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널 버릴 용기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by 작가 조바르

25년 2개월. 수정의 인내는 딱 거기까지였다.

혼자 떠난 여행길에 비가 스멀스멀 내렸다. ‘후두둑 후두둑’ 버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금세 굵어졌다. 수정의 마음도 요동치고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중년에는 딱 두 가지만 안 하면 돼.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마!’


오롯이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인데 수정은 과거를 후회했고 미래도 걱정하고 있었다.

51세, 두 딸의 엄마. 사업가 김태식의 아내로 25년을 살았다. 이혼을 결심한 지금 딱히 행복한 미래가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눈물이 목덜미를 타고 블라우스를 적셨다. 빗물만큼이나 굵어진 눈물에 앞을 볼 수 없었다. '인생이 이렇게 참담해지는구나! 딱히 갈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어. 헛살았어. 외로움의 바다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내가 뭘 할수 있을까?'


51세에 혼자 떠난 여행. 수정에게는 낮설고 두려운 해방일기의 첫 장이었다.


‘난 행복하지 않아. 행복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나를 다시 찾고 싶어. 내 이름 백수정을 찾고 싶어.’


버스는 올림픽대로를 따라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지하철의 북적거림이 없어서 좋았다. 여의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제주행 비행기는 2시간 후부터 탑승이었다. 수정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틀 전 새벽 4시)

태식은 그날도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수정은 혼자 감당해야 하는 밤이 고통스러웠다. 큰딸 유학 보내고, 둘째 딸 대학 기숙사로 보낸 후부터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다른 집은 남편이 가정적이어서 집안일도 도와주고 아내 눈치를 보며 산다는데 내 팔자는 왜 이럴까?’

수정은 떨리는 손을 말아쥐며 다짐했다.


‘오늘은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띠띠띠딕,

띠리리릭,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고주망태가 된 태식이 들어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비틀거리며 수정을 안으려 했다. 꼬인 혀와 술 냄새를 보니 여지없이 만땅으로 마셨다.

“사랑하능 마누롸아. 나 왔어이 꺽. 오늘은 꺽, 당신이 지인짜 꺽, 보고 싶었어.”

“빨리 들어가서 자요. 술만 먹으면 꼭 개가 되는 당신, 이제 지긋지긋해요.”

지금 껏 한번도 싫은 소리를 안했다. 그런데 이제는 해야 했다. 딸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꺽, 개? 얘들아, 엄마가 아빠보고 꺽, 개란다. 말이 되냐? 꺽”

“얘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빨리 씻고 자요.”

“뭐, 씻으라고? 꺽. 그렇지. 마누라 사랑하려면 꺽, 씻어야지.”


태식은 비틀거리며 바지를 벗었다. 와이셔츠는 단추를 제대로 벗지 못해 힘으로 뜯어버렸다. 그리고 샤워실로 향했다. 지금부터가 공포의 시간이었다. 술 취한 태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관계를 해야 잠이 들었다. 수정이 거부하면 힘으로 밀어붙이며 강제로 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강제로 당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샤워를 마친 태식은 벌거벗은 상태로 나왔다. 발목에는 덜 닦인 물이 흘러내렸다. 눈빛은 사냥감을 덮치려는 사자와 같았다.

“오늘은 절대 안 돼. 지금까지는 참았지만 이제 더는 못 참아. 당신이 이러는 거 명백하게 강간이야. 범죄 행위라고.”

“무슨 개소리야. 꺽. 마누라하고 하는 게 무슨 강간이야? 꺽, 이리 와. 꺽”


태식은 수정의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번만큼은 수정도 힘껏 버티며 손을 뿌리쳤다.

“이런, 꺽. 안 하던 짓을 하고 꺽. 그래. 꺽”


태식은 왼손으로 수정의 오른팔을 잡고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힘껏 밀며 침대로 끌고 갔다. 침대 앞에서 태식은 수정의 허벅지를 안고 보쌈하듯이 허리를 어깨 위에 ‘ㄱ’자로 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침대 위로 던졌다. 내동댕이치듯 던져진 수정은 더는 반항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지만, 더 크게 다치는 것보다 그냥 체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진작에 그랬, 꺽, 어야지, 꺽.”


태식은 수정의 흐느낌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사냥에 성공한 사자가 식사 전에 먹잇감을 누르고 있는 정복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짐승이 되어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나 또 병원 가기 싫어요. 제발. 제발”


태식은 아내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수정은 일부러 벗기기 어렵게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발정 난 짐승에게는 소용없었다. 허리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태식의 손은 거칠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리며 들어왔어도 이 순간만큼은 맨정신처럼 손놀림이 정확했다. 다만 손힘 조절이 안 되어 수정의 몸은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었다.


수정은 눈을 감고 체념했다. 눈물이 흘러 베개가 흥건해졌다. 다음 이어지는 행위의 결과는 딱 두 가지였다. 무지막지한 손으로 가슴을 주물러서 생기는 통증 1주일, 연약한 질 내부를 쉼 없이 문질러서 생긴 생채기로 2주일. 다음 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싹싹 비는 모습을 보며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 가라앉히기 25년.


숨을 헐떡거리며 술기운에 사정이 되지 않는 자신을 정력이 센 것으로 착각하는 멍청이. 오래 하는 것이 최고의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바보. 거칠고 힘이 넘치는 것이 태크닉이라고 생각하는 변태. 태식이 술을 먹지 않은 날은 의무감에 소리를 질러주곤 했지만 술 마시고 하는 날은 그냥 강간 그 자체였다.

힘겨운 사투가 끝났다. 태식은 밤꽃 냄새나는 액체를 잔뜩 뿌려놓고 수정의 몸 위에 엎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술 냄새와 거친 숨소리, 90kg의 무거운 돌덩이가 50kg의 연약한 수정의 몸을 누르고 있었다. 어떤 X가 ‘여자는 자기 몸무게의 두 배 남자를 상대할 수 있다’라고 했던가?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과 찢어진 살갗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에 수정의 인내는 바닥을 드러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거대한 몸뚱이를 옆으로 밀어냈다. 태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수정은 티슈로 따가움을 참아가며 저주받을 액체를 닦아냈다. 피가 묻어나왔다.

‘이 인간 언젠가는 죽여버리고 말 거야. 너도 똑같이 당해봐야 해.’


태식을 노려보는 수정의 얼굴에 살기가 돋았다. 입술을 깨문 이빨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뻘건 피가 눈물과 범벅이 되어 태식의 얼굴에 떨어졌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다음 날.

태식은 수정의 입술이 깨져 있는 걸 봤다. 새벽에 자신이 또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여보, 미안해. 내가 또 그랬구나. 정말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용서해 줘.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잖아? 엉?”

“이젠 안 믿어. 당신. 똑바로 들어. 섹스 리스보다 더 심각한 게 뭔지 알아?”

“뭐. 뭔데?”

“원하지 않는 섹스야! 그건 성폭행이야. 강간이라고.”

수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태식은 성폭행이라는 말에 자신이 강간범이 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태식의 모습을 보며 수정은 분노 대신 용기를 가지기로 했다.


‘이런 미친X, 난 이제 널 버릴 용기가 생겼어.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내가 행복해질 권리를 찾을 거야. 잃어버린 나를 찾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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