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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un 18. 2024

여보, 내가 왔어요!

남편을 재건할 때


미국에서 손자의 재롱에 빠져 지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걱정은 남편이었다. 남편이야말로 나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나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고 싶은 강력한 나의 바람을 어필하였다.

“당신도 나의 도움이 필요하고,  당신이 함께 있으면 나의 육아부담도 줄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요.”라고 남편을 설득해 보았지만  남편은 기어이 미국에 함께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손자를 돌보아야 하는데 자기까지 나와 함께 있으면 내게 너무 큰 부담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사실 아이돌보러 가는 길이 이만저만 걱정스러운 이 아니었다. 이 나이에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육체적으로도 무척 힘겨운 일이라는 주변 친구들의 염려를 많이 들은데다 아이 돌보는 일에 자신도 없었다.

출발 일이 가까워오자 아이를 업으려다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꿈까지 꾸었다. 등골이 오싹하였다. 그럴 때 남편이 나를 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아무리 설득해도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남편을 달래고 어르고 하다가 남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집안일을 봐줄 아주머니를 한 사람 구해놓고 미국으로 혼자 떠났다.


내가 그토록 애를 태운 이유는 남편이 처한 형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하인두암 수술 후 생명은 건졌으나 수술의 부작용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뱃줄에 의지해 살고 있다. 뱃줄로 경관영양식을 공급하면서 생명유지는 되고있으나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고 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조금 남은 목의 삼킴 기능이 쇠퇴할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결국에는 입으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먹는 량을 늘이기 위해  나나 남편은 음식섭취에 온 전력을 기울여왔다. 남편은 한 숟가락의 밥을 먹기 위해 거의 한 시간을 밥상을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음식을 조금 삼킬 때마다 기침이 너무 심해 나는 식탁에서, 남편은 독상을 받고 각자 식사를 하였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작은 상에 반찬을 조금씩 담고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였다. 남편의 기침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려 어떤 때는 내가 먼저 식사를 하고 남편의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남편 곁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희한하게도 남편이 한 숟가락의 식사를 마칠 때 눈이 떠졌다. 내가 없으면 남편은 혼자 상을 안고 앉아 기침을 연신 내뱉으며 고심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런 남편을 혼자 두고 나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 결심은 마치 물에 빠진 두 사람 중 누구를 살려야 할까 하는 고민과 마찬가지였다. 이제 기울어져 가는 남편과 새로이 생명을 얻은 손자 사이에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과제였다. 미국 아들내외가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아이를 낳아 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한편이라면 남편곁을 지켜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다른 한편이었다.

두 남자 사이의 딜레마에서 손자가 이겼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라면 나의 이런 결정을 남편과 나 사이에는 더 이상 DNA를 남길 가능성이 없으니 손자로 이어지는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 내가 손자를 선택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DNA 어쩌고 보다는 남편은 지혜로운 어른이니 스스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손자를 돌보면서도 남편걱정이 많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나의 아이돌보미 일이 공식적으로 끝나면 내 방에 돌아가 남편에게 전화를 내었다. 남편은 대개 그 시간쯤 점심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뭘 먹느냐고 물었더니 밥솥이 고장이 나서 아주머니가 냄비밥을 해주는데 누룽지가 생겨 그걸 삶아 먹으면 좀 넘어간다는 이야기였다.

“밥솥이 고장 났다고?”

나는 지금까지 멀쩡하던 밥솥이 웬 고장인가 하고 의아해하였지만 누룽지라도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라며 억지로 위안을 삼았다.


미국에서 아들내외와 지내면서 나는 새삼 남편의 존재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남편은 다정한 사람인지라 꼭 내게 아침식사는 했는지를 묻고, 꼭 챙겨 먹어라는 소리를 잊지 않고 하였다. 그런데 아들은 제 아빠와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멋지게 내려 내게 한잔 권하기는 했으나 내가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렇게 쓰면 아들이 무심한 것같이 들리겠지만 아들내외는 새 생명을 돌보느라고 거의 옆을 볼 겨를이 없어보였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했다.

게다가 아들내외가 먹는 미국식 식생활이 내게  맞지 않았다. 부산의 딸인 나는 해산물 요리가 먹고 싶었지만 생선이나 게 요리를 하면(이곳의 던지너스 게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아들은 비린내 난다고 질색을 하면서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환기팬을 틀며 요란을 떨었다.  


