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유쾌한씨 Jun 28. 2024

그때 그 여름이 그립다

지금은 극장가나 방송가에서 납량 특집이 거의 사라졌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한 여름을 보냈다.


동네 친구들과 안방에 모여 강시가 나오는 영화를 함께 봤다. 불을 끈 다음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뻗으면 안방이 극장으로 바뀌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보면 텔레비전 화면에 검은 모자를 쓴 강시가 나타났다. 강시는 이마에 부적을 붙이면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일시적으로 서 있다가 부적이 떨어지면 사람을 공격했다. 주인공이 강시에게 잡힐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봤다. 강시는 상대가 바로 앞에 있어도 숨을 참으면 찾지 못했다. 강시를 피해 도망치던 주인공이 강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참으면 나도 그를 따라 숨을 참았다.

영화가 끝나면 밖으로 나가 강시 놀이를 했다. 술래인 사람이 강시 흉내를 내며 도망 다니는 사람을 잡았다.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술래는 강시처럼 양팔을 앞으로 뻗고 콩콩 뛰었고 다른 사람들은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뛰어다녔다. 비 오듯 땀을 흘려도 까르륵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강시 영화만큼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했다. 친구들과 자신이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연스럽게 무서운 이야기 배틀이 벌어졌다.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꾼이 되었다가 방청객이 되었다가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때는 유명한 도시 괴담이 많았다. 한국은행 총재의 딸이 살인을 당해 딸을 암시하는 것들을 돈에 숨겨놓았다는 김민지 괴담부터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는 여자가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닌다는 빨간 마스크 괴담, 한밤중 자유로에 눈 부분이 뚫려 있는 여성이 나타난다는 자유로 귀신 괴담, 홍콩으로 가던 할머니가 비행기 사고로 귀신이 되었다는 홍콩 할매 괴담까지 다양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날에는 세수를 하다가도 뭔지 모를 서늘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거나 집 외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혼자 못 갈 정도로 후유증이 있었다. 그럼에도 무서운 이야기에 중독이 되어 끊을 수가 없었다. 매운 음식에 중독되면 더 매운 음식을 찾듯이 더 무서운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주말 저녁이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폐가나 폐교 체험을 하는 납량 특집을 했다. 아빠, 엄마, 오빠와 함께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 통닭을 먹으며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봤다. 귀신 분장을 한 연기자가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치는 연예인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무서운 이야기보다 더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서일까. 무서운 이야기와 납량 특집으로 가득했던 여름이 사라졌다. 뙤약볕 아래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과 납량 특집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 보던 아빠도 사라졌다. 재개발로 고향이 사라지면서 동네 친구들과 헤어졌고 아빠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들과 딸이 좋아하는 통닭 날개를 건네주던 아빠가 보고 싶다. 무서운 이야기와 납량 특집으로 가득했던 그때 그 여름이, 그때 그 공간과 추억이 모두 그립다.


작가의 이전글 _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