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영혼에 후시딘 같은 힐링
왁자지껄한 소리에 수정은 눈을 떴다.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낯선 천장과 형광등이 보였다.
‘아, 제주도지!’
수정은 힘없이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어제 착륙하면서 긴장했던 근육이 뭉쳤다. 온몸을 맞은 것처럼 움직이기 어려웠다. 겹쳐지지 않은 커튼 사이로 제주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걸어갔다. ‘촤르르’ 커튼을 걷어내자 노란색 유채꽃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남녀 두 쌍이 행복을 담고 있었다. 문득 25년 전 신혼여행이 떠올랐다. 태식은 결혼만 하면 뭐든지 다 해줄 것만 같았다. 저 사람들도 20년 후에 지금과 같은 생각으로 살수 있을까?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모르면서 마냥 즐거운 모습이 오히려 애처로웠다. 25년 전에는 둘이었고, 10년 전에는 넷, 그런데 지금은 혼자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튕겨 나간 것처럼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래, 유채꽃이 예쁘게 피었는데 여기서 무슨 궁상이람. 밖으로 나가자.’
수정은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 셀카봉이 달린 삼각대 하나를 샀다. 계산하려고 카드를 꺼내는데 어제 받은 명함이 보였다. 그제야 명함을 자세히 보았다.
<사진작가 이명훈>
‘사진작가였구나!’
어제 일이 떠올렸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줄 알고 공포에 떨면서 옆 남자의 가슴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던 자신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정말 무서웠으니까! 그럴 수 있어!’
유채꽃 가장자리에 삼각대를 세우고 핸드폰을 연결했다. 처음엔 예쁜 꽃만 확대해서 찍었다. 바로 앞에 사진 찍으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 보였다. 꽃에 둘러싸여 향기가 진동했다. 수정은 3초 간격을 두고 꽃 사이로 들어갔다. 숨도 고르기 전에 카메라 셔트가 눌러졌다. 이번에는 5초를 설정했다. 겨우 자세를 잡고 찍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10초를 설정하려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진을 참 재밌게 찍으시네요.”
명함의 주인공 사진작가 이명훈이었다.
수정은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중에 반가움이 제일 컸다.
“아, 작가님이시군요.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명훈은 반가워하는 수정의 얼굴을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정상으로 돌아오셨네요. 이렇게 밝은 분인 줄 몰랐어요. 혼자서 사진도 즐겁게 찍고 계시고요.”
명훈은 멀리서 수정의 모습을 계속 지켜봤었다.
“호호호, 칭찬하시는 거 맞죠? 저 원래 혼자서도 잘 놀아요.”
수정은 애써 자신의 괴로움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사진 찍는 거 도와드릴까요?”
“아, 정말요? 사진작가님이 도와주시면 멋진 작품이 나올 거 같은데요.”
“사진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담아내는가가 중요하지요. 모델이 좋으시니까 좋은 작품이 될 거예요.”
명훈의 말은 전혀 작업 멘트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온 동네 오빠의 말처럼 들렸다.
“저는 백수정이라고 해요. 남들은 화이트 크리스털이라고 불러요.”
수정은 마치 20대 아가씨처럼 당당하게 화이트 크리스털을 외쳤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심장박동 수가 빨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네. 저는 이명훈이라고 합니다. 제주도에 한 번 오면 한 달 살이를 하죠. 4월, 10월, 1월, 이렇게 제주도의 자연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제 일입니다. 갑자기 멋진 주제가 생각나네요. 자연과 사람. 그리고 후시딘 같은 사랑.”
명훈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딱 궁금한 정도까지만 말하고 멈췄다.
‘자연과 사람은 알겠는데, 후시딘 같은 사랑은 뭐야?’
수정은 알 듯 말 듯 궁금증이 커졌다.
“역시 작가님은 다르시네요. 그런데 후시딘 같은 사랑은 뭐예요?”
명훈은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말했다.
“제주도에 혼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상처를 치유하려고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물론 수정 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그래서 자연이 주는 선물이 후시딘 같은 사랑이라는 거죠. 상처받은 영혼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주는 힐링 같은 거죠.”
수정은 순간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과 입술이 따로 놀았다.
“제주도가 주는 선물이네요. 저도 그 선물 맘껏 받고 싶은데요.”
“하하하, 오히려 제가 수정 씨 덕분에 새살이 돋아날 것 같네요.”
수정과 명훈은 오전 한나절을 유채꽃밭에서 사진 촬영기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수정은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정신없이 보내다보니 배가 고파졌다.
“제주도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어요. 갈치구이, 제주 흑돼지구이. 오늘 점심으로 갈치구이 어때요?”
수정은 좋다고 말했다.
“갈치구이 해체 쇼하는 것도 보고 싶네요. TV에서 봤는데 살만 남기고 가시를 발라내더라고요.”
“네. 해체 쇼까지 멋지게 하는 집을 알고 있어요. 갈까요?”
수정은 낯선 곳에서 낯선 남자의 차에 탄다는 것이 조금은 꺼림칙 했지만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명훈은 수정이 탈 수 있도록 보조석 차 문을 열어줬다. 수정이 앉으며 오른발을 넣자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차 앞을 돌아서 운전석으로 갔다. 수정은 들뜬 마음으로 명훈을 바라봤다. 어제 비행기 안에서 보여줬던 친절을 생각하면 절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수정을 태운 차는 해안도로를 따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상쾌함과 도로 중앙에 심겨 있는 야자수가 이국적인 낭만을 느끼게 했다.
“수정 씨. 천천히 가는 차는 외지에서 온 차고, 빨리 추월해서 가는 차는 제주 사람 차래요. 왜 그럴까요?”
“제주 사람은 매일 보는 풍경이라 별로 구경할 거리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수정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명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맞아요. 그런데 반만 맞아요. 관광객은 관광이 목적이니까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는 거고요, 제주 사람은 일하러 가는 게 목적이니까 빨리 달린다고 해요.”
“사진작가 아니랄까 봐서 관찰력이 뛰어나시네요.”
명훈은 수정을 한번 쳐다보며 수정이 했던 말을 똑같이 말했다.
“하하하, 칭찬하는 거 맞죠?”
“네. 칭찬 맞아요.”
(갈치구이 전문점)
입구에서 웨이팅 대기 순번을 발급하고 있었다. 다행히 앞에서 세 번째였다. 기다리는 동안 둘은 막 리마인드 웨딩을 마치고 여행 온 부부처럼 보였다. 수정은 그런 기분이 싫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명훈도 같은 생각인지 연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음 손님. 두 분이시죠? 혹시 예전에 앉으셨던 자리가 있으시면 그리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웨이터는 리마인드 웨딩을 하고 오는 중년 부부가 많다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우리는 이 집이 잘한다고 해서 처음 와보는데요. 창가 쪽으로 앉으면 좋겠네요.”
“네. 창가 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명훈은 수정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수정도 그저 웃었다.
명훈은 갈치구이와 제주 소주 ‘블루나잇’을 주문했다. 수정은 술을 잘 못 하지만 제주 소주라니, 그것도 낮술이라니 한번 마셔보고 싶었다. 야릇한 기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