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비밀 남녀

추억을 소환하다. 첫 미팅의 남녀

by 작가 조바르

1991년 4월 4일, 신촌 <Y 대포 민속주점>, 구석진 자리에 명훈이 피 묻은 손으로 막걸릿잔을 연신 비우고 있다. 벌써 두 주전자째다. 주점 안에는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장님. 사장님. 음악 좀 바꿔줘요.”


세상 살기를 포기라도 한 듯이 명훈은 사장을 부르며 음악을 바꿔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학생, 그만 마시고 가지 그래. 피투성이로 들어와서는……. 술도 많이 마셨구먼.”

주점 여사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명훈을 달래듯이 말했다.


“아, 됐고요. 음악 좀 바꿔줘요. 조용필의 그 뭐냐, 아, <꿈>, <꿈>으로 틀어줘요. 전 심신이 싫어요. 아니 그 노래가 싫어요…….”


명훈은 음악을 바꿔 달라고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곤두박았다. 마치 총 맞은 사람처럼 아무런 브레이크 없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명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지독한 알코올 냄새와 하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부셨지만 이내 응급실임을 알았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때 하얀 캡을 쓴 간호사가 명훈을 보며 다가왔다.

“학생.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어요. 팔 골절이 의심되니까 그대로 있어요.”


술에 취해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오는 학생들이 자주 있었다. 그래도 명훈은 술주정하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죠?”


명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친구분이 데리고 왔는데 지금 안 보이네요. 조금 기다려봐요.”

간호사는 짧게 말하고 다른 환자에게 갔다.

‘친구가 데리고 왔다고? 누구지? 분명 나 혼자 술 마셨는데….’ 명훈은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응급실 한쪽 벽면에 TV가 있었다. 마침 <가요톱10>이 재방송 중이었다. ‘네 다음은 혜성같이 나타난 신인가수입니다.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가 5위를 차지했습니다.’ ♬♪ 그리움 두고서 가지는 마~…….

심신의 노래가 나오자 명훈은 주점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가늘게 떠올랐다.

‘그래 이 노래를 꺼달라고 했었지. 다른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어. 그다음에는…. 아, 제기랄. 도무지 생각이 안 나네.’

명훈은 조각난 기억들을 얼기설기 맞추려고 애를 썼다.


“정신 차렸네?.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명훈이 고개를 돌리자 같은 과 친구 정혜선이 서 있었다. 흰색 청반바지에 소매가 없는 하얀 민소매 셔츠를 입은 혜선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보기에는 청순함 그 자체인데 실제론 거리낌 없이 털털한 친구였다.


“혜선아, 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나를 응급실로 데리고 온 거야?”

“아니. 정확하게는 119 아저씨가 데리고 왔지. 난 신고만 했고.”

“그랬구나. 미안해. 고맙고.”

“술 작작 마셔라. 그러다 죽는다. 그래도 사랑 땜에 마셨다니 로맨티시스트네. 간다. 몸조리 잘해라.”

“…….”


혜선은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 한심하다는 듯이 눈으로 레이저를 쏘고는 가버렸다. 명훈은 그런 혜선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혜선이 같이 예쁘고 매력적인 얘가 나를 병원까지 데리고 왔다니 믿어지지 않아. 160㎝의 긴 머리. 오뚝한 콧날과 쌍꺼풀 없는 눈. 잘록한 허리. 긴 생머리 때문에 환생한 조선 미인이라는 별명까지 있는 혜선이가 아닌가!’


실제 그랬다. 학교에서 혜선이 지나가면 남자들은 넋을 잃고 쳐다봤다. 그런데 성격은 남자처럼 털털했다. 완전 ‘인싸’ 그 자체였다. 명훈은 혜선이가 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말도 한 번 섞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세계에 있는 혜선이가 자신을 응급실로 데리고 온 것이다.

‘혜선이가 가면서 내가 사랑 때문에 마셨다고 했지? 그래, 맞아. 태식 선배! 내가 태식 선배한테 결투를 신청했어. 맞아, 이제야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네.’


명훈은 혜선의 말에서 기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래. 수정이! 태식 선배는 지금 수정이를 가지고 노는 거야. 애인이 있으면서 양다리를…….’

잠시 멍하니 있던 명훈은 태식 선배를 떠올리며 기억을 찾기 시작했다.

(6시간 전. 학교 정문 앞.)


“선배. 할 말 있어요. 잠깐이면 돼요.”

“야야, 뭐 결투라도 신청할 자세다. 나 바빠. 다음에 보자.”

“야, 김태식. 잠깐이면 된다고.”


명훈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뭐야, 이 새끼야. 야. 김태식?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지금 선배한테 반말했냐?”

“그래. 반말했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한테까지 선배 대접해줄 생각 없다. 왜?”

태식은 가방을 명훈에게 던지면서 달려들었다. 명훈은 잽싸게 가방을 피하며 달려드는 태식의 얼굴에 정확하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태식은 순간 중심을 잃었지만 큰 키와 팔로 명훈의 상체를 잡았다. 둘은 뒤엉켜 바닥에 넘어졌다. 순식간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만든 원형 링에서 두 사람은 올라서고 깔리고를 반복하며 연신 주먹을 날렸다. 완전 개싸움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둘 다 코피가 터졌고 주먹에는 피가 묻어서 날리는 주먹마다 핏자국이 새겨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수정이가 들어왔다.

‘뭔 구경거리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있지?’

명훈은 태식을 깔고 앉아서 주먹을 날릴 타이밍이었다.


“꺅, 태식 선배!”


