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여인으로 태어나서 어디 그렇게 살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라고 어쩌면 너무 쉽게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시집살이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물론 2020년을 살고 있는 요즘 젊은 이십 대 여자들에게 그 말은 거리가 있을 테지만,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이제 거의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에게도 ‘시집’이란 그 첫 대면의 순간부터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음에는 분명하니까.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설원. 폭풍 설한의 그 광활한 들판은 나의 신행길이었다. 나는 그 들길을 ‘골고다의 길’이라 이름 했다. 삶과 진리를 향해 한없이 뻗어나간 십자가의 길. 그 길 앞에 서면 늘 천근 무게로 다가오는 근원 모를 중압감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작가의 말 도입부)
소설 『흐린 강 저편』의 맨 앞에 자리한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기에 더 그러했을 테지만 희연은 어쩌면 김현숙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가는 시가(媤家)를 향한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올랐던 ‘골고다의 길’에 비유하고 있다.
어쩜 그리도 적절한 비유를 찾은 것인지.
희연은 그 시절 명문여대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받기 전 잠시 알바를 하던 번역 사무실에서 회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가끔 들르는 경석을 만났다. 조용하고 어딘가 좀 그늘이 있어 보이는 검고 마르고 단단해 보이는 그야말로 향토적인 체취가 풍겨났던 경석은 세련되고 발랄한 희연에게는 어쩌면 싱그러운 파문이었을 것이다.
희연은 친정엄마 강 여사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석과 결혼을 했다. 경석을 사랑했고 그의 모든 것이 좋았을 테지만 어디 결혼생활이 실제로는 그 남자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덮어질 수 있던가? 남편 경석의 해외 연수로 인해 희연은 처음으로 홀로 구정을 쇠기 위해 시가를 찾는다. <시모와 이웃에 사는 큰 시누이, 순옥의 가족들이 왁자하니 마중을 나오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젠 낯익은 그러나 여전히 타인 같은 느낌으로 그 거리가 좀체 좁혀지질 않는 서먹한 얼굴들>(p23~24中) 이것이 그때 희연이 시가에서 시집식구들을 본 소회(所懷)이다.
전반적으로 희연이 그린 여자의 삶은 고되고 애달픈 것이었다.
『흐린 강 저편』 2화에 그려진 희연의 막내 시누이인 혜옥도 그렇다. 혜옥은 공부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포기한 채 농사와 집안일을 하다가 결국 시모의 하명으로 상경하여 맞벌이하는 큰아들 내외의 살림을 도맡게 된다. 물론 혜옥은 서울 아파트 생활에 잘 적응했고 요리, 청소, 세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 해냈다. 주말이면 희연은 임신으로 몸이 무거움에도 막내 시누이를 데리고 고궁, 유원지 등 서울 구경을 다녔고 어느 날은 희연이 졸업한 대학 캠퍼스도 구경시켜줬으며 단골 양장점에서 정성스레 혜옥의 옷을 맞춰주기도 했다.
희연의 이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혜옥이 고향의 친언니에게 쓴 장문의 편지에는 <오빠네 치다꺼리만 하다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할 때면 그만 콱 죽어버리고 싶어 아파트 베란다에 멍하니 서서 창문 열고 밖을 내다보다간 서울에서 어렵게 공부한 오빠 생각에 혀를 깨물며 죽고 싶은 마음을 참곤 합니다.>(p48~49中)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무리 시누이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아직 어린 혜옥의 눈에는 부족함 없이 대학 생활을 즐겼을 새언니의 모습이 마냥 좋게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희연이 나쁜 여자여서가 아니라 혜옥 스스로가 느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었음은 자명하다.
『흐린 강 저편』 3화에 그려진 희연의 시아제인 한석의 아내 계순 역시 자신이 살아온 삶에 지쳐서 도피하다시피 결혼을 선택한 여인이었다.
