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새 페미니스트 연재와 관련한 숏폼 영상을 올리고 난 다음 인스타그램에서 여러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 단연 눈에 띄는 댓글들은 외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페미니스트 일반에 대한 외모 비하 댓글부터
노골적인 외모 비하도 있었고,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찝찝한 외모평가도 들었다.
아름다운 분을 닮았다는 감사한 댓글도 있었다. 예쁘다 아니다 하는 평가보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이야기라서 반갑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여성, 특히 페미니스트의 외모는 너무 쉽게 평가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특히 '그 얼굴이면 페미니스트를 할 만 하다'거나 '예쁜 여자는 페미니즘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내 주위에 예쁜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줄줄이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만 그 역시 너무나도 외모평가적인 시선이니까 꾹 참으려 노력한다.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애인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기분이 좋을 테다. 페미니스트인 나도 당연히 기분이 좋다.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 길러지면서 학습된 결과든, 본능적인 것이든,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뻐야 한다’는 외모 코르셋을 벗으려고 그렇게나 노력한 게 무색하게 말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탈코르셋 운동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테다. 관련해서 수많은 기사, 연구 논문, 책도 나왔으며, 당시 <탈코일기>라는 만화책은 펀딩 금액 1억 9천 만 원을 기록했다. 10-20대 영 페미니스트 여성을 중심으로 빠르게 커졌던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에게만 요구되어 온 꾸밈과 외모에 대한 압박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으로, ‘디폴트 운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도 그때 화장, 긴 머리카락, 네일, 하이힐, 불편한 여성복 등을 버리고, 평생에 걸쳐 해오던 다이어트를 처음으로 관두는 경험을 했다.
그전까지 나는 외모에 대한 압박이 심한 편이었다. 페미니스트가 된 후로도, 페미니즘 스티커를 붙인 노트북을 밖에서 열기 위해서는 그날 상태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상태라는 건 외모 상태를 말하는 거다. 얼굴이 부은 것 같거나, 피부가 안 좋거나, 입은 옷이 별로면, 밖에서 페미니즘 스티커 하나조차 꺼내지 못했다. 내가 못 생긴 채로 페미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페미니스트는 못 생긴 여자들이 하는 거다’라는 조롱에 힘을 실어줄 테니, 내가 페미니즘 운동에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이상하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하게) 걱정을 했다.
이런 압박은 당연하게도 내가 자라온 세계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성형 의료 관광을 올 정도로 성형과 시술이 발달한 데다가, 여성 뷰티유튜버도 굉장히 많았으며, 아직도 많은 일터에서 여성의 적절한 데일리 메이크업이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성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여자가 예쁘면 고시 삼관왕'이란 오랜 농담부터, 여성의 외모를 비하하는 온갖 멸칭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여성의 외모는 하나의 ‘능력'인 것처럼 간주된다.
그런 세상에서 엄마가 나를 낳고 아빠에게 들은 첫마디는 “예쁘게 키워”였다. 7살부터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가 아무리 똑똑해도 (재능이 있어도) 예쁘지 않으면 (색을 갖추지 못하면) 별로 경쟁력이 없다는 거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여자는 귀걸이를 해야 예쁘다’며 귀를 뚫었고, 중학생 때 ‘키가 별로 안 커서 신을 수 있겠다’며 하이힐을 사주었다. 스무 살이 되자 뭔가 당연한 절차라는 듯 쌍꺼풀 수술과 치아교정을 시켰고, 코도 하고 싶으면 할래? 질문을 들었다. 피부에 뭐 작은 트러블이 나면 피부과에 가라고 혼났고. 조금만 살이 찌면 식욕억제제를 권유받았으며, 염색이나 펌을 안 하면 ‘촌년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이 모든 게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점이 나를 더 미치게 했다. 그런 나에게 당시 탈코르셋 운동은 해방 그 자체였다.