명훈은 수정의 목소리를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잠시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태식은 명훈을 밀어내고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때부터 명훈은 주먹 한 방 날리지 못하고 그대로 맞기만 했다. 수정이가 태식을 부르는 목소리에 왠지 선배를 때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싸움은 끝났다. 명훈이 더 저항하지 못하자 태식은 욕을 하며 일어섰다.


“너 이 새끼 운 좋은 줄 알아. 오늘은 내가 여기까지만 한다. 한 번 더 그러면 죽을 줄 알아.”


태식이 수정이를 알아봤다. 수정은 눈물을 흘리며 태식에게 다가섰다. 가방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줬다. 명훈은 이 모습을 넘어진 상태로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싸움이 끝났다며 자리를 떠났다.


“아, x 발. 이게 뭐야. 정의가 항상 이겨야 하는 거 아냐? 이건 아니지. 수정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 바람둥이 녀석을 좋아하고. 지켜주려던 난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고. 세상 참 더럽다.”


명훈은 실성한 사람처럼 나지막이 혼잣말로 지껄였다.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명훈의 말을 들은 여학생이 있었다. 정혜선! 그녀는 명훈의 말이 끝나자 뒤도 안 보고 가버렸다.

명훈은 수정이를 대학 1학년 첫 미팅에서 만났다.

체육교육학과 남학생 3명, 중어중문학과 여학생 3명. 신촌 <Y 포대 민속주점>.

명훈은 맞은 편에 앉은 수정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건가?’

명훈은 정신을 못 차리고 좋은 티를 팍팍 냈다.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동자가 커지면서 머릿속에서 폭죽이 연신 터졌다. 20대 혈기왕성한 사랑 세포는 명훈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딱, 한 번의 만남. 그게 다였는데 명훈은 한 여자에게 30년간 집착하며 그냥 수정 바라기로 인생이 굳어버렸다.

학교 앞 개싸움 1년 후 명훈은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군대 가기 전에는 꼭 고백하고 말 거야.’

명훈의 집착은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다. 다만 수정의 눈에 띄지 않게 바라보는 게 스토커와는 차원이 달랐다.

명훈의 입대 환송 술자리.

친한 친구들만 모였다. 그런데 혜선이도 왔다. 혜선이가 <Y 주점>에서 명훈의 환송 술자리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자애들이 하나둘씩 더 모이기 시작했다. 혜선이는 늘 남자들을 구름같이 몰고 다녔다.

“어이, 로맨티시스트!, 고백은 하고 가는 거냐?”

“…….”

혜선의 돌발 질문에 명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명훈이가 술 석 잔을 연거푸 마시고 잔을 탁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나, 지금 고백하러 간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백수정에게 간다.”

명훈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그만둬라. 술 먹고 몸도 못 가누면서 무슨 고백이냐?”

친구들이 말렸다. 명훈은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점 밖으로 나갔다. 친구들이 따라가면서 말렸지만 고집불통이었다.

“놔둬라. 저렇게라도 안 하면 상사병 나서 죽을 거다.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바보. 아마 수정이가 이런 널 보면 있던 정도 떨어질 거다.”


혜선이가 한 말에 명훈은 발길을 멈췄다. 성당 옆 가로등 아래서 더는 발을 떼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울부짖었다.


“아, 사랑이 이토록 괴로운 건가? 내 맘 몰라주는 수정이를 잊어버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명훈은 혜선을 붙잡고 울었다. 평상시 같으면 혜선에게 말도 한마디 걸지 못하는 명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했다.


“혜선아, 고맙다. 내 이야기 들어줘서.”

“그래. 정신 차리고. 내일 잘 입대해라. 휴가 나오면 연락하고.”


혜선이는 명훈을 일으켜주고 집으로 갔다.

명훈은 다시 주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혜선이와 명훈이가 나간 후 그 많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아무도 없었다. 명훈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가서 다시 주문했다.


“사장님. 여기 막걸리요. 안주도 주시고요. 모둠전으로….”


명훈은 수정을 잊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서 벽을 주먹으로 쳤다. 주먹이 까지고 피가 났다. 마시지도 못하는 막걸리를 두 주전자째 들이키고 있다. 아니 처음부터 치면 그 두 배는 마셨을 거다.

명훈은 수정을 만나고 난 후부터 노래방에만 가면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만 불렀다. 그럴 때면 친구들이 잘해보라고 응원해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노래가 듣기 싫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명훈은 술기운에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런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두 여자가 있었다. 혜선이와 수정이였다. 혜선이 하숙집에 있는 수정이를 불러내서 명훈이가 있는 주점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혜선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혜선에게 말해주었다. 명훈이가 태식 선배와 왜 싸웠는지, 지금 왜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는지….

“내가 아는 명훈이는 순정파야. 너만 좋아해. 그런데 표현이 서툴고 용기를 내지 못해서 네 주변만 맴돌고 있었던 거야.”

“그랬구나. 나도 명훈이가 좋은 애라는 걸 알아. 그런데 왜 말을 못했을까?”

“워낙 부끄럼이 많아서. 우리 과 내에서도 대화를 해보지 않은 친구가 있을 정도야. 특히 나한테는 말도 못 걸더라고.”

“…….”


수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혜선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혜선이 명훈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정아. 명훈이는 진심으로 널 좋아해. 태식 선배처럼 양다리 걸치는 남자보다는 훨씬 낫다고 봐.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니까 난 여기까지만 말할게.”

“혜선아, 혹시 너……. 아니야.”

이제 선택은 수정의 몫이었다. 명훈의 운명이 걸린 수정의 선택을 모른 채 명훈은 고개를 탁자에 곤두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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