계순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귀여운 밝은 미소가 특징인 부산 아가씨였다. <저는 어디 살든 교회만 다닐 수 있다믄 젤로 행복헐 것 같어요. (중략) 맞선 보는 자리에서 걍 솔직허니 제가 다 말해부렀어요. 이 자리에서 서로 맘에 들믄 당장에 사진관 직행하여 약혼사진 한 장 팍 밖아불곤 혼인 날짜 잡자고 혔단께요.>(p70中)
얼마나 자신의 현재 삶에 지쳐있었으면 아직 나이 어린 처녀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교회만 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 소박한 꿈을 가진 처녀, 그러나 계순 그녀에게 펼쳐진 결혼 후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엘리트로서 일찍 상경한 장남 경석을 대신하여 농사일과 온갖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하는 한석은 시모에게는 집안의 기둥이며, 정신적 지주였기에 그런 한석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시모와의 갈등도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병석에 누워 거동조차 불편한 시부의 병수발은 물론이요, 매사 바지런하고 빠르기로 소문난 시모와 함께 맞춰 산다는 것은 가혹한 현실이었으리라. 그나마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 때문에 도시에서 성장한 계순이 농촌으로 시집을 온 것이었으나 시모가 그런 것은 간과한 채 그저 일 욕심만을 앞세워 교회마저 자유로이 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을 때 계순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모와 계순의 갈등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남편 한석이 근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고, 그런 가운데 첫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계순은 눈물로 한석을 기다리고 계순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한석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 시모와 계순의 갈등은 어느 정도 완화된 듯했다.
하지만 계순이 딸만 내리 넷을 낳고 그런 계순을 보는 시모의 눈이 고을 리는 만무했다. 결국 임신 초기 입덧을 할 때 먹고 싶은 것 한 번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시집살이를 했던 계순의 모습은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나 역시 서글펐다. 차라리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뛰쳐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계순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모에게도 이유가 있었을 터 농한기, 서울 큰아들 집에 다니러 온 시모는 큰며느리 희연에게 자신의 마음에 묻어 둔 이야기를 꺼내어 토로한다. <갸는 대저 딸만 내리 낳은 게 넘 부끄럽지도 않다냐. 애를 가졌다고 장터에 쭈글트리고 앉아 혼자 군입정을 허다니! 우리 땐 당최 생각도 못헐 일이다. 뭐시냐. 그란께 나가 둘째를 가졌을 적인디, 하루는 복숭아가 워찌나 먹고 잪던지 지나가는 행상을 불러 보리쌀 한 되 주고 고것을 사먹었단께. 물에 대충 씻어 껍질도 안 까곤 겁나 맛나게 먹고 있는디 마실 갔던 엄니가 삽짝을 들어서는 것이여. 딱 들켰단께. 그 길로 엄니가 내 머리채를 움켜잡곤 동네가 떠나가게 소락데기를 질러쌌느디……. (중략) 싸나운 시엄씨 밑에서 나 고상허고 산 것은 하늘이나 알제 누가 다 알긋냐. 참말로 징허게 징글징글혔은께. 요즘 시집살인 시집살이도 아녀.>(p113~114中)
계순을 그리 모질게 시집살이 시킨 시모의 한 맺힌 토로, 어쩌면 자신이 당한 것과 비교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시모의 입장에선 당연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니까.
희연 역시 결혼 전 친정어머니 강여사가 그토록 심하게 자신의 결혼을 반대했던 까닭을 해를 거듭해가면서 더욱 절절하게 체감한다.
그럼에도 경석을 사랑했고 그를 택해서 결혼이라는 제도로 하나가 된 이상 장남인 경석이 짊어진 가족에 대한 중압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큰며느리인 자신을 대신해 시모를 모시는 계순에 대한 부채감 역시 희연을 얼마나 편치 못하게 했던가? 결국 집안의 제사를 본인이 가져가겠노라 과감하게 선언한다.
처음 제사를 가져오고 맞는 명절, 제수품 장만부터 손님을 맞기 위한 대청소, 김치 담그기, 목기 닦기 등등 간신히 홀로 차례 음식을 장만한 오후 고향에서 대거 상경한 시댁 식구들의 저녁 식사와 접대 등으로 혼비백산했던 밤 희연은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허나 그녀의 몸은 지쳤을지언정 마음만은 부채감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웠으리라.
세월도 그녀들의 굴곡진 시간을 따라 함께 흐르고 어느 청명한 가을 하루, 시모의 제안으로 희연과 계순, 수현과 막내며느리 미정까지 네 며느리가 모두 함께 소풍에 나섰던 날, 드넓은 김제평야를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만경강 하류 고요한 강줄기가 마침내 바다와 맞닿아 하나 되는 곳, 그곳에 망해사가 있었다.
