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1. 첫 여자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태…태식 선배야.”
수정은 조금 망설이다가 체념한 듯 말했다.
혜선이 태식 선배가 바람둥이라고, 양다리 걸치고 있다고 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됐어. 명훈이는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혜선은 수정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명훈을 생각하면 복잡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멍청이, 바보, 축구, 수정이가 그렇게 좋으니?’
내가 이렇게 널 보고 있는데…….
수정은 주점을 나오면서 혜선을 봤다. 혜선의 눈빛은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되어 지키고 있는 사람. 그런 혜선 앞에서 명훈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명훈이 다시 고개를 곤두박았다. 테이블 위의 모둠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깨진 접시 위로 명훈이 다시 고꾸라졌다. 왼팔이 몸통과 접시 조각 사이에 끼면서 찢어졌다. 금방 피가 흘러나왔다.
혜선은 명훈을 일으켜 세웠다. 팔꿈치 아래에 약 10cm가량 찢어진 피부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혜선은 손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동여매고 119에 신고했다.
삐뽀삐뽀
사이렌 소리와 함께 119 구급차가 도착했다.
“여기에요. 여기!”
혜선이 구급대원을 불렀다. 구급대원이 도착해서 응급처치하자 혜선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팔꿈치 아래가 찢어졌어요. 깨진 접시 조각에요.”
혜선은 구급대원에게 명훈의 상처 부위를 알려주었다.
“네. 지혈해놓으셨네요. 잘하셨어요.”
혜선은 신고자이자 보호자의 신분으로 구급차에 같이 탔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곧바로 마취하고 찢어진 부위를 꿰맸다. 명훈은 정신없이 낮은 신음만 낼 뿐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왜 남의 사랑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이러고 있는 거야. 혹시 너 명훈이 좋아하는 거니?’
그렇다. 혜선은 명훈을 좋아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 명훈이를 말이다. 그런데 그런 명훈이는 수정이를 좋아한다. 그것도 태식 선배에게 뻑이 간 수정이를.
(이명훈 입대날.)
“너 혼자 입대하는 게 하도 불쌍해서 같이 가주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마.”
“어, 그래. 고마워 혜선아.”
명훈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 술이 덜 깬 것이다. 혜선이가 같이 가주겠다고 하니 더 그랬다.
“같이 가겠다는 친구 없어? 남자들 군대 가면 친구들이 왕창 따라가잖아?”
“어. 그게. 같이 가주겠다는 친구는 있었는데……. 연락하라고 했는데……. 네가 와서 정신이 없었나 봐. 지금이라도 친구들 전화해볼게.”
“호호호, 됐고. 내가 일당백이잖아. 가자. 늦겠다. 참. 부모님은 안 가시니?”
“어. 부모님은 미리 만났어. 따라오시겠다고 하셨는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그랬구나. 알았어. 가자.”
서울에서 논산훈련소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둘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명훈은 술 때문인지 물을 자주 마셨다. 이따금 ‘흠’하는 소리를 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입대가 두려운 게 아니라 옆에 있는 혜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는 게 더 두려웠다. 명훈은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꿈은 아니었다.
버스는 어둑어둑해져서야 논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다 왔다. 내리자.”
명훈보다 혜선이 먼저 말했다. 터미널에는 입대를 앞둔 건장한 사내들과 가족, 애인들로 붐볐다. 명훈은 혜선이가 이렇게 같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명훈을 지그시 쳐다보는 혜선의 눈빛에는 사랑이 반짝였다.
“안타까운 인생 하나 구제해준다는 셈 치고 온 거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봐도 돼?”
명훈이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혜선에게 질문했다.
“뭔데? 네가 질문도 하고 세상 오래 살 일이다.”
“어. 혜선아. 너 사귀는 사람 있니?”
“싱겁기는. 없다. 나 좋아하는 놈들은 많은데 내가 좋아하는 놈은 없어.”
“아. 그렇구나….”
