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욕망
태식은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얼굴색을 바꿨다. 그때그때 위기만 모면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뜻이에요?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해요?”
수정은 태식이 자신을 바라보는 의심의 눈초리를 따갑게 느끼며 말했다.
“아니야. 무슨 뜻이 있겠어? 그냥 물어본 거야. 민감하게 그럴 필요 없다고.”
태식은 수정이 정색하며 대답하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정은 그런 태식의 태도가 경멸스러웠다.
‘이기주의자. 나쁜 자식. 자신의 행동은 용서해달라고 하면 없어지고,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지?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그냥은 못 넘어가시겠다?’
태식의 의처증은 연애할 때부터 있었다. 보통사람들은 ‘어디야? 뭐해? 누구랑 있어?’ 정도로 물어본다. 그런데 태식은 달랐다. ‘누구랑 있어? 뭐해? 어디야? 순서대로 말해 봐.’ 이런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수정은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태식에게는 누구랑 있는게 가장 중요했다. 수정이 곧잘 대답 해주면 기분 나쁜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당신 제주도 갔을 때 누구랑 갔어? 가서 뭐 했어?”
태식은 수정이 연락을 끊고 사라진 3일의 행방을 추궁했다.
‘다 알고 있으니까 순순히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 그럼 나도 생각해볼 테니까.’
태식은 흥신소에서 보내준 사진을 떠올리며 상처 입은 사슴을 사냥하는 호랑이처럼 수정을 노려봤다.
“지금은 당신하고 대화할 기분 아니에요. 당신 용서한다고 한 말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더 말 걸지 말아요.”
수정은 감정이 격해져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태식은 수정이 격분하는 것을 보며 자비를 베푼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지금 말 안 해도 돼.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해줘. 혼자 다니는 여행 이야기가 궁금하거든.”
태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정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수정을 바라보며 태식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조롱하는 미소가 수정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태식의 휴대폰에 ‘흥신소’라는 발신지가 떴다.
“김태식입니다. 말씀하세요.”
“네. 사장님. 증거 사진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확인하시고 연락해주십시오.”
“그러죠.”
전화를 끊은 태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증거 사진이라는 말은 안 했겠지!’
노트북을 여는 태식의 손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보낸 이 : ymh
제목 : 증거자료(1-10)
내용 : 일자별 행적 추적결과
[4.5, 화]
- 10:00 김포공항 제주행 비행기 탑승, 좌석 18A
- 11:10 제주공항 도착, 비상착륙으로 약간의 공황장애 일으킴.
- 11:30 렌터카 대여
- 12:00 00민박집 도착
- 14:00 민박집 근처 유채꽃밭에서 사진 촬영.
낯선 남자와 같이 사진 촬영
- 14:30 남자 차로 이동
- 15:00 갈치 전문 구이 음식점 도착
- 17:00 음식점 근처 00 호텔로 이동
- 19:00 호텔 나옴. 산책함.
(직원이 호텔 객실에 카메라 설치)
- 20:00 편의점에서 물건 구입 후 다시 호텔로 들어감.
(내부 모습 사진과 영상 촬영함)
[4.6, 수]
- 12:00 호텔 나옴.
- 13:00 제주공항 도착
- 13:30 남자는 탑승구로 들어가고 여자는 공항을 나옴.
- 14:00 택시를 타고 00민박집으로 이동
이후 민박집에서 나오지 않음.
[4.7, 목]
- 10:00 민박집에서 나옴.
- 10:05 택시 타고 제주공항으로 이동.
- 10:20 제주공항 도착
- 11:00 탑승구로 이동.
- 11:30 서울행 비행기 이륙
- 12:40 김포공항 도착
- 13:00 택시 타고 이동
- 14:30 세브란스 병원 도착
첨부 파일
- 사진 10장
- 동영상 5개
태식은 어금니를 악물고 사진부터 클릭했다.
사진#1 수정은 남자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음 사진을 열었다.
사진#2 갈치구이 전문점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술병도 보였다.
사진#3, 4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사진#5, 6 호텔을 나오는 사진.
사진#7 제주공항에서 남자를 배웅하는 사진.
사진#8 민박집으로 들어가는 사진.
사진#9 민박집을 나오는 사진.
사진#10 제주공항 도착 사진.
사진을 보던 태식의 목에 힘줄이 잔뜩 불거져 있다. 다음 동영상을 클릭했다. 호텔 내부를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객실에 들어선 수정과 남자는 격렬한 몸짓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순간 태식은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두 연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철저히 파괴할 거야.’
태식은 다음 영상도 클릭했다. 다른 자세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 다음 영상도, 다음 영상도….
쾅
쾅쾅쾅
태식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죽여버릴 거야. 각오해.”
두 팔로 책상을 짚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태식의 입가에 창백한 쓴웃음이 돌았다.
‘흐흐흐’
‘요조숙녀처럼 굴더니 딴 놈이랑 저런 짓까지 해? 어디 두고 보자.’
자세를 바로 세운 태식은 손마디를 우두둑 꺾었다.
