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눈물
왕칸과 테무친은 연합군이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테무친 쪽이 여러모로 불리했다. 말만 연합이지 왕칸은 때론 훼방꾼처럼 굴렀다. 왕칸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심지어 적과 대치한 상태서 사전 통보 없이 군대를 철수시키기도 했다.
홀로 남은 테무친의 부대는 위험한 고비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무친은 변함없이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 점이 자무카와 테무친의 결정적 차이였다. 테무친은 항상 신뢰를 지켰다. 자무카는 상황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부족의 식량마저 약탈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어떤 짓도 서슴지 않았다. 테무친은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상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신뢰는 단기적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여러 번 쌓이면 비로소 효력이 나타난다. 테무친의 방식은 효율적이지 못했지만 과거의 적들을 하나 둘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테무친은 약속을 지켰다. 몽골의 작은 부족장이 제국의 주인이 된 결정적 이유다. 큰 부족과 뛰어난 장수들이 속속 그의 아래로 몰려들었다.
테무친이 어느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았다. 즉시 독을 빼내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게 될 정도로 위중했다. 충성스런 부하 젤메가 밤 새 그의 상처에서 독을 빨아냈다. 테무친은 아침에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이상하게 땅 바닥에는 피가 한 방울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젤메가 테무친의 피를 모두 삼킨 탓이다. 몽골 족은 짐승을 죽일 때도 땅에 피를 적시지 않게 한다. 땅을 더럽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젤메는 40년을 테무친과 함께 지냈다. 젤메를 비롯한 그의 장수들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테무친을 배반한 장수는 없었다.
유목민의 가장 큰 과제는 전리품 분배였다.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면 전사들은 약탈에 열중했다. 이로 인해 상대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고 반격할 기회를 제공했다. 테무친은 완전한 승리를 선언할 때까지 약탈을 금지시켰다.
배분은 철저하게 공정을 꾀했다. 심지어 전사한 병사의 부인에게도 똑같은 몫을 나누어주었다. 초원의 과부들은 살길이 막막했다. 죽은 남편의 형제와 재혼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테무친의 어머니처럼 새 남편을 만나지 못하면 대개 굶어 죽었다. 테무친은 과부들에게도 똑같이 전리품을 차지할 기회를 주었다. 어머니의 어려움을 보고 자란 영향이 컸을 것이다.
테무친은 물론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 같은 명장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병사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렸다. 장군의 인기는 곧 병사들의 사기로 연결됐다. 인기의 이유는 원칙 있는 배분 때문이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흥망사’에서 “카이사르는 측근들에게 부와 명예를 아낌없이 나눠주었다”고 소개했다. 알렉산드로스나 테무친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무친의 세력은 어린 태풍처럼 크기를 불려나갔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엔 왕칸이 자무카 편에 붙었다.
왕칸은 믿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는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반 테무친 전선을 형성했다. 애초부터 왕칸은 테무친과 자무카의 알력을 은근히 즐겼다. 세력이 약한 테무친 편에 서서 보다 강한 자무카를 견제했다. 하지만 테무친이 몽골 초원의 새 강자로 부상하자 태도를 바꾸었다.
테무친은 그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화적 방식을 택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간 외교에서 가장 흔한 혼인 전략이었다. 큰 아들 주치와 왕칸의 딸의 혼인을 추진했다.
성사되면 왕칸의 마음을 돌려놓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왕칸은 테무친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부적으로 왕칸의 아들이 이 혼인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로써 테무친과 왕칸의 사이는 영영 멀어지게 됐다.
테무친은 모욕을 당했다. 그의 부하들이 발끈했다. 그들은 왕칸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테무친은 신중을 기했다.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왕칸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테무친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의 진심이 통해서 일까. 왕칸이 뒤늦게 승낙 의사를 전해왔다. 테무친의 맏아들과 왕칸의 딸이 혼인하면 조카와 삼촌은 사돈이 된다. 모든 갈등이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왕칸이 축하연을 열자고 제안했다. 이번엔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참모들의 의견은 달랐다.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결정한 사람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왕칸은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람은 갑자기 달라질 수 없다. 테무친의 부하들은 축하연에 가면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군을 말렸다.
유방과 항우 사이에 ‘홍문의 연’이라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항우의 기세에 눌린 유방은 홍문으로 그를 찾아갔다. 항우의 참모 범증은 이참에 유방을 죽여 화근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항우의 삼촌 항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왕칸의 초청은 ‘홍문의 연’과 마찬가지로 함정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왕칸은 과거에 여러 차례 테무친을 곤경에 빠트렸다. 그때마다 테무친은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테무친은 왕칸에 대한 신뢰를 거두려하지 않았다.
참모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테무친은 약간의 호위 병력만 대동한 채 왕칸을 찾아 떠났다. 천우신조일까. 도중에 왕칸의 수하 하나가 몰래 테무친을 찾아 왔다. 내일이면 왕칸과 만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축하연은 미끼일 뿐이고 실상 테무친을 해치기 위한 함정이라고 일러주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적은 가깝고 아군의 주력까지 거리는 너무 멀었다. 테무친은 급하게 군사들을 모았다. 대동한 군사의 수가 너무 적었다. 함정을 파놓은 적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강을 끼고 첫 전투가 벌어졌다. 역시 수적 열세가 문제였다. 테무친은 잽싸게 퇴각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셋째 아들 우구데이(나중에 2대 황제로 등극)와 장수 몇몇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그들을 찾아 헤맸다. 겨우 그들을 발견했을 때 우구데이는 목에 화살을 맞아 부상당한 상태였다. 아들의 모습을 본 테무친은 눈물을 흘렸다. 테무친이 부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테무친은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는 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