명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고 착각하지는 마라. 너 좋아해서 따라온 거 아니니까. 네가 얼마나 불쌍하게 보였으면 내가 여기까지 왔겠냐? 다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누나의 마음이니까 앞으로 존경한다고 말해라.”
“어. 존경한다고 말하라고?”
“그래. 존경하는 혜선 님! 이렇게 불러!”
“하하하. 존경하는 혜선 님, 그거 괜찮은데. 그렇게 불러줄게. 존경하는 혜선 님!”
둘의 어색한 분위기가 걷어지자 마치 진짜 애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존경하는 혜선 님. 나 부탁 하나 해도 돼?”
“뭔데. 어리석은 중생아!”
“오늘 하루만 내 애인해줘라. 나도 오늘만큼은 네 애인이 되고 싶다.”
“호호호, 뭐 어려울 것도 없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혜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늘은 이 존경하는 혜선 님이 어리석은 중생의 애인이 되어줄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정말이지?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지?”
“그래. 오늘 이 거룩한 여신님이 인심 쓴다.”
둘은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터미널 근처 모텔을 향해 걸어갔다. 명훈이 모텔 문을 열자 오래된 모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방향제로 애써 덮으려고 했으나 건물 냄새와 뒤섞여서 콧등을 찡그리게 했다.
“훈련소 가는 거야? 여기 숙박부에 적고, 202호로 가. 열쇠는 이거 가져가고. 5만 원이야.”
모텔 계산대 할머니는 수만 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명훈은 숙박부를 기록하고 열쇠를 받아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가볍게 올라탔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한 층 올라가는 데 시간이 왜 이리 더디게 가는지. 명훈이 침을 꼴칵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두 번째 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202호.
명훈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번호다.
명훈에게 첫 여자는 수정이가 아니라 혜선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첫사랑은 수정이고, 첫 여자는 혜선이였다.
입대 전 친구들이 총각 딱지를 떼준다고 명훈이를 사창가로 데리고 간 적이 있었지만, 명훈은 관계를 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것도 있었지만 첫 여자가 사창가 여자이기를 원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는 좋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대화만 하다가 나왔다. 그래야 수정이를 다시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지금 명훈의 눈앞에는 그 유명한 5월의 여신 혜선이가 있었다. 명훈은 첫사랑이 수정이지만 첫 여자는 혜선이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꼭 첫사랑이 첫 여자일 필요는 없잖아. 수정이는 나를 싫어하고, 혜선이는 나를 위해 여기까지 따라와 주었어. 지금 내 사랑은 수정이가 아니라 혜선이가 되어야 해. 그래, 수정이는 지우고 혜선이만 생각하자.’
2. 첫 남자
혜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난 명훈이를 좋아했어. 아니 지금도 좋아해.’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거울에 보였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혜선은 가슴 깊이 숨겨둔 명훈에 대한 감정을 불러냈다.
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혜선은 명훈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명훈의 눈이 커지면서 혜선을 바라봤다.
“명훈아! 10년 전, 그때 날 보호해줘서 고마웠어!”
“10년 전?”
혜선은 명훈의 놀란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응, 10년 전 잠신초 3학년 1반 전학생 정혜선.”
“잠신초? 정혜선? 그럼 전학 와서 왕따 당했던…, 코 흘리기 정혜선?”
“그래. 맞아. 코 흘린다며 놀리던 아이들을 네가 혼내줬잖아. 아무도 말 걸지 않는 나를 네가 보호해줬잖아. 그런 너를 못마땅해하던 덩치 큰 상구하고 싸우기도 했었고.”
“그래. 기억난다. 상구한테는 내가 많이 맞았지.”
“그일 이후로 아이들이 날 안 놀렸어. 그때 넌 나의 수호신이었지.”
명훈은 옛날 어느 순간에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 솟아올랐다. 본능적으로 보호해주고 싶은 감정.
“그래. 정혜선. 왜 진작 못 알아봤을까? 말을 하지 그랬어?”
