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색소변성증

보이지 않게 된 날, 나는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by 율꽃



스물넷의 나는 아주 바빴다.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래서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들은 늘 “나중에”로 미뤄두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글자가 흐려졌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조명이 어두워서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를 넘기고, 또 하루를 넘겼다.


병원에서 들은 진단명은 길고 낯설었다.

망막색소변성증.

천천히 시야가 줄어들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날의 나는 그 말들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문장만 남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날 이후 세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밤길이 무서워졌고, 사람 많은 곳에서는 방향을 잃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들이 하나하나 조심스러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야는 줄어드는데 생각은 넓어졌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몰랐던 감정들이 자주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 불안, 그리고 인정하기 싫은 상실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다만,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


나는 더 천천히 걷게 되었고,

더 자주 멈추게 되었고,

그 멈춤 속에서 나 자신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결과로 나를 증명하려 했다면,

이제는 과정 속에 머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을 해내고,

내일의 불확실함을 오늘의 두려움으로 미리 끌어오지 않는 연습을 한다.


여전히 불안한 날도 많다.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을 산다.

완벽하지 않아도, 느리더라도.


어쩌면 인생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미래를,

누군가는 마음을,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보이지 않게 된 날,

나는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발견 하나만으로도,

이 삶은 계속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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