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가 생겼다.
수정은 지금껏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하나 있다면 아이 둘을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는 것이다. 가장 잘못한 일은 태식의 가학적인 행위에 제대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결혼 후 남편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았던 삶은 인생의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마저 빼앗아 버렸다. 마흔이 되어서 처음으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했고, 쉰 살이 되어서는 조급함과 불안한 마음에 늘 우울했다. 남편에게 퍼붓지 못하는 말은 친구 수미에게 넋두리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어디 한 곳 해방구가 없었다.
수정은 이리저리 집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여자는 초라했다. 타고난 몸매와 긴 생머리로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눈가에 주름살이 늘었나 살피고 목주름을 펴는 동작만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다.
‘백수정, 정신 차려. 네 인생을 낭비하지 마. 뭐라도 하라고. 해. 하란 말이야.’
수정은 거울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렇게 살 순 없어. 나를 찾아야 해. 뭐라도 하자.’
수정은 해방구로 제주도를 생각했다. 혼자 떠나는 힐링 여행을 가보는 거야.
식탁 위에 편지 한 장 써놓았다. 태식이 언제 이 편지를 읽을지는 몰랐다. 상관없었다. 이제 그를 버릴 용기가 생겼고 불확실성에 도전할 용기도 생겼다. 제주행 비행기는 가장 비싼 시간대 좌석 하나만 남아 있었다. 지금껏 나를 위해 돈을 써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 나는 이 정도 사치는 누릴 자격은 있어.’
탑승시간까지 1시간이 남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공항 2층으로 올라갔다. 스카프와 선글라스를 판매하는 매장이 보였다. 칙칙하고 어두운 껍데기를 벗고 싶었다. 수정은 밝은 물방울 실크 스카프를 골랐다. 내친김에 선글라스도 골랐다. 가격표를 보는 순간 놀랐다. 머릿속 계산이 본능처럼 이어졌다.
‘이 돈이면 한달 생활비인데….’
수정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나도 충분히 누릴 수 있어.’ 수정은 점점 과감해지는 자신에게 박수를 보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한적한 국도로 벗어난 느낌이었다. 일상의 속도감도 달랐다. 그래도 아직은 불안한 여유, 딱 그 정도였다.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수정은 탑승구를 향했다. 비행기 탑승 40분 전.
수정은 카톡을 봤다. 늘 주기만 하던 자신의 카톡에는 아들, 딸, 남편에게 먼저 보낸 문자에 단답형 답변만 있었다. ‘읽씹’도 자주 있었다. 수정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화이트 크리스털? 개뿔, 벽돌 취급도 못 받는고 있잖아!’
메인보드에 이름을 바꿨다. ‘화이트 크리스털’ 대신 ‘해라’로 수정했다. 그리스 여신 이름 같았다. 그러나 수정이 생각해낸 ‘해라’는 뭐든지 도전하고 해보자는 의미였다. 어쩌면 자신을 향해 강한 주문을 거는 이름이었다.
‘그래 지금부터 난 해라야. 뭐든지 해볼 거야. 그래서 남은 인생은 후회 없이 살 거야!’
제주행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수정의 마음은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렜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불확실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는 여행이었다.
‘하느님, 저에게 불확실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설레는 마음도, 불안함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수정은 비행기에 오르면서 좌석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비행기 왼쪽 날개 바로 뒤 창 쪽 자리였다. 짐칸에 가방을 넣고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젊은 청춘남녀부터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정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누군가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수정은 가볍게 고개를 돌리면서 위아래 얼굴까지 스캔했다. 이럴 때 보면 여자의 능력은 참 대단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구두와 양말의 컬러까지 모두 본 것이다.
‘음, 패션 감각은 있는 분이네. 뭐 하는 분일까? 사업하는 분? 교수? 아니 아니야 무슨 상관이람. 정신 차리자 백수정. 아니 해라야’
비행기는 활주로를 미끄러지듯이 달리더니 하늘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땅 위의 집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마을,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아졌다.
‘저 작은 점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전투를 하고 있겠지! 나도 그중에 하나였을 거고. 이제는 나를 사랑하는 법만 생각하자. 내 편지를 읽으면 남편이 딸에게 연락할 거고, 무슨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전화하겠지. 그래도 안 받을 거야. 나를 찾을 때까지.’
