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는 맞바람?
낯선 남자,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남자, 그런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한 남자. 수정은 오래간만에 설렘, 편안함, 그리고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명훈에게 무엇을 바래서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명훈에게 감사한 마음일 수도 있다. 대화 주제나 보이는 풍경도 지금껏 억눌린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집을 나온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선에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기기로 했다.
“술을 못하시면 음료수를 드셔도 됩니다.”
명훈은 수정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블루나잇’을 주문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말했다.
“아니에요. 낮술 한 번 마셔보죠. 여기서는 못 알아볼 부모님도 안 계시니까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적당히만 마시면 됩니다. 저도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못해요.”
직사각형의 길쭉한 접시 위에 커다란 갈치구이가 통으로 올라왔다. 웨이터는 현장에서 가시를 발라냈다. 갈치구이 특유의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숟가락 하나로 펼쳐지는 해체 쇼의 마지막은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 살 위로 레몬을 뿌리는 거였다. 그 순간 참아왔던 침이 꼴칵하고 넘어갔다. 명훈은 소주잔에 ‘블루나잇’을 따랐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즐거운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누구의 엄마도 아니고, 누구의 아내도 아니고, 누구의 딸도 아닌 인간 백수정, 그 자체로서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화이터 크리스털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하여!”
“호호호, 정말 그러기에요? 좋아요. 상처받은 영혼이 후시딘처럼 힐링하는 제주도를 위하여!”
수정은 지금 영혼의 상처에 후시딘을 바르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원샷을 날렸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쫘르르한 느낌. 이런 맛에 소주를 마시는가? 그렇다면 몇 잔이라도 더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술잔이 돌고 새 ‘블루나잇’이 한 병, 두 병 테이블 위에 줄을 맞춰 세워졌다.
“명훈 씨. 나는 이번 여행에서 나 자신을 찾고 싶어요.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 자신을 찾는 게 우선이에요. 꽉 막힌 가슴속 응어리를 어떻게 하면 풀어낼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수정은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를 명훈에게 하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한가지입니다. 좀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죠.”
명훈은 이런 문제에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말했다.
“확실한 방법이 있으면 해볼게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수정은 명훈의 입술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재촉하듯이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준다.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명훈은 이 방법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처세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바람피우면 맞바람 피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받은 만큼 되돌려줘라!”
수정은 잠시 명훈의 말을 검증이라도 하듯이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말했다.
“좋아요. 명훈 씨 말대로 한번 해보죠. 뭐부터 하면 될까요?”
수정은 마치 불도저라도 된 듯이 바로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했다. 명훈의 말을 본능적으로 재빨리 이해한 것이다.
명훈은 수정의 적극적인 표현에 움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담자가 되어 대화를 이어갔다. 그 역시 수정에게 후시딘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로 생각했다.
“자, 그럼 먼저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어차피 제가 수정 씨를 도와준다고 생각했으니까 제대로 도와드리려면 문제의 근원이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수정 씨 남편의 문제는 뭔가요? 무엇이 수정 씨를 힘들게 하고 있죠?”
수정은 그냥은 힘들다는 듯이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 취기의 힘을 빌려 가슴속 응어리진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남편은 성(性)적으로 문제가 많아요. 술 먹으면 강제로 섹스를 해요. 제가 싫다고 하면 갑자기 야수로 변해요. 그럴 때마다 수치심으로 참을 수가 없어요.”
“그것뿐인가요?”
명훈은 그것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이건 제가 참. 말하기 뭐한데요.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수정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명훈은 그런 수정을 보며 수정의 빈 잔에 소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응어리진 상처를 모두 끄집어내야만 치유가 됩니다. 괜찮으니 말씀해보세요.”
“네. 사실은 남편에게 여자가 있어요. 남편이 술을 먹는 날은 그 여자와 섹스를 한 날이에요.”
명훈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네? 설마?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수정은 명훈이 따라준 소주잔을 다시 들이키며 말했다.
“남편이 결혼 전에 만났던 여자가 1년 전에 이혼했어요. 그 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에게 연락해서 친구처럼 만나더라고요. 그 모습을 제 친구가 보았고 제가 현장을 덮쳤어요. 그때 남편이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생각하는 그런 불륜 같은 거 아니라면서, 그냥 친한 친구처럼 지낸다고 오히려 저를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말을 믿었나요?”
“처음에는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린가 했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아니라며 같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렇게 믿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거짓이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남편이 술 먹고 강제로 섹스를 하고 나서 곯아떨어졌는데 카톡이 계속 오는 거예요. 그래서 보지 말까 하다가 급한 내용인가 싶어서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충격적인 말이 있더라고요.”
“그 여자한테서 온 카톡? 뭐라고 하던가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자기랑 사랑을 나누고 나면 나는 자기 여자라는 거에 행복해. 오늘 정말 좋았어.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뚝 떨어지는 황홀한 기분이었어. 이제라도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행복해. 사랑해.’라고 왔더라고요. 순간 저는 충격에 빠졌어요. 이 인간이 하루에 두 여자와 섹스를 해? 그년이랑은 맨정신에 하고 나한테는 술 먹고 강제로 했단 말이지! 너무 분하고 분해서 자고 있는 남편을 죽여버리고 싶더라고요.”
“남편이 수정 씨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아나요?”
“아뇨. 전혀 모를 거예요. 제가 일단 모른 척 했거든요.”
명훈은 수정의 응어리진 상처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수정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자, 제 마음속의 병을 보셨으니 처방전을 주셔야죠. 작가님. 처방전을 위하여!”
수정과 명훈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명훈은 잔을 힘주어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한 후 탁탁탁 치는 망치처럼.
“자, 처방전 들어갑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첫 번째 처방전, 기대하시라. 바람에는 맞바람으로 대응한다. 보란 듯이 다른 남자와 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지금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복수하는 거다’라고 말이죠. 맞바람이면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니까, 새로 누군가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 행위 자체가 복수라고 생각하라는 거죠.”
“그다음에는요?”
수정은 이미 명훈의 말과 동시에 상상을 이어갔다.
“그다음에는 다시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겁니다. 이 사람과 남은 인생을 같이 살 수 있을지,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판단하는 것과 1:1, 공평하게 나도 복수했다는 생각에서 판단하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래도 남편이랑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시면 그때 이혼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다는 거죠. 그게 두 번째 처방전의 핵심입니다.”
명훈은 수정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조건 이혼만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 이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힐링 여행 같은 것은 이혼 후에 다녔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런 수정의 마음 상태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한 것이다.
“그럼 제가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섹스파트너를 어떻게 구하죠?”
수정은 자신이 먼저 요청하면 왠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명훈에게 물었다.
“하하하. 그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으니까요.”
명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탕하게 말했다.
수정은 명훈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예측할 수 있었다. 명훈은 그런 수정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대화, 오랜만에 대화가 되는 상대를 만나서 행복한 이 밤. 수정은 다음 장면을 생각하며 괄약근을 당겨 온몸 사랑 세포에 신호를 보냈다. 그건 머리가 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본능의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