희연은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짙은 쓸쓸함과 마주한다. 그것은 시집온 지 어느덧 십 수 년째, 7남매 모두 모여 떠들고 웃고 어울린 햇수도 이미 오래, 그럼에도 큰딸 유미의 대입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희연에게로 돌린 냉정한 경석과 스스로도 부족한 어미라는 한없는 자책에 시달렸던 희연 내면에서 발연된 쓸쓸함이었을 것이리라. 그런 희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오늘 내가 혀준 반지는 말허자믄 너그 내외덜 둘이 살다 험한 꼴 보드락두 걜대 헤지믄 안된다는, 이혼 금지 반지란께. (중략) 긍께 포도시 참고 또 참음서 걍 남인드키 살다보믄 더런 좋은 날도 안 있겄냐.>(p180中)
시모는 자식들에게 받아 고이 모은 용돈을 네 며느리들의 금반지를 사주는 데에 쓴다. 일명 ‘이혼금지 링’인 것이다. 이런 시모에게 아무도 감히 토를 달수 없었다. 그것은 백 마디 말 보다 슬프고도 애틋한 노모의 모정이 간절한 바람이 되어 그 반지에 담겼음을 네 며느리 모두 알고 있었을 테니까. ‘이혼금지 링’은 희연의 결혼생활을 되짚는 계기가 됐고 또한 결혼생활의 최대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해 준 일종의 드림캐쳐가 되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던 겨울, 시모는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희연이 급히 시모의 문병을 갔을 때 <시모는 자신의 베갯잇 속에서 곱게 수놓은 조그만 쌈지 하나를 꺼내어 그것을 희연에게 보이며 말했다. 요것이 바로 에미 니가 시집 올 때 해온 내 은비년디... 후제 나 죽고 나믄 뭐시냐, 지난 가실 우리가 놀러 갔던 강에 나가 요것을 물속에다 쪼깐 쫌 던져줬음 쓰겄다. 고렇큼 혀줄 수 있겄지. 에미야, 꼭 부탁헌다아. (중략) 어머님. 얼른 자리 털고 일어나셔요. 희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시모의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이 배어나왔다. 고맙다, 에미야. 근디 더 오래 살아 무덜 것이냐. 나사 인자 고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단께. 다믄 살아 생전 훌훌 쏘다니지 못헌 것이 포한이 되얏응께 죽어서락두 쪼깐 넓은 세상 귀경 다니믄 안 좋겄냐. 흐릿헌 만경강 바라보믄 한시반시도 맑은 날 읎이 살아 온 내 속 같아갖곤 걍 한량읎이 물길 따라 흐르고 싶었단께.>(p207~208中)
어쩌면 희연에게 남긴 이 말이 시모의 진정한 유언이었으리라. 그 해 겨울이 다 끝나갈 무렵, 시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삼우제를 위해 고향집에 남아있던 희연은 혼자 조용히 만경강 하구에서 시모가 남긴 마지막 유언을 실행한다.
<쉼 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그녀는 이윽고 소중히 가슴에 품고 온 시모의 은비녀를 꺼내어 강물 위에 띄웠다. 갓 시집와 심한 열병으로 머리채가 온통 통째 빠지는 상흔을 겪은 까닭에 평생 쪽머리를 고수하며 애지중지 몸에서 떼어내질 못하던 비녀. 더구나 희연이 혼수품으로 해 온 은비녀는 어딜 가든 늘 시모의 머리를 장식하던 애장품이었다. 어머님, 이제 부디 천상에 오르시어 넓은 세상 훨훨 다니며 평안과 안식 누리소서…….>(p215中)
전후 빈곤과 결핍 속에 일곱 자식 걱정에 한시도 맘 편할 날 없이 살아온 한 맺힌 삶, 겨우 열다섯 살에 시집와 한량없이 너른 들판을 감옥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시모, 어찌 그녀 역시 그런 삶을 원하여 그리 살았겠는가? 그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갔을 그 모든 순간에 어쩌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순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식 낳고 살다 보니 자신은 오간데 없고 그저 자식들만 있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여자로 며느리로 살면서 자식을 낳고 나 역시 나만의 ‘골고다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 희연 못지않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 시모의 은비녀가 늘 탁하기만 한 만경강 좁은 하구를 벗어나 더 멀리 넓은 바다로 떠내려가기를, 그 흐린 강 저편에 진정한 피안의 세계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