빈혈과 감기와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고, 발목 인대가 멀쩡할 때가 별로 없었는데, 코르셋을 벗자마자 건강을 되찾았다. 식욕억제제를 끊고 정상 체중이 되어 편한 옷을 입고,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만큼 잠잘 시간을 확보하면서, 전보다 체력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도 많이 변했고,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보다 내 몸과 감정, 생각,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몸은 내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자 나의 존재 그 자체였다. 누군가의 눈요기도 아니고 마음대로 평가하거나 지적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절감했다.
그런데! 그렇게 건강해지고 깨달음을 얻어도, 여전히 ‘예쁘고 싶다’는 욕망은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예전만큼 내 신체를 혐오하거나 불화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내 몸을 조각조각 나누어 평가하고 남과 비교할 때가 있다. 나를 섹슈얼하게 바라보는 이들의 눈으로 내 몸을 바라보면서 충분히 섹시한지, 매력적인지, 섹스할 만 한지 생각한다. 그냥 지나치는 남성, 우연히 옆에 앉은 남성, 나와 가까운 남성 모두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내가 어떤 옷을 걸치고 무슨 머리를 하고 얼마큼 꾸몄든 간에, 그냥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느끼길 바란다.
얼마 전 촬영한 몸기록 사진, 배에 근육 그림자가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예쁘다'는 칭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 말을 들으면 행복한 동시에 조금 불편하고, 불안하며, 찝찝하다. 분명히 내가 원하던 말이었는데, 예쁨 받고 칭찬받았는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는 거다. 온 세상이 여성의 외모를 자연스럽게 평가하고, 여성을 외모로‘만’ 평가하고,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성차별적인 구조 안에서, 남성에게 외모 칭찬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데가 있다. 나의 다른 면을 보지 않고 외모만 보고 만나는 남성도 싫지만, 반대로 내 외모를 칭찬하지 않으면서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나를 만나는 남성은 더욱 견딜 수 없다.
오늘 왜 더 예쁘다고 하지? 나 오늘 뭐가 다르지? 평소보다 오늘 예쁜 거면, 평소에는 충분히 예쁘지는 않다는 건가? 내가 덜 예쁘면 덜 좋아하는 건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안해진다. 그냥 쟤 눈에 나 예쁘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며 나 자신의 몸을 미워하면서 살아온 시절이 있어서 그게 쉽지 않다. 그렇게 예쁘다는 말은 계속해서 족쇄가 된다.
근데 또 그걸 알고 있으면서 또 그런 외모 칭찬을 계속 듣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욕망이 너무 답답하고, 스스로의 지위를 ‘남성에게 외모로 평가당하는 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아 찝찝하다. 시선의 권력을 내어주고, 나의 몸을 대상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해 버린 기분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해 놓고 남성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주체적으로 코르셋을 주워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울 때도 가끔 있다.
동시에 ‘화떡녀’나 ‘강남미인’ ‘성괴’ 등 여성이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비하하고 조롱해 온 맥락을 생각하면, ‘예쁘고 싶은 여성’을 무작정 비난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여성혐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의 외모가 자원이자 능력이 되는 사회를 규탄해야 하지만, 실제로 여성의 외모가 정말 자원이 되는 세상에서 여성들에게 그 자원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가? 나의 외모 역시 실제로 연애시장에서 뿐 아니라 그 어떤 사회활동에서도 나의 자원으로 기능한다. 이번 남미새 페미 연재 홍보 이미지에도 예쁘게 보이는 사진을 전략적으로 골라 넣으면서, 적당히 매력적인 사진일수록 더 눈에 띄는 홍보물이 될 거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
예쁘고 싶지만, 또 그만 예쁘고 싶은 이 마음, 대체 어째야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을 공유하는 페미니스트 자아와 남미새 자아는 머리를 기를지 말지, 립을 바를지 말지, 원피스를 입을지 말지 열심히 갈등하고 있다. 거대한 탈코르셋 흐름이 지나간 지금에도 도처에 코르셋은 넘쳐난다. 물리적인 코르셋이 아니라 마음속 코르셋도 끝나지 않는다. 아마 영원히 내 안의 코르셋과 싸우고 불화하면서 ‘탈코르셋' 중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