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서하기로 했다.
명훈 커튼을 젖히자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수정이 하얀 이불 포를 걷어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벌써 일어났어요?”
“네”
“몇 시예요?”
“아홉 시 십분. 더 자요.”
“아니에요. 일어날게요.”
명훈은 마치 집에서 하던 모습으로 편하게 모닝커피를 탔다.
“커피 향이 좋은데요!”
수정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명훈을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뜨거우니 조심해요.”
명훈은 수정이 뒤에서 안은 채로 천천히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놓으며 말했다.
수정은 명훈을 안은 팔을 풀며 의자에 앉았다. 둘 다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근데 명훈 씨.”
“네.”
“명훈 씨가 낯설지 않아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요.”
명훈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나를 알아보는 건가?’
“명훈 씨.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죠? 아무리 생각해도 아는 사람 같아서요.”
“하하하, 전생에 부부였을 거 같군요. 저도 수정 씨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처럼 편하고 좋아요.”
“호호호. 전생 부부요? 난 지금 부부로도 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호호호.”
확실히 남녀관계란 모를 일이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거로도 이렇게 부부처럼 생각할 수 있다니.
명훈은 커피 향 가득한 입술로 수정에게 키스했다.
수정은 명훈의 손을 끌어당기며 침대로 다시 올라갔다. 둘은 다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나가 되었다. 술기운 없이 맨정신으로 나누는 정사. 수정은 세 번의 오르가슴에 도달했다.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아.’
태식에게는 늘 기분 나쁜 고통만 있었는데 명훈과는 너무나 달랐다.
‘속궁합이 맞는다는 게 이런 걸까!’
수정은 이대로 명훈의 품에서 영원토록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훈 씨. 나 이제 여자로 살고 싶어요.”
“…….”
명훈은 수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까지 주변에 바람난 친구들을 보면서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겉으로는 그랬지만 속으로는 부러웠었나 봐요. 이제 솔직해지기로 했어요.”
수정은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듯이 말했다. 수정의 말이 끝나자 명훈은 수정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어요.”
“위험한 선택요?”
“당신이 가진 모든 걸 걸어야 할 수도 있어요.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
수정은 명훈의 가슴을 밀어내며 명훈의 눈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를 던지겠다는 게 아니에요. 나도 여자가 되고 싶을 때 여자로 느끼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왜 남자에게는 관대하고 여자에게는 가혹해야 하죠? 명훈 씨도 그런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나요?”
수정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세상 모든 남자에게 던지는 선전포고 같았다.
“생각과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면 후회하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말한 건데 속물근성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잘못 말했네요. 미안해요.”
수정은 명훈이 어찌할 줄 몰라고 하며 미안하다고 하자 웃으며 말했다.
“잘못했다고 하니까 용서는 할게요. 호호호.”
수정은 내친김에 제주도에서 일주일을 더 있기로 했다. 명훈은 사진작품 전시회 때문에 오후 비행기로 서울에 가야 했다. 수정이 공항까지 배웅했다.
“명훈 씨. 우리 원나잇으로 끝나나요?”
“아뇨.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둘은 가볍게 포옹했다. 수정은 다시 한번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속궁합만큼은 확실했다. 명훈이 탑승구로 걸어가자 수정은 가슴 한쪽이 허전해졌다. 마치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명훈이 떠나고 수정은 공항 근처 올렛길을 걸었다.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며 명훈의 냄새를 하나씩 날려 보내는 것 같았다. 꿈 같은 하루였다. 남편에 대한 죄책감보다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는 남편의 얼굴을 못 볼 것 같았다. 양심이 꿈틀거릴 때마다 ‘불륜녀’라고 낙인찍는 것 같았다.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바보같이. 넌 피해자라고. 남편 얼굴 못 볼 것 같다가 아니라 보고 싶지 않다가 맞는 거야. 다시 그 짐승 같은 인간에게 당하고 살 거야?’
기억 속에 정리된 합리화가 꿈틀대는 양심을 눌러버렸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떠밀리지 않고 내딛는 여유로움. 얼마나 바라던 일상인가.
‘일대일(1:1)’
하늘 어딘가에서 바람에 실어 보내는 외침이 들렸다.
‘그래. 남편을 용서하자. 바람대 바람은 확실히 일대일이야. 술 먹고 겁탈하는 것은 각서로 받고. 그러면 지금의 자리에서 하나씩 해결해나갈 수 있어.’
용서를 선택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수정은 명훈의 강렬한 몸짓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나도 속물이 다 된 건가?’
숙소로 돌아온 수정은 핸드폰 차단을 풀었다. 혼자 제주도로 떠나면서 모든 지인 전화번호를 차단했었다. 카톡도 차단, 문자도 차단, 전화도 차단.
까톡
띠리리링 띠리리링
차단을 풀자 카톡과 문자가 포탄처럼 날아왔다.
