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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21.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14


 유럽과의 첫 만남      


메소포타미아는 두 개의 강을 의미한다. 강은 문명을 키워내는 곳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선 4대 문명 가운데 하나가 탄생했다. 

제라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이 지역은 치명적 약점을 지녔다. 그는 ‘총균쇠’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약점으로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효과적인 방어막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풍부한 수량과 평탄한 지형은 농사짓기에 편리했지만 방어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이곳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인류 최초의 제국 아카드부터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이 번갈아 이 지역을 장악했다.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다. 세상을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이분법으로 나눈 조로아스터교는 신(神) 역시 둘이었다. 

선을 상징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추종자 아리만이다.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은 불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다. 하지만 사산제국이 이슬람에 패하면서 배화교는 힘을 잃었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한 때 번성했던 도시 샤리 골골라는 나중에 ‘비명의 도시’로 불려졌다. 얼마나 많은 피와 절규가 넘쳐났기에 그런 끔찍한 이름을 얻었을까.      


호라즘 샤는 오늘 날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에 걸친 제국이었다. 호라즘 샤의 황제 무함마드는 중동 제일의 군주였다. 바그다드의 칼리프조차 그를 두려워했다. 칭기즈칸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영웅으로 불릴만 했다.  

호라즘 샤는 당대 최고 수준의 강철을 생산했다. 좋은 강철은 좋은 칼을 만들어냈다. 무기의 강도는 곧 전투력과 직결된다. 이 지역은 또 면직물 산업이 발달했다. 철과 면직물, 그리고 동서 무역의 요충지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으로 호라즘 샤는 번영을 누렸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강대국의 2대 조건이다. 

칭기즈칸은 부국인 호라즘 샤와의 교역을 원했다. 호라즘 샤로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칭기즈칸은 중동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사절단의 대부분을 무슬림으로 꾸렸다. 최대한 무함마드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사절단은 무함마드에게 바칠 중국의 비단과 은, 각종 옷감과 보석, 동물 등 다양한 품목들을 지니고 떠났다. 유감스럽게도 몽골 사절단은 사마르칸트에 이르지 못했다. 

그곳 국경수비대장에 의해 대부분 살해됐다. 칭기즈칸은 무함마드에게 다시 사절을 보내 수비대장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런데 문제가 꼬이려니 하필 수비대장이 무함마드의 친형제였다. 그들의 어머니는 당연히 아들의 처벌을 반대했다. 

외교적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수비대장에 대한 처벌 시늉만으로도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몽골과 칭기즈칸을 얕보았다. 툭하면 정치에 간여해온 어머니에게 강한 아들, 강한 왕으로 비춰지고 싶었다. 한 사람의 오판은 전 이슬람 세계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무함마드는 사절들의 얼굴을 망가뜨린 다음 돌려보냈다. 얼굴 훼손은 몽골족에겐 엄청난 모욕이었다.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은 예기치 않은 큰 폭풍을 불러 왔다. 그로 인해 세계사라는 대하의 흐름은 또 한 번 요동쳤다. 


번성을 누렸던 이슬람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단지 약탈할만한 것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태풍을 피해간 유럽은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유럽이 온전했던 이유는 너무 가난해서 몽골군의 수탈 의욕을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슬람의 도시에는 약탈물이 쌓여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칭기즈칸은 말을 살찌우기 시작했다. 전쟁 개시 전에 늘 하던 일이었다. 호라즘 샤에 참전한 칭기즈칸의 군사 수는 10만에서 15만 사이로 알려졌다. 무함마드의 군사 수는 40만을 헤아렸다. 

수적으로는 호라즘 샤가 앞섰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전술이 문제였다. 무함마드는 수비 위주의 안일한 전략을 구상했다. 지구전으로 몽골군을 지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몽골군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다. 그들은 따로 병참을 두지 않은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지닌 군대였다. 

몽골군은 원정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1인당 네 마리의 말을 몰고 다녔고, 병참부대 없이 독특한 자급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원정에서 지치기를 바라는 것은 손흥민이 후반 스피드를 잃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외교에 이은 두 번째 실수였다. 더구나 무함마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함마드와 칼리프는 중동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비극은 곧 칼리프에겐 즐거움이었다. 무함마드가 사라지면 중동은 오로지 칼리프의 세상이었다. 이 또한 착각으로 드러났지만. 

바그다드 역시 나중에 칭기즈칸의 손자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했다. 역사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원리를 가르친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려지는 법이다. 하지만 권력에 취하면 이 평범한 교훈을 금세 잊고 만다. 

몽골군은 어느 때보다 잔인했다. 몽골군은 공포라는 심리적 압박감을 최대한 이용했다. 전투에 앞서 상대에게 공포를 느끼도록 전략적 압박을 가했다. 공포전술은 나중에 유럽원정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됐다. 유럽인들은 몰려드는 피난민들이 전하는 몽골군의 과장된 악행 소문으로 인해 싸우기 전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손자의 전사 소식은 칭기즈칸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칭기즈칸이 가장 아끼던 손자였다. 그가 전사한 바미얀에선 단 한 명의 포로도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를 본 이슬람 역사가 이븐 알 아씨르는 “전능하신 신이 아담을 창조한 이래 최대의 재앙이자 가장 무서운 재난이었다”고 전했다. 칭기즈칸 연구가 잭 웨더포드에 따르면 몽골의 중앙아시아 침략 당시 사망자 수는 1500만 명에 달했다. 

수도 사마르칸트는 5일 만에 함락됐다. 주민의 다수는 살해됐고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이슬람 장인들은 포로가 되어 몽골 고원으로 끌려갔다. 동부 이란의 도시 발흐에는 지금도 당시의 파괴 흔적이 남아 있다. 무함마드는 몽골군을 피해 달아나다 카스피해 어느 섬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의 죽음은 뜻하지 않는 유산을 인류에게 남겼다. 그를 추격하던 제베과 수보타이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 기독교의 땅 유럽이었다. 몽골군은 우연히 기독교 왕국 조지아의 영토에 들어섰다. 몽골과 유럽의 역사적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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