.”
“뭘, 근데 오빠라고 부르니까 좋다야.”
웃고 있는 성주의 얼굴표정과 달리 현경의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미간은 움츠려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오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