후드득
쏴
수정은 지하철 출구에서 멈춰 섰다. 소나기였다. 잠시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띠리리잉
띠리리링
‘김나리.’
초, 중, 고 동창. 수정의 절친 김나리였다.
“여보세요.”
“뭔 여보세요 야, 왜 안 와. 목 빠지겠다.”
“다 왔어.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잠시 피하고 있어. 그치면 바로 들어갈게.”
“알았어 계집애야. 빨리 와.”
빗방울이 마른 도로를 후려갈기자 흙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 이 냄새.’
수정은 제주도에서 맡았던 흙냄새가 떠올랐다. 그땐 명훈이 옆에 있었다. 갑자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감정도 지나가는 소나기일까?’
물끄러미 빗방울 튀는 모습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봤다. 비가 그치자 사람들이 후두두 쏟아져 나갔다.
(신촌역 1번 출구 옆 커피숍.)
수정이 커피숍 문을 열자 진한 커피 향이 코로 들어왔다. 창가 쪽 중간 자리에서 나리가 손을 들며 “여기”라고 외쳤다. 수정은 나리를 보고 씩 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구찌 명품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못 보던 백이었다. 나리는 반갑다며 진주목걸이를 살짝 뒤로 젖혔다.
‘명품 가방 샀다 이거지. 어쭈, 목걸이까지? 분명히 실업자 남편은 아닐 거고. 오늘 너 띄워줄 테니 다 불어 이 계집애야.’
수정은 놀란 듯이 말했다.
“어머, 어머, 이거 최신 백이잖아? 만져봐도 돼?”
“살살 다뤄라. 끈값만 200이다.”
“좋다. 좋다. 얼마짜리냐?”
“500”
“헉, 500? 신랑이 해줬니?”
“미쳤니. 우리 신랑 잘 알잖아? 백수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짠순이 네가 너 돈 주고 샀을 리는 없고? 바른대로 불어라.”
“3개월 만났는데 마누라가 알았다며 헤어지는 조건으로 사주더라.”
“어떤 놈인지 개값치고 비싼 돈 치렀네. 호호호.”
“야, 백수정. 너도 그런 말 할 줄 아냐? 안 본 사이 달라졌네. 너 무슨 일 있었지?”
“일은 무슨 일. 나도 이제 즐겁게 살기로 했다.”
나리는 수정의 얼굴을 살피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백수정. 너, 남자 생겼구나? 맞지? 내 눈은 못 속인다. 나도 불었으니까 너도 까라.”
수정은 얼굴이 빨개졌다.
“까긴 뭘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호호호. 이 계집애 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데. 호호호.”
나리는 더 집요하게 물었다.
“잤구나. 벌써. 딱 보면 안다. 남자 생각하니까 가슴이 벌렁거리고 입꼬리가 올라가지? 티 난다. 순진하기는.”
“그래? 정말 티 나니?”
나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신랑이 벌써 눈치챘겠다. 바람도 아무나 피우는 줄 아니? 모르면 이 언니한테 물었어야지. 말해봐. 뭐 하는 남자야? 어떻게 만났어? 돈은 많고? 키는 커?”
나리는 신난 어린아이처럼 물었다.
“알았어. 알았어. 말할게.”
수정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로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나리를 붙잡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참. 커피 마셔야지. 내가 가지고 올게. 넌 그동안 이야기보따리 풀 준비해.”
나리는 주문대로 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대기 선에서 기다렸다.
수정은 핸드폰 속에 유채꽃밭에서 명훈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나리가 커피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머 어머 벌써 사진까지 찍었네. 이 계집애 진짜 사고 쳤네. 어디 봐. 보여줘 봐.”
“알았어. 보여줄게.”
수정은 핸드폰 사진을 나리에게 보여줬다. 이리저리 확대해서 사진을 보던 나리가 말했다.
“잘생겼네. 키도 크고. 뭐 하는 사람이래?”
“사진작가. 일 년에 세 번 제주도에서 사진을 찍는대.”
“일 년에 세 번? 사계절을 찍는 게 아니고?”
“어. 그러네. 나는 그냥 세 번 찍는다고 생각했지 그 생각은 못 했네?”
“순진한 거니 멍청한 거니? 이럴 때 보면 멍청한 거에 한 표.”
수정은 고갯짓으로 ‘멍청하다’에 한 표를 수긍했다.
“아니 너 근데 사진을 위험하게 핸드폰에 저장했어? 너 카톡도 그대로 저장해뒀지?”
“응. 왜?”
“왜긴 왜야? 남편이 보면 어쩌려고.”
“남편이 내 핸드폰을 왜 봐?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자기 바람피우는 거 안 들키려고 안달인데.”
“그건 모르는 거다. 매사 철저하게 해두는 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거다. 이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해.”