“대학 와서 처음 널 봤을 때 난 너인 줄 알았어. 넌 날 못 알아보더라고. 그래서 언제까지 못 알아보나 지켜봤지. 그런데 네가 수정이한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내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도와주려면 내 존재를 모르는 게 나을 거 같았어. 그래서 말 안 했었어.”
“그랬었구나. 그래서 지금은 네가 날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되시겠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네. 느닷없이 네가 나를 응급실로 데리고 간 거 하며, 여기까지 같이 와준 거 하며….”
둘은 과거 한순간을 함께했던 기억을 소환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혜선은 명훈의 손을 아직 가슴에 대고 있었다. 가슴 깊이 우러난 옛 호의에 대한 감사함이 본능과 결합하는 순간이었다. 명훈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혜선의 심장을 마구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혜선은 명훈과 단둘이 있는 이 시간을 대학 와서 명훈을 본 그 순간부터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혜선의 깊고 그윽한 욕망의 시선에 명훈은 스르르 녹아버렸다. 그 어떤 힘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어느덧 두 입술이 포개졌다. 혜선이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며 침을 삼키는 순간 명훈의 혀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헉, 하악
혜선은 혀에서부터 전해지는 자극에 온몸이 떨리면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명훈의 손이 혜선의 머리를 감싸자 혜선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명훈은 딥키스를 했다. 혜선의 가슴은 점점 탱탱해졌다. 명훈은 혜선의 목과 어깨를 따라 촉촉한 타액의 흔적을 남겼다. 혜선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빠른 손놀림으로 벗었다. 입은 자석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은 채 명훈도 옷을 벗었다. 둘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몸을 감싸는 쾌락의 통증과 소름은 심장 박동을 더 빠르게 끌어올렸다.
혜선은 이미 촉촉해지고 민감해져서 명훈을 끌어당기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명훈의 불기둥이 흥건히 젖은 혜선에게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한 몸이 되었다.
명훈의 첫 여자, 혜선의 첫 남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악.
헉.
혜선은 명훈을 뜨겁게 받아들였다.
아래부터 전해지는 부드럽고 꽉 찬 느낌이 쾌감을 정점에 이르게 했다. 위, 아래 위치를 바꿀 때마다 정점을 두 번 세 번 맛보게 했다. 혜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미친 듯이 신음했다.
“더 세게, 나 미칠 거 같아!”
강렬한 몸짓의 욕망이 캠프파이어처럼 활활 타올랐다.
하악. 헉
아악. 악. 악. 악
몸서리치며 마구 쏟아내는 신음소리에 쾌락의 끝에서 수천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혜선은 하늘 끝에서 땅끝으로 떨어지는 듯 내장이 모두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명훈은 로켓이 화염을 일으키며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 기분이었다. 쾌감이 최대치로 방출되는 순간 둘은 무상무념 무아지경에 도달했다.
하악, 하악
휴우, 휴우
둘은 하나가 된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이마와 얼굴에는 모든 세포가 함께 반응한 후의 강렬한 생기로 넘쳐났다.
“혜선아, 넌 나의 첫 여자야.”
“나도 네가 첫 남자야.”
명훈은 30년 전 행복한 순간을 떠올렸다. 조용히 눈을 감자 흐르지 않는 눈물이 눈가에 방울져 맺혔다.
‘그날 혜선을 혼자 가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다시 현재로 - 수정과 함께 있는 제주도)
지금 자신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수정의 모습을 바라봤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복수, 후회, 원망, 그리움, 사랑, 본능….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수정을 보며 30년 전 백수정은 이명훈을 관심도 두지 않았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의뢰인의 요구를 들어줘야겠지! 그래.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명훈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무성 카메라 앱을 열었다. 그리고 수정의 모습을 촬영했다. 욕망에 눈을 뜬 여자 한 컷, 지금부터라도 여자가 되고 싶은 여자 한 컷,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은 여자 한 컷, 혜선의 죽음과 연결된 여자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