수정은 다시 남편, 딸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삶이 불확실해질 때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던 존재가 가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그 가족으로 인해 존재의 불확실함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비행기 속도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사이에 제주도가 눈에 들어왔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 비행기는 곧 제주공항에 착륙합니다. 돌풍으로 인해 비행기가 흔들릴 수 있으니 좌석벨트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곧장 활주로에 바퀴를 내렸다. 그 순간 수정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활주로에 뒷바퀴가 닿는 순간 비행기가 다시 튕겨 하늘로 날아올랐다. 승객들이 무슨 일인지 웅성거리자 다시 안내방송이 나왔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돌풍으로 인해 다시 이륙했습니다. 현재 제주공항 근처에 강한 돌풍이 불고 있어서 다시 착륙할 예정이오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수정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비행기가 8분 정도 선회하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비행기는 다시 착륙을 시도했다. 바퀴가 내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상 관제탑과 비행장 주변 철조망이 보였다.
‘이번에는 무사히 착륙하겠지?’
수정은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치과 치료를 받을 때 ‘윙’하는 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치마를 움켜쥐던 손동작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꽤 활주로를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속력이 빨라지더니 다시 이륙하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착륙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기장은 돌풍 때문이라며 다시 안내방송을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불만과 불안의 말들이 쏟아졌다. 수정도 불안한 마음에 손까지 떨고 있었다. 비행기가 다시 선회하더니 세 번째 착륙을 시도했다. 그때였다. 수정은 가슴이 너무 벌렁거려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손도 심하게 떨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제주도가 워낙 돌풍이 심해서요. 괜찮으시다면 제 손을 잡으셔도 됩니다.”
수정은 자신을 안심시켜주려는 남자가 고마웠다.
“네. 감사합니다. 손이 너무 떨리니까 더 불안하네요.”
“여기 물을 마셔보세요. 조금씩 나눠서 넘기면 차분해질겁니다.”
수정은 물 한 병을 받아들고 조금씩 나눠서 마시려는데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자 남자가 옆에서 물병을 잡아주었다. 마치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듯이.
비행기는 다시 활주로로 진입했다. ‘쿵’하고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몸이 먼저 느꼈다. 수정은 순간 ‘으악’ 소리를 지르며 옆 남자 가슴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 남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비행기는 다시 이륙하지 않고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이제야 수정은 안심했다. 아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너무 창피해했다.
“아, 저, 죄,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일은 처음 겪어봐서요.”
수정의 부끄러움과는 달리 남자는 진심으로 걱정하듯이 말했다.
“이제 괜찮으세요? 다행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쪽이 손을 심하게 떨고 계시길래 오히려 제가 도와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불안함을 없애주더라고요. 사실 저도 불안했거든요. 하하하”
수정은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수정은 이번 비행기 착륙 사건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의 삶은 늘 불확실한 것에 대비하며 살아가는 거야. 내 마음대로 앞일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어.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야. 그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그래서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만 있으면 희망, 두려움, 가정, 소망, 예상, 의도 따위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현상일 뿐이야.’
출구로 나왔다. 제주도의 하늘은 맑았다. 공기도 서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고요.”
그 남자는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며 명함을 주었다.
‘뭐지? 이렇게 훅 들어오는 멘트는? 작업인가?’
수정은 오랜만에 싫지 않은 제안을 받은 것처럼 좋았지만 겉으로 내색하기에는 아닌 것 같아서 명함을 받아들고 지갑 속에 넣었다.
“네. 감사했어요. 즐거운 여행 하시고요.”
수정은 인사를 하고 방향을 돌려 택시 타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두근거리는 마음의 눈은 그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나를 찾는 여행을 하러 온 거지 연애하러 온 거는 아니잖아? 바보야 너도 연애 세포가 많이 죽었구나. 관심이 있으니까 명함까지 준거잖아. 그럼, 말을 이어갔어야지. 휭하니 되돌아서서 걸어가는 건 뭐야? 어이구 그러니 태식이한테 그렇게 당하면서 살았지.’
안에서 두 자아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서서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안 탈 거요?”
택시 기사가 창문을 내리면서 말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네. 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