수정은 알았다며 핸드폰을 다시 건네받았다. 나리는 명품 가방을 옆으로 옮겨놓고 수정 앞으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일단 그날그날 주고받은 카톡은 신랑이 오기 전에 나가기를 해서 증거를 없애. 두 번째 핸드폰 사진은 나에게 보내는 이메일로 보내서 저장해두고 보기. 핸드폰에는 절대 사진 저장해두면 안 돼. 전화는 통화목록을 지우기. 자동저장되는 방식이면 자동저장내용 지우기. 그래서 지우기가 귀찮으면 카카오톡 전화를 이용해. 카톡 페이스톡을 하면 영상통화를 할 수도 있고 나중에 나가기로 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말씀. 언니가 주옥같은 말씀을 하면 적어라. 적어.”
수정은 나리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거에 한 번 놀랐고, 이렇게까지 해가며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두 번 놀랐다.
“나리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얘 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너 그 남자랑 살 거야? 남편 자식 버리고 갈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태식 씨가 바람피울 때 네가 알게 피워?”
“아니. 그냥 직감으로 그럴 거 같다는 거야.”
“거봐. 바람을 피워도 마누라 모르게 피우는 게 기본 예의라는 거지.”
나리는 태식이 수정 몰래 바람피우는 것을 마치 잘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논리가 어딨어? 바람이면 바람이지.”
“그럼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거를 태식 씨가 알기를 바래?”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이 언니가 말해준 대로 해. 그럼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어. 콘돔을 사용하면 안전한데 귀찮다고 사용 하지 않다가 x 되는 거하고 같은 거야.”
“알았어. 다른 거는 없니?”
“호호호.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백수정. 막가는구나?”
“아니 그러지 말고. 다른 거는 없어?”
“많지. 모텔 갔다가 관계하기 전에 해야 할 행동. 관계하고 나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규칙이 있지.”
“어. 그래. 그거 말해줘.”
수정은 점점 나리의 ‘들키지 않고 바람피우는 법’에 빠져들었다. 나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다시 필살기를 이어갔다.
“우선. 남자 친구의 향수를 파악해. 바꾸라고 할 필요는 없어. 강한 향을 사용하면 반드시 샤워해야 해. 그런데 집에서 쓰는 바다 샤워랑 다른 거면 안 되지. 그래서 똑같은 샘플 바다 샤워를 가지고 다녀. 모텔에서 옷을 벗은 후 반드시 옷걸이에 걸어둬. 영화처럼 급하다고 바닥에 벗어놓으면 남자 머리카락이 묻을 수 있어. 샤워 후 팬티를 입을 때는 반드시 발바닥을 정확하게 검사하고 입어. 발바닥에 묻은 남자 털이나 머리카락이 팬티에 묻을 수 있어.”
나리는 속사포로 필살기를 쏟아냈다. 입에 침이 마르는지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수정은 나리가 말할 때마다 명훈과 보냈던 밤을 생각하며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이해했다.
“그래서. 그리고. 빨리 이야기해 봐.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정은 재밌다는 듯이 재촉했다.
“다음은 차량을 이용할 때 유의 할 사항. 일단 차에서 통화하거나 차에 남자 친구를 태울 때는 반드시 블랙박스를 끈다. 만약에 끄지 못했을 경우 칩을 빼서 노트북에 넣고 녹화된 장면과 음성을 삭제한다. 삭제하는 게 귀찮으면 그냥 꺼두면 돼. 차량에 남자 머리카락이 있는지는 돌돌이(먼지 제거용)로 한번 훑어낸다.”
“관계하고 나서 꼭 신경 써야 할 거는?”
“있지. 중요한 게 있지.”
“뭔데?”
나리는 등을 의자에 기댔다가 다리를 꼬며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수정에게 손짓하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만약 오늘 낮에 남자 친구랑 사랑을 나눴다면 그날은 남편과 하면 안 돼. 절대 안 돼.”
“왜?”
“왜긴. 내 몸이 기억하고 있잖아. 남편과 관계하면서 낮에 있었던 몸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자기도 모르게 헛소리를 할 수 있다고. 오르가슴에 오르면 터져 나오는 방언을 어떻게 통제하겠어. 너 그거 통제돼? 안 되잖아? 그래서 그날은 하면 안 된다는 거야.”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인간은 밖에서 바람피우는 날 꼭 집에서도 나에게 강간하듯이 했는데 그럼 그것도 나를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 바람 핀 년 다시 느끼고 싶어서 한 걸까? 그렇다면 정말 x 자식이다.’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걸까! 수정은 이제 남편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남편의 집요한 추궁을 회피 해야 했다. 사랑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경멸하던 불륜을 자신이 즐기고 있었다.
나리가 화장실 간다며 핸드폰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남의 편’이라는 이름이 떴다. 수정은 계속 울리는 소리 때문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누구랑 있어? 뭐해? 어디야? 핸드백은 맘에 들어? 순서대로 말해 봐.”
“아. 저.…”
귀에 익은 목소리. 분명히 남편 태식의 목소리였다. 질문하는 순서만 봐도 남편이었다. 수정은 얼른 끊었다. 그리고 지웠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나리랑 둘이 무슨 관계…. 이런 미친년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