‘어디야. 내가 잘못했어. 전화 받아.’
남편 태식의 카톡, 문자였다.
‘엄마. 카톡 보는 대로 전화해.’
작은딸 선영이 보낸 문자였다. 계속 이어서 순서대로 숫자 1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런데 유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엄마.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셔. 빨리 전화해 줘.’
딸 선영의 문자였다. 얼른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엄마. 왜 이제 전화해?”
“어. 그래. 미안. 외할아버지…….”
수정이 물어보려는 순간 선영이가 다급한 듯이 잘라 말했다.
“엄마. 외할아버지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 빨리 와. 세브란스 병원이야.”
“뭐. 뭐라고. 돌아가셨다고? 갑자기 왜?”
“심장마비래. 빨리 와. 엉엉.”
수정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 지금 제주도인데 바로 올라갈게.”
“제주도? 엄마 미쳤어? 거길 왜 갔는데? 엉엉.”
“선영아. 알았어. 아빠는?”
“아빠는 지금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고 계셔. 장례식장도 알아보고 있고.”
“그래. 아빠한테 엄마 지금 출발한다고 전해줘.”
“알았어. 엉엉.”
수정은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죽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고 심장은 마구마구 요동쳤다.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수정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물만 흘렀다.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물을 수도 없었다. 엄마가 먼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홀로 사셨다. 사위가 모시겠다고 해도 딸에게 피해 줄까 봐 싫다고 하셨었다. 무남독녀 수정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수정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본능에 빠져있던 자신을 경멸했다.
태식은 수정이 넋을 잃고 있는 동안 상주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수정은 실어증에 걸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머리로는 말하는데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그녀의 입술 근육과 혀를 마비시켜 버렸다.
“엄마. 천천히 말해봐.”
딸 선영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버버버. 어. 어. 어.”
수정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입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혀는 굳어져서 딱딱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진정해. 곧 좋아질 거야. 충격이 크면 그럴 수 있대.”
남편 태식의 말에 수정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 모든 상황의 출발점은 태식의 폭력성과 외도라는 생각이 들자 수정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옆에서 위로하는 태식의 손을 뿌리치며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여보. 진정해. 당신마저 이러면 어떡해?”
수정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태식을 경멸했다.
‘다 너 때문이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바람피우지 않았어도, 술 먹고 폭행을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저렇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야.’
“선영아. 엄마 모시고 의사 선생님께 가봐라. 여기는 아빠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3층 정신과 진료 예약해놓았어. 약 처방도 받고.”
“알았어요. 아빠.”
선영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영정사진 앞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 일단 진료부터 해보자. 엄마가 이러면 나까지 죽고 싶어 진단 말이야. 엄마. 제발 부탁이야. 응. 나랑 같이 가자.”
선영은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유학 간 큰딸 선정이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 아빠.”
태식은 선정이를 안으며 할아버지에게 절부터 하라고 말했다.
“선정아. 일단 할아버지한테 절부터 해라.”
“알았어요.”
선정은 분향하고 절을 하는 동안 수정은 큰딸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아무 말도 없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빠, 엄마는 왜 이래. 엄마. 나 알아보겠어? 나야 선정이. 엄마 딸.”
선정은 엄마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선……. 버버버……. 어…….”
“언니. 엄마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어. 아무 말도 못 하셔. 정신과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데 할아버지 앞을 떠나지 않으려고 해.”
“엄마. 엄마가 이러고 있는걸 할아버지가 좋아하실까? 나랑 같이 치료받으러 가자. 응.”
큰딸의 말에 수정은 체념한 듯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증오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까?”
의사의 질문에 수정은 종이 위에 ‘네’라고 썼다.
“대상이 가족 중에 있습니까?”
수정은 다시 ‘네’라고 썼다.
“보호자는 밖에서 기다리시고요. 진료가 끝나면 다시 부르겠습니다.”
선정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솔직하게 다 말씀드려. 그래야 치료가 될 수 있어. 알았지?”
선정이가 나가자 수정은 종이 위에 다시 썼다.
‘남편을 죽이고 싶어요. 남편 때문에 제 인생이 쓰레기가 되었어요.’
“네. 그러셨군요. 지금부터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만 같이 생각해보기로 해요.”
한 달 후.
수정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한쪽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누구나 달고 다니는 근심 정도였다.
“여보. 나 왔어.”
“오늘도 일찍 퇴근했네요.”
수정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태식도 달라졌다. 수정의 실어증 사태를 겪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보. 내가 잘할게.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용서받지 못 할 짓을 너무 많이 한 거 같아. 잘못했어.”
태식은 수정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난 이미 당신을 용서했어요. 이제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일에 집중해요.”
수정은 누가 누굴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 원나잇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수정의 말에 태식은 고맙다고 말했다.
수정이 용서하자 태식은 수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바람을 피우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아?”
순간 수정은 태식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촉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