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제 이철호 교수로부터 초청을 받고 이 교수가 설립한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의 해단식에 참석하였다. 이 교수와는 "한국콩박물관건립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며 경북 영주에 콩박물관을 설립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 자리에 초대받게 되었던 모양이었다.
참가하고 보니 한국식품학계의 쟁쟁한 원로들이 다 모인 것 같아서 약간 안절부절못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철호 교수와 사모님을 뵙고, 우리가 콩박물관을 짓기 위해 노력하던 원년 멤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못 보던 사이에 위원들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있었으나 그래도 대구에서 올라온 황영현 교수와 충주에서 올라온 김석동 박사의 정열에는 여전히 청년의 기개가 느껴졌다. 나는 <고국> 9권을 집필한 김이오 작가 곁에 앉았다.
이날의 모임은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을 해단하고 고려대학교에 <한국식량안보연구소>를 새로이 개설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한국식량안보재단>은 이철호 교수가 1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끌어 온 연구재단이었다. 따라서 이 자리의 주인공은 이철호 교수였다. 모두들 입을 모아 이철호 교수의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앞날의 평안을 빌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철호 교수를 흠모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내 마음의 격동에 따라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이 되었다.
이철호 교수는 1945년생이니 해방둥이이다. 이 교수의 자서전 <광복 70년 인생 70년>에 의하면 이 교수의 고향은 함경북도 흥원면 삼호면이었다. 이 교수의 할아버지는 삼호면에서 명태 장사로 큰돈을 벌었고, 정미소와 목재소도 가지고 있어 당대의 재벌에 해당하는 분이셨다. 자식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할아버지 덕분에 이 교수의 아버지는 연희전문을 졸업하였고 삼촌과 고모들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해방이 되고 이북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아버지는 반동분자로 찍혀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 후 행적을 알 수 없이 되었다.
1.4 후퇴 때 이 가족은 함흥에서 흥남까지 눈길을 걸어 미군 LST의 줄사다리에 결사적으로 기어올라 거제도로 올 수 있었다. 출발부터가 영화 속에 나오는 어떤 드라마와 유사하다.
거제도에서 초등학교를 보낸 이철호는 1955년 어머니의 결단으로 서울로 오게 되었다. 가난했던 소년은 택시 조수와 엘리베이터 보이도 하며 가난과 싸우는 중에도 기죽지 않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고려대학교 농예화학과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소년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만일 나를 합격시켜 주시면 농업을 연구해서 배고픈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하느님은 소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철호는 그의 기도대로 농업을 연구하여 여든이 넘는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우연한 기회에 덴마크 농업 유학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덴마크의 왕립농대에서 농업 박사를 받은 그는 미국 MIT에서 4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모교인 고려대학교의 교수로 돌아왔다. 그동안 그는 많은 독서를 하며 내실을 키웠고 가급적 산업체 방문의 기회를 만들며 국제학술대회를 꾸준히 참석하여 학문적 토대를 쌓았다.
이 교수는 콩단백질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당시 KIST에 계시던 권태완 박사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그는 귀국하자 권태완 박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권태완 박사의 연구 태도와 인생관에 깊이 감명을 받게 되었다. 권박사님도 이 교수의 총명함과 열성을 알아보시면서 이것이 두 사람의 연대를 이루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식품학계에 두 사람은 학회를 만들고 한국의 전통발효기술에 대한 영문 문헌초록집을 만들어 우리 기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한국식품문헌총람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소중한 자료를 남겼다. 물론 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그 당시 선각자 식품학 관련 연구자들의 열성과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권태완 박사님은 필생의 소원인 한국콩박물관의 건립 사업을 이철호 교수에게 부탁하였다. 이 교수는 권박사님의 염원을 들어 1998년부터 콩박물관 건립을 위해 매진하였다. 이 일에 내가 미력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나와 이교수의 인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교수는 아무도 이루지 못할 추진력과 집중력으로 이 일을 추진해 2015년 4월 마침내 영주시에 콩세계과학관 개관식을 이루어내었다. 이철호 교수의 집념과 추진력이 구심력이 되었음을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철호 교수는 해방둥이로 태어나, 흥남에서 미군 군용선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온 자신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고 썼다(<광복 70년 인생 70년>에서). 정년을 맞아 그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무슨 일인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일이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의 설립이었다. 그는 식품학 연구 학자로서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낮고, 세계는 식량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우리의 삶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사제 1억을 털어 재단을 설립하였고, 이 교수의 취지에 동참하는 기업들이 열성적인 지원을 보내주었다.
재단 창립 발기인 총회가 2010년 4월 27일이었으니 재단 해단식이 이루어진 오늘(2024년 11월 15일)까지 무려 15년간 그는 외로이 이 일을 이루어 내었다. 그동안 저서와 세미나와 연구논문과 <10년 사> 발간 등 거론하기에도 벅찬 업적들이 많았지만, 매달 발행되던 뉴스레터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169회나 발행되었다는 사실이 재단의 노력을 방증한다. 이 모든 일이 한 사람의 집념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눈물겹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단은 이제 <한국식량안보연구소>로 발전하여 고려대학교 내로 편입하게 되었다. 이제 대학의 지원과 훌륭한 교수들, 학생들의 노력에 의해 연구소는 더욱 크나큰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철호 교수님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어 이 교수의 초대에 즐겨 응하였다. 그 자리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한방 가득하였다. 내 눈에는 한국식품학계의 기라성 같았던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나는 이철호 교수의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반가운 얼굴들과 악수를 나누며, 한담을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자리는 식사를 하고 밤늦은 시간에 파하였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노학자들이 “아이고 다리야! 허리야!”를 연발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마치 이승만 대통령을 기린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난 후의 소감 비슷한 감격이 치솟았다. 이제 어제의 영웅들은 늙어간다. 어떤 분들은 돌아가셔서 이 자리에 오시지도 못했을 터였다.
우리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것이 확연했다.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우리 시대가 노력한 많은 것들이 자랑스럽게 회상되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이어받아서 <한국식량안보연구소>를 발전시키고 국민들과 정책담당자들에게 식량자급의 중요성에 대해 깨우치는 소금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동안 이철호 교수님 수고 많으셨다고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다시 전한다. 그리고 이제는 늙고 있는 우리 시대의 연구자들에게도 편안한 여생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모두들 격랑의 대한민국 속에서 수고 많이 하셨어요.”
참고문헌
이철호저 <광복 70년, 인생 70년>, <팔십 인생>