무엇보다 아들내외는 과일을 먹지 않았다. 내가 과일을 먹지 못하면 잠 못 자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남편과 딸은 어디를 가든 내가 먹을 과일부터 확보하느라고 분주를 떨었다. 남편의 다정한 보살핌 속에서 지내던 나는 아들내외의 각자도생 방식에 적응을 잘 못하고 섭섭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미국에 갈 준비를 한답시고 친구 두 명과 고터에 편한 옷 몇 벌을 구하러 갔다. 너무 옷집이 많아 선택에 곤란을 겪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이것저것 예쁘고 편한 티셔츠와 바지 등을 추천해 주었다. 문제는 한 친구는 미혼이었고 또 한 친구는 두 아들이 결혼은 하였으나 애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라는 사실이었다.

미국에 가서 내가 아이를 업자 아이가 온 얼굴을 내 등에 비벼댔고 아이 양볼의 피부가 벌겋게 텄다. 며느리는 매눈을 하고 나의 티 셔츠를 살피더니

“어머니 그 셔츠, 면이 아닌 거 아니에요?”

하며 당장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었다.

함께 쇼핑하면서 세 할머니들이 아무도 순면 옷을 사야 된다는 것을 몰랐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미국에 있는 내내 아들내외의 면 티를 얻어 입고 지냈다. 고터에서 산 멋진 원피스는 한번 입어보지도 못했다.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친정 부모님 생각이 났다.

우리 부모님은 딸이 태어나자마자 우리 집에 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거진 삼십년을 우리와 함께 사셨다. 우리 엄마는 우리 집 딸, 아들을 두 말 않고 키워주셨다. 아들 집에서 손자를 돌보게 되자 엄마의 고충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사업에 부도를 내면서 살던 집도 경매로 넘어가고 우리 집으로 와서 사셨다. 우리 엄마는 돌아갈 당신 집도 없었으니 얼마나 감옥없는 창살에 갇힌듯 당신 삶이 답답하고 눈물 겨우셨을까! 나는 이제야 엄마 처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삼켰다.


아내의 하소연 탓인지, 태어난 손자를 한번 보고 싶은 욕심 탓인지, 마침내 남편이 미국으로 건너올 생각을 하였다. 갑자기의 결정이라 이번에는 비행기 티켓이 문제였다. 남편의 쌓여있는 마일리지에도 불구하고 프리스티지 승급 좌석이 없었다. 비싼 비즈니스 좌석을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아들내외가 다함께 한국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마침 며느리가 한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연사로 초대를 받아 가게 되어있었다. 아들도 6주의 육아휴가를 얻은 참이어서 갓난쟁이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널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나의 삼개월로 예정된 육아연수는 한 달 반 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내가 인턴과정에서 짤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인천공항에 내린 것이 새벽 4시 반 경이었다.

우리의 극구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남편은 운전이 능숙하지 못하여 당신이 손수 운전하겠다고 하면 온 식구가 가슴을 졸인다.


공항에서 할아버지와 손자의 첫 상봉이 이루어졌다.

아이는 열두 시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까만 흑요석 같은 눈을 들어 자기를 안은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긋방긋 미소도 지어주었다.  

남편을 얼핏 보니 얼굴에 복잡한 상념이 지나가는듯했다. 어려운 암수술을 견디고 오늘날 손자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으니 그 마음의 감개가 어떨까 하여 내가 지레 뭉클하였다. 그 순간을 찍은 사진에는 남편이 거의 울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아버지에게 자식을 안겨드렸으니 아들내외는 효도를 다 한 셈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들내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아들내외가 손자를 데리고 처가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남편과 작은 밥상을 차려 마주 보고 식사를 하였다. 밥솥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미국 가기 전 내가 뚜껑을 빼어 청소해 둔 것을 남편도 아주머니도 끼우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새로 밥을 고슬고슬하게 하여 남편과 마주 앉자 남편은  “당신이 반찬이야” 라며 자기 앞에 앉아있는 할멈을 바라보며 웃었다. 남편이 웃자 남편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피어났다. 한 달 반 사이에 남편은 더욱 야위고 기침은 더욱 늘었다.


남편 주치의는 남편이 암수술한 지 5년이 되었으니 이제 완치가 된 것이라며 완치판정을 해주었다.

아내가 돌아와 안심이 된 탓인지 남편이 제법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나는 남편의 허벅지 살을 살살 만져보았다. 살이 빠져 그런지 노인피부가 더욱 탄력 없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혼자 외쳤다.

“여보 내가 돌아왔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열심히 당신을 보살펴 암에서 해방된 당신을 건강하게 지켜드리게요! 손자 재롱도 보면서 